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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활동

 

박사를 지원하기 전에 연구라는 것을 나름 흉내는 내봤던 적이 있어서, 약간의 데이터를 들고 있었기에 1년 차에 Dr.Abetti 교수와 연구하나를 출판할 수 있었고, 첫 해에 냈다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많은 연구였다. 학기를 더해 가면서 자신만의 연구에 대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아마 이때가 가장 활발히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부족하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학기가 아닐까 한다. 특히 1년 차 말 Qualifying exam을 통과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논문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데, 수업도 이에 발맞추어 각 분야별로 맞는 수업을 교수님들께 들을 수 있다. 

 

3학기 들은 수업들;

- Strategic Management of Technology Innovation

- Empirial Issues in Management Research

- Seminar in Innovation Management and Entrepreneurship

- Data Analysis for Doctoral Student

 

다만, 3학기에 접어든다고 영어가 나아지는 건 결코 아니고,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전공분야가 깊어지고 그에 심도깊은 논문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더욱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논문이 점점 포커스가 되어 좋을 것도 같지만, 부족한 영어는 한층 나를 괴롭게 한다. 여전히 논문 하나를 소화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1년 차 봄학기 (두 번째 학기) 때 들은 IT & Organization Design 박사 세미나 텀페이퍼를 냈던 논문을 교수님께서 함께 발전시켜 HICSS라는 하와이에서 하는 학회에 제출하자고 하셨고 봄학기가 끝나고 얼마 후 제출을 하여 결국 Accept을 받게 되어 2011년 1월에 첫 학회를 참석하게 된다. 박사과정은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약간의 Conference 참여 비용을 지원해 주는데 RPI의 경우는 $500불 정도로 기억한다. 동부에서 하와이까지는 비행기 비용, 호텔 비용, 학회 등록비 하면 그 돈으로 부족했는데 교수님께서 $1,000불을 지원해 주시고 나머지는 내가 부담해서 참석하기로 하였다. 난생처음 가보는 하와이였는데, 첫 째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떠나야 해서 어떻게 보내고 왔는지는 가물할 정도이다. 다만 그간의 스트레스는 약간 날려버릴 수 있긴 했는데, 이 학회의 경우는 좀 특이했던 게 발표하러 양복을 입고 갔더니 나만 양복을 입고 온 것이다 (다들 하와이 특유의 반바지에 꽃 프린트 티를 입고 오셨다). 이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발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에서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당시 시간날때 Lost 드라마를 종종 봤는데, 마치 Lost의 한장면 같았던
한겨울에 하와이에서 학회를
조용한 바다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산책을
하와이에서 돌아오자마자 동네가 얼어붙었다. 영하 30도 (진짜 코가 어는듯한 추위)

그즈음부터 경영학 분야에 박사과정을 하는 학생들이면 아마 비슷한 조언을 받겠지만, 2년 차가 되는 시점부터 해서 교수님들이 AOM(Academy of Management)에 멤버가 되어 리뷰어로 참여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이는 AOM annual meeting에 제출하는 논문의 수가 어머어마하여 이를 심사할 리뷰어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리뷰어로 참여하는 3개 정도까지 최신의 논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리뷰를 하면서 또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년 AOM은 겨울에 논문을 제출하여 8월 초에 학회가 진행되고 전 세계에서 참여하는 가장 큰 학회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부분 경영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참여를 하고 특히 북미에 있는 사람은 웬만하면 참여하는 학회이다.

 

HICSS에 발표했던 논문과 마찬가지로 1학년 2번째 학기인 봄학기 때 들었던 Seminar in Organzation Theory 박사 세미나에서 한국기업의 지배구조와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논문 (Kim, Kim, Lee 2009 Organization Science)을 접하게 되고, 그 논문을 그대로 replicate 하기로 한다 (기존에 출판된 좋은 논문을 그대로 따라가 보는 것은 데이터 처리나 방법론 학습에 아주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한국기업의 데이터를 구해 그 논문과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데 그다음 한 학기의 대부분을 써버렸다. (데이터셋이 똑같지 않아 같은 결과는 아니었음). 이왕 데이터가 모이고 결과를 돌려본 김에 AOM에 논문을 제출해보기로 한다. 

 

첫째가 태어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쓴 논문을 보며 눈물겹게 한줄한줄을 더해가며 마무리했는데, 리뷰어들이 잘 봐줘서 그런지 혼자서 작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Accept을 해줘서 2011년 여름 불같이 뜨거운 한여름에 San Antonio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세션에는 많은 분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세션 체어 분이 지금은 기억을 못 하는 교수님이었는데, 처음 발표이며, 박사과정 2년 차라고 하자, "열심히 했네"하시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분들에게서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AOM은 학회가 너무 커서 사실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기보다는 네트워크의 효과가 크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Recuiting도 이 학회에서 주로 이루어지니 안 찾을 수가 없긴 하다. AOM 이후 나는 AOM(전미 학회) + EAOM(동부지역 AOM)이나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 등 지역이나 분야에 특화된 학회를 함께 참였는데, 이런 특화된 곳으로 가면 사람 수가 적어서 보다 긴밀한 관계와 논문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은 박사과정이 지원할 경우 교통비 일부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AOM이나 WCRS 등 각 학회에서는 Doctoral student workshop 같은 게 있는데 박사과정이 성공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서 논문의 최신 흐름이나 주요 저널들의 에디터가 나와서 어떤 부분을 조심하면 되는지, 그리고 초기 교수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고, 또한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다만, 학회 때 reception이나 networking dinner가 있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자리이긴 하나, 영어가 짧고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도 못하며 낯도 많이 가리는 나는 좌절의 연속인 자리였다. 거기서 유명 교수님을 사이에 두고 박사과정들의 치열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자체도 진 빠지는 일이거니와 정말 똑똑한 친구들이 많은데 여기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동기부여와 좌절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이 자리는 익숙지가 않다). 

특히 서로 대화를 하는데 뻘쭘이 서 있다가, 끼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몰라, 지도교수님(미국분)께 물어봤더니.

 

"아, 그건 미국 사람도 어려운 일이야. 다만 일단 그 사람들 서클 옆에서 서있다가 한 발을 내딛으면 그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 줄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중 누군가가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을 할 것이야.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아주 간단히 말씀해 주셨지만,

 

실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대화를 하고, 못하는 영어로 끼어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니 언제쯤이야 영화에서 보듯 자연스레 와인 한잔을 들고 그 대화의 무리 안에 들어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다만, 거의 말년 차가 다가오자 나도 급했던지, 내가 원하는 학교의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말을 던지는 무리수(?)를 뒀던걸 생각하면 맞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식구가 늘었지만, 함께 학회를 가기로 첫째의 첫 비행기 (앞으로도 비행기는 지겹게 탐)
라구아디어 공항에서 바라본 맨하튼
저녁 7시가 넘어서 도착했지만, 온도는 아직 105도..
너무 더웠던 San Antonio, TX
WCRS가 열렸던 University of Washington, 학교가 참 예뻤다.
UW 의 business School.
Networking Dinner가 열렸던 Seattle의 상징 Space Needle.

지도교수 선정

사실 한국, 미국을 막론하고 박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지도교수이다. 한국에 많은 언론에서 지도교수의 갑질이 뉴스에 종종 나오는 걸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지도교수의 영향력은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막강하다. 생활은 물론이고 졸업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졸업 요건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 한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석사/박사 과정에 대한 졸업 요건이 있다. 영어점수 얼마 이상, 그리고 SSCI 논문 2편 이상 등등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정해진 기준이 있다 (물론 그 기준은 학교에 따라 다르다). 석사를 한국에서 하고 미국으로 온터라 그 부분을 모르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그런 졸업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좋지만은 않은 게 다른 말로 하자면, 지도교수 마음이라는 거다. 지도교수가 생각하기에 아 이 친구의 졸업논문은 졸업할 만하다고 판단된다고 생각이 들어야 하기에 그만큼 주관적이고 그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선에서 엄청나게 동떨어진 기준은 아니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를 한 바가 있지만, 공대의 경우 펀딩 등의 문제로 지도교수를 미리 선정하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문 사회계열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RPI의 경우도 Qualifying exam이 지나면 지도교수를 서서히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1년 차 2학기, 2년 차 1학기 정도에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본인이 원하는 연구분야를 선택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받는다. 본인이 박사과정 이전에 학문분야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아는 경우는 이 접근법이 의미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접근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2년차 첫 학기가 되자 그동안 들었던 수업과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을 바탕으로 지도교수가 되실 몇 분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다. 전략하는 분과 IS(Information System), 그리고 산업생태학을 전공하는 분이었다. 많은 부분을 고민을 했는데, 일단은 경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고, 아무래도 좋은 곳에 논문을 많이 출간하신 분, 그리고 수업을 들으면서 내 핏에 맞다고 생각이 되는 분, 아울러 나의 경우는 가족과 아이가 있는 관계로 그것을 조금 이해해 주실 만한 분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생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하나둘 지도교수를 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빨리 학회 논문을 발전시키면서 다행히 몇 분의 교수님들과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는 동안 어떤 교수님이 나와 맞을지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사실 생뚱맞게 경제학과에 계시는 Kenneth L. Simons 교수님께 찾아가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했다. 이 교수님은 방법론 수업을 하셨었고, 첫 학기 때 내가 1등을 했던 수업을 가르치셨던 분이었다. 아울러 여름방학 때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학은 여름에는 계약이 안되어 있음 = 월급이 없음) 본인이 NSF를 통해서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셨는데 그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여름 인건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나는 이 분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와 대략의 연구분야를 알 수 있었고, Disruptive innovation에 대해 연구해보자는 교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맞아서 선택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분이 경제학과 교수님이시고 (경영학과에도 일부 소속하셨으나 주는 경제학과였음) 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이 분을 선택했다고 하자, 박사 코디네이터였던 교수님이 좀 마땅치 않아하셨던 것 같다. 아무래도 경영학과에도 교수가 많은데 왜 경제학과 교수를 선택했냐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까지 그분을 고민했던 것은 경제학과 교수님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Job을 잡을 때 아무래도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로 가시는 학회가 경제학회 이셨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경영학 주요 탑 저널에도 출판을 하시기도 하여서 경제학 중심은 또 아니시기도 했다. (사실 중간 즈음?)

 

그래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제일 가깝고, 그 교수님이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고, 방법론에 뛰어나셔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나중에 그 교수님을 선택했다고 와이프에게 이야기하니 "아! 그분 되게 엄격하실 것 같은데.." 하면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고, 다들 의외의 선택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지금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친절히 Open door policy로 언제든지 찾아가면 앉아서 몇 시간이든 시간을 보내주셨고 (이메일 연락은 잘 안되지만, 오피스에 주로 계셨음), 논문을 써가면 일일이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수정해 주셨다. 본인이 나중에 Jobs을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시며, 이력서, Cover letter 쓰는 것도 하나하나 봐주시기도 하셨다. 아울러 나중에 졸업 시점이 되자 일 년 더 준비를 해서 제대로 잡마켓에 나가길 원하셨는데 (사실 대부분의 교수님이 그러하다), 나는 경제적 상황도 그렇고 일 년을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그걸 이해해 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고맙기 그지없으신 분이라. 나중에 UNIST에 임용되고 난 후 미국 출장 나올 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뵜었고, 한 번은 과제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으로 초대를 드렸다. 사실 지도교수, 박사과정 학생이라고 해서 한국처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고 4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은 박승호 연구원이 돌아갈 때 저녁 한번, 그리고 내가 졸업 디펜스를 하고 박사가 된 후에 점심 한번 이렇게 두 번 식사를 하였으니 그분도 나도 어지간히 관계가 사무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한국으로 오셔서 서울에서부터 카이스트에서 강연하시고 (석사 때 지도교수님이 초대해 주심) 그리고 울산에 오셔서 UNIST에서 특강도 해주시고 내 학생/다른 교수님과도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 경주 불국사를 구경시켜 드렸는데, 불국사가 참 좋았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연락이 뜸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연락을 한번 드려야겠다 싶다. 

 

그렇게 2년 차가 마무리되고,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UNIST에서 학부생/대학원생 들과 다과를 들면서 자신의 연구자 인생을 공유해주셨다.
사진을 찾으려고 생각해 보니 교수님과 찍은 사진도 한장 제대로 없네. 이건 한국에서 출국하실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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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참 사이가 좋았고 서로 도움이 많았던 동기들은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

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엠블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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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5편을 써오면서 공부에 대해 상당히 강조를 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사과정은 공부가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어떻게 1년 365일 24시간을 공부만 하겠는가? 아울러 그렇게 어렵게 박사과정을 왔으니 '나는 공부만 해야지'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 공부가 주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왕 새로운 문화를 가진 미국에 온 거 주변을 둘러보고 그 미국을 경험하는 것이 긴 박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글을 쓰다보니, 공부에 파묻혀서 사는 것처럼 나왔는데 (사실 나도 자각을 못했음), 글을 쓰려고 사진을 검색하다 보니 첫해부터 엄청 돌아다닌 걸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더 힘들었구나.. 이번 편은 사진이 좀 많을 것 같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미국에 와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자연이었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길이 었다. 아무래도 과정 자체가 긴 관계로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진을 죽 다시 정리하다 보니 정말 머리가 장난이 아닌데, 사실 미국 미용실에 가서 자를 수도 있었는데 왠지 모를 불안함 마음에 (그리고 돈도 아낄 겸)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본의 아니게 70년대 장발족이 되어 버렸다.

 

건강을 잘 돌봐야 합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Upstate NY은 자연환경이 참 좋다. Troy에서 약 40분 정도 북쪽으로 운전해 가면 Saratoga Springs가 있는데 여름 휴양도시라고 보면된다. 여기에는 Saratoga Performing Arts Center가 있는데 이곳이 여름에는 Philadelphia Orchestra가 공연을 하는데, 나는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오케스트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거기서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Lake George라고 있는데 이곳도 참 아름다운 호수이다. 이곳에 종종 가서 자연을 보면서 상쾌한 숨을 내쉬곤 했다. 이 뉴욕 북부는 The Adirondack Mountains (애디론댁 산맥, https://visitadirondacks.com/)은 미국본토 (하와이, 알래스카 제외)에서 가장 큰 주립공원이라고 하는데 자연환경이 참 아름답다. 

 

겨울, Lake George NY
겨울 Lake George NY

그러던 중, 기계연구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성균 씨가 동부로 출장을 왔다기에 급 번개를 하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알바니로 온 그 친구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우리를 찾아온 손님이었다. 새로운 손님이라 우리는 보스턴과 로드아일랜드를 한 바퀴 도는 급 여행을 가기로 한다. Troy (Albany 포함)는 그 자체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동쪽으로 2시간 30분 정도면 보스턴에 갈 수 있고, 남쪽으로 2시간 30분 정도 가면 뉴욕, 서쪽으로 4시간을 가면 나이아가라 폭포, 북쪽으로 3시간 가면 캐나다 몬트리올을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님이 온 김에 동쪽 도시를 짧게 한 바퀴를 돌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보스턴은 참 좋은 기억이 있는 도시이고 여름에 가보긴 했지만, 겨울에 보스턴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다만 엄청 추웠던 억이.

 

아무래도 박사과정에 있고, 그 친구도 공부에 관심이 있어 하바드를 한바퀴 돌기로 한다.

하바드 대학 지도
학교를 보니 진짜 공부해보고 싶긴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바드에 가고싶은 마음이 담긴 존 하바드 동상 (설립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하바드 경영대 건물
이제는 보기 힘든 이런 책방 분위기
보스턴에 왔으니 랍스터를 먹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하는 Union Oyster House 
보스턴의 상징인 프루덴셜 빌딩
프루덴셜 빌딩에 가면 야경이 멋있는 Top of the hub 가 있다
다음날 로드아일랜드에서 만난 갈매기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박사과정 같음

Troy에서 동쪽으로 1시간여를 달려가면 메사추세츠 주를 넘어가게 되는데 그곳에 Williamstown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사실 이 도시를 많은 분들이 알기는 어려울 것이고 알만큼 큰 도시도 아니다. 이 도시에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아주 유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Williams College이다. 나도 잘 몰랐었는데 Williams College는 1793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좋은 private liberal arts college이다 (https://www.usnews.com/best-colleges/rankings/national-liberal-arts-colleges). 년간 학비가 $57,000 이 넘어가는 학교이다. 한국에는 liberal arts college라는게 다소 생소하지만 교수-학생수의 비율이 아주 낮고 (Williams College의 경우 1:7 정도의 비율이다), 몇몇 전공에 집중하면서 교육에 집중하는 형태의 대학이다. (Williams college는 arts and humanities, social sciences, and science and mathematics의 3개의 전공이 있음). 일반적으로 재력이 있는 집의 아이들이 이곳을 통해서 기본기를 쌓은 후에 대학원을 진학하는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교수/학생 비율이 낮고 학교 자체가 교육에 집중하다 보니 보다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은 학교가 있다 보니, 이곳에는 괜찮은 미술관이 하나 있는데 The Clark이라고 하는 미술관이 있다. 간혹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다.

 

Troy에서 Williamstown으로 넘어가는 겨울길은 참 멋있다
Williams College, MA
The Clark 미술관, MA

2010년 봄, 기계연구원의 이준희 박사님이 포닥으로 필라델피아에 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Troy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운전해서 내려가기로 한다. 필라델피아는 사실 나는 잘 몰랐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록키 영화를 찍은 무대이기도 했고, 미국의 3대 미술관 중에 하나라고 하는 필라델피아 뮤지엄이 있다. 아울러 어디가서든 맛볼 수 있는 필리스테이크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 박사님은 우리에게 안방을 내어주시기도 하고 항상 훈훈한 얼굴로 맞이 해주는 형님. 나중에 Albany도 오셨었다. 외국에 있으면 누구든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 갑자기 필라델피아로 짧은 여행 돌아오는 길에 뉴저지에서 잠시 들렀던 프린스턴..

 

박사과정이라서 그런건 아니지만 나는 항상 학교를 처음 방문한다. 유명한 와튼 스쿨
필라델피아 시청
자유의 종
필라델피아의 맛을 보여주시겠노라고 간 Jim's Steaks 줄이 엄청길다.
이렇게 하면 왠지 맛있게 느껴지긴 한다. 수많은 싸인들
한 시간을 기다려 받은 필리치즈스테이크, 대박!
다음날 찾아간 필라델피아 뮤지엄
브랑쿠치 작품
돌아오는길에 들른 프린스턴, 참 학교가 멋있었다.

사실 일년동안 보스턴, 필라델피아,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뉴욕, 버지니아 등 많이도 다녔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미국에 와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멍하니 자연환경을 보며 운전을 하는 것이라. 이렇게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어디로 가던 주변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큰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

 

Troy에서도 틈틈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친구도 가족도 없으니 시간이 될때마다 조촐하게 음식을 차려서 나눠먹기도 하고,

Troy에는 Troy Savings Bank Music Hall이라는 유명한 건물이 있다 (https://www.troymusichall.org/visit/about/). 1871-75년까지 건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건물이 건축과 음향적으로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한다 - 전공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주 유명한 분들이 가끔 와서 연주를 하곤 한다. 

 

Music Hall에서 가끔 연주도 듣고,

다음에 봄이 되고 여름이 다가오자, 녹음이 드리워지고 The Adirondack Moutains을 접하고 있는 Troy는 주변에 갈만한 공원이 많이 있다 그래서 동기 유학생들(가족)과 함께 바비큐의 시즌이 시작되고 주말이면 맥주 한잔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리고 Saratoga Springs에서 Philadelphia Orchestra와 함께 여름을 보낸다.

 

음 바베큐, 언제나 지민군이 불잡이.
눈과 입이 호강스러운 주말
Saratoga Performing Arts Center의 잔디밭에서 (lawn pass)로 만나는 Philadelphia Orchestra, 맥주에 피자면 여름밤 그만이다.
오케스트라의 매력에 빠지게 만든 필리오케스트라
요요마와 사라장이 협연을 가끔하는데 사라장의 사인을 받음
주말을 함께 보내는 유학생들, 바베큐가 익길 기다리며
반딧불과 함께 이렇게 여름밤은 깊어간다.

네.. 이렇게 놀았습니다. 공부만 하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공부만 하겠습니까? 

이때 즈음 저희 가족에는 큰 변화가 생기는데, To be continued...

다음편 예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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