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아마 독자들이 이거 갑자기 왠 날씨 타령인가 하실 것 같다. 

 

UNIST에 있으면서 제법 많은 학생들이 유학에 대해서 상담을 요청해서 해준 적이 있다. 그중에서 학생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어떤 학교를 지원할 것이며, 어느 학교를 가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인데, 아마도 명확한 계층이 나누어져 있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입시를 준비해 온 학생들이기에 당연히 이를 중요시 여기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유학 관련 FAQ(https://07701.tistory.com/notice/120)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물론 학교의 명성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느 주립대보다는 Harvard, MIT, Stanford를 다닌다면 주변에도 그렇고 스스로도 동기부여가 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저 학교들 다니고 싶다 - 어드미션을 받는다면 일단 먼저 축하드리고 열심히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의 명확한 연구분야와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당연한 이야기 리라 생각한다.) 물론, 자신과 오랜시간 동고동락할 지도교수도 아주 중요하다 (지도교수는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인간이 어떠한 과정으로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모형 중에 ELM(Elaboration Likelihood Model, 정교화가능성모델)이 있는데, 이 모형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심 경로(Central route)나 주변 경로(Peripheral route)를 고려한다고 하는데 중심 경로는 높은 정교화 과정을 통하고 (심사숙고할 만한 정보), 주변 경로는 비교적 낮은 정교화 과정 (단순히 참조할 만한 정보)를 거친다고 이야기하는데, 학교의 선택에서 학교의 명성, 프로그램, 지도교수, 자신의 관심 연구분야와의 매칭은 중심 경로에 해당하는 정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변 경로에 포함할 만한 정보는 무엇이 있는지는 유학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학생들(예비 유학생)에게 공통적으로 이야기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날씨'이다. 한국의 경우 나라가 작기에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뚜렷한 사계절이 존재하고 물론 미세먼지의 공격은 있는 편이지만 비교적 햇살이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북유럽 (영국 포함)을 여행하면 햇살이 나오자마자 온통 잔디밭에서 뒹굴며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든 햇볕을 피하려고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든 햇볕을 찾아다니는구나' 라며 그 차이를 신기해하곤 한다. 실제로 학위가 끝날 무렵 Technical University of Denmark (DTU)에 방문에서 방문면접 (Campus visit)을 본 적이 있는데, 덴마크는 햇볕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어서 모든 건물에서 조금이나마 빛을 받기 위해 채광을 엄청 신경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건물 안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들이 꽤 멋져 보였던 기억이 있다.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박사과정은 참 외롭고 긴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논문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데이터를 돌려서 내가 생각했던 가설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오면 정말 짜릿하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다. 마치 동굴에서 수년 동안 마늘과 파를 먹고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느낌이다. 그러기에 감정의 기복이 상당히 심한데, 나의 경우도 마찬 가지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서 빠듯한 경제사정에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SNS를 통해서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이 가족들과 휴가를 가서 환한 얼굴로 V 자를 그리며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웃는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 수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오기도 하는데, 날씨까지 우울하다면 기름을 붓는다.

 

Upstate NY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누누이 강조했던게 '추위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하나 몰랐던 것이 사람의 체온이 머리로 빠져나간다고 항상 따뜻한 모자를 써서 몸을 따뜻하게 해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렇게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한국에서는 항상 멋짐과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하기에 모자를 잘 쓰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물론 Rochester나 Cornell 대학이 위치한 Ithaca, Buffalo 등 Albany보다 북쪽의 경우는 대략 일 년에 5개월 정도는 겨울로 보면 되는데, 내가 있었던 Albany도 상당했다. 대략 1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로 보면 되는데, 개인적으로 추위를 잘 견디는 편이긴 한데, 문제는 햇볕을 보는 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기분도 처지고 우울감이 증폭되는 영향이 있다. 특히, 가족이 있다면 외부 활동이 별로 없는 경우는 상당히 우울감에 빠질 수 있기에 이에 날씨가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준다. 나의 경우는 나중에 집안에 Sunlight lamp 같은걸 사다 놓기도 하였다.

 

캘리포니아나, 조지아, 플로리다와 같은 경우는 햇볕은 좋으나 다른 기후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어디가 꼭 좋다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맞는 기후,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도시 vs 시골도 마찬가지 고민이다. 어디가 좋다고 이야기 하기 힘들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따라서 위치를 정하는 것이 좋다.

 

물론,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하는건 두 군데 이상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을 경우이기에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첫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을 때 부터 눈발은 날렸고, 박사과정 하는 동안 실컷 눈 구경을 했던 듯싶다. 나중에는 좀 즐기긴 했다만, 눈이나 추위보다 저런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 사람의 감정이 지하실을 파고 내려간다.

반응형
반응형

업 스테잇 뉴욕의 가을

 

미국의 '업스테잇 NY'이라고 불리는 뉴욕의 북부는 캐나다에 접하고 있기에 가을이 빨리 온다. 우리가 한 번 즘은 들었던 '뉴욕(맨해튼)의 가을'도 멋있지만, 나는 업스테잇 NY을 몰랐으니 그 가을을 알 리가 없었다. 뉴욕주의 중북부 - 동쪽으로 매사추세츠와 붙어 있다 - 는 산과 나무가 많아 가을이 참 아름답다. 최근에 뉴욕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을 발견했다고 하니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3080) 우리가 일반적으로 뉴욕하면 맨해튼(혹은 뉴욕시티)을 뉴욕이라고 칭하기에는 뉴욕주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정신없이 여름을 보내고 맞이한 가을은 참 아름다웠는데 캠퍼스도 온갖 낙엽들로 각종 색깔이 물들고, 뒤에 Frear Park를 끼고 있는 아파트도 온갖 낙엽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마시며 멍하니 사색(멍 때리기)하기 참 좋았다. 그래서 주변을 걸으면서 한 주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봄에도 이쁘지만, 가을이 예쁜 Lally 건물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기 딱 좋았던 가을

화룡점정 자동차 구입

그 즈음, 차를 구매하기로 한다. 룸메이트 차로 연명하고는 있었지만, 언젠가 나도 차가 필요할 테고 특히 연말이 되면 와이프가 미국으로 넘어오니 더 이상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마다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보통은 필기시험을 치고 나면 임시운전면허증이 나오고 그 이후에 강의를 한번 듣고, 실기시험을 치고 정식 운전면허증을 갖게 된다. 국제면허증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유효기간이 1년이라 신분증을 위해서 매일 여권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관계로 필수적이라 생각해서 오자마자 한 일 중에 하나는 바로 필기시험을 쳐서 임시면허증을 받는 것이다. 필기시험은 까다롭지 않았고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 혹은 MVA - Motor Vehicle Administration) 웹사이트를 통해 필기시험 문제를 보고 공부를 할 수 있다. 몇 가지 헷갈리는 게 있는데 큰 문제는 없다. Troy에 있는 DMV는 그리 붐비는 편이 아니라서 바로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이 운전면허증에 쓰이는 사진임) 시험을 칠 수 있었고 한쪽 구석에 아주 오래된 칸막이 책상에 앉아서 금방 시험을 칠 수 있다. 얼마 안 되어 임시면허증이 나왔다.

 

학기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조금 미국생활이 적응이 되었을 때 즈음 차를 구매하기로 한다. 미국에서 차량을 구매할 때는 보통 중고차를 살 것인지 새 차를 살 것인지부터 고민을 하는데, 나의 경우는 와이프가 오게 되면 대부분 몰 것이라 수리비며 기타 발생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자 그냥 새 차를 사기로 한다. 지금까지도 중고차를 사본 적은 없지만 구매해 본 사람들은 또 꽤 괜찮다고 들었다.

 

룸메이트는 차를 참 좋아해서 신중하게 고르고 이 때를 이용하여 자신이 타고 싶었던 차 브랜드 딜러샵에 가서 타보고 싶은 차를 실컷 타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하면 픽업하러 오기도 그리고 끝나면 집 앞에 내려주기도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어디 전화해서 통화를 할 자신이 없었기에, 같이 수업을 듣는 미국 친구 Tracy에게 함께 해줄 수 있냐며 부탁했다. 이 친구는 미국 정착에 참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내가 안 되는 영어로 수학을 가르쳐 주고 그 친구는 나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지역 케이블 회사에서 광고영업을 했던 경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카쇼핑을 하기로 한 날 아침에 룸메이트에게 "오늘 차 사러 갈 거야" 했더니 "많이 타보세요"라며 학교를 향했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Tracy와 함께 먼저 현대로 갔다. 현대로 간 이유는 소위 가성비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실제 가보니 가격 흥정이 잘 안되었다. (Tracy가 아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현대와 몇 군데 딜러를 돌았는데 몸만 피곤하고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그 친구가 "다른 브랜드는 안돼?"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뭐 특별히 선호하는 건 없다"라고 하니 혼다 딜러를 알고 있다며, 괜찮냐고 물어본다. 이미 좀 지친 상태라 그러자고 하니 전화를 해보더니 제법 할인을 해줄 것 같다며 가보잔다. 그리고 실제로 갔더니 전년도 모델을 꽤나 할인을 해준다고 하기에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본다. 괜찮다. Tracy가 단도직입적으로 너의 best offer를 달라고 하자 그 딜러는 제법 할인된 가격이라며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더니 Tracy가 나에게 "괜찮은 딜인 것 같다"라고 말하며 인터넷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스마트폰 없었음)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가격을 한번 봐달라고 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형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하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린다. 그렇게 얼떨결에 구매한 Honda Accord. 집에 돌아가니,

 

룸메이트: "형 그래서 그 차 샀어요?"

나: "응"

룸메이트: "반나절 만에? 하며 웃는다."

 

그렇다. 나는 차의 디자인이 예쁘기만 하면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서 반나절 만에 사버린다. 물론 한국에서 저축한 돈의 반이 한꺼번에 날라가 버렸다. 리스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현금으로 사버렸다. (신용점수도 거의 없었기에 옵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거금을 보내야 했기에 일주일 후에 차를 픽업했다. 

 

이제 내 발이 생겼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안나지만 감격적인 순간이라 딜러로부터 차를 인수하는 날

김연아

한인 대학원생 수가 많지 않았던 RPI의 대학원생 (석사, 박사) 동기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특히 박사과정의 경우는 적어도 4년 이상이 걸리는 긴 시간을 공부해야 하므로 육체적 건강은 물론 심리적 안정도 필요하다. 더군다나 익숙하지 않은 미국 생활이니 더욱더 그럴 수도 있고, 하루하루가 언어소통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니 계속해서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주말이면 한인 학생들끼리 모여서 같이 밥도 해 먹고 끝나면 맥주 한잔에 이런저런 한 주 동안 자신이 했던 바보짓(외국인으로서 당연히 실수가 많다)을 공유하고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보냈는데, 

 

그러다가 한 명이 정보를 공유한다. "김연아가 온다는데요?" 웅성웅성... 남학생이 대부분이었던 주말모임에서 한 명이 김연아가 경기를 위해서 Lake Placid에서 열리는 2009 Skate America (2009년 11월 13일 ~ 15일) 정보를 공유한 것이다. Troy에서 Lake Placid는 2시간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형 새 차로 한번 가시죠" 한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김연아의 연기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처음 학교가 있는 동네 바깥을 나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 편을 쓰면서 당시에 연기를 유투브에서 찾아보았는데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당시 김연아가 19살이라고 하니 기량이 한창 오르고 있을 때였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기라 더욱더 좋았다. 둘째 날 Long 프로그램 시작할 때 '김연아 파이팅!'을 혼자 외치는 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왜 혼자면 파이팅하냐'며 구박을 받기도 했던.. 아래 동영상 링크에서 32분 10초 경에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RCPgHhtcYg)

 

여기서 부터는 당시에 썼던 블로그에서 가져온다.

 

=====

 

11월 13~15일까지 NY주 Lake Placid에서 열린 2009 Skate America 경기

김연아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좌석을 알아보고 가게 된 곳,

가는 길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곳

그동안 3달동안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Troy를 벗어나 오랜만에 머리를 식히러 잠시 외도를 했고,

그동안 시내주행만 하던 차도 한번 쌩쌩 밟아줘야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떠난 1박 2일 여행

 

일단 김연아 선수는 정말 너무 이뻐 보였고 역시 국민동생으로 칭호를 받을만한,

연기도 정말 일품인, 첫날 세계신기록이 부담스러웠던지, 

둘째 날 연기가 아쉽긴 했지만, 연습 때부터 컨디션이 좀 나 빠보였는데,

그래도 잘한 듯, 앞으로 조금만 가다듬으면 정말 "perfect"이 될 듯,

여기저기 멀리서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잠시 머리 식힌 경험치 고는 너무나 값졌던 여행

 

내년에 또 하게 되거든,

부인과 손잡고 가봐야 할 필수 코스~!!

 

출처: https://07701.tistory.com/category/My life in Troy? page=2 [강박의 2 cents]

 

Troy에서 Lake Placid까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는 여행

올리가는 I-87 이길로 쭉 올라가면 캐나다 몬트리올이 나온다.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려주시고

동형 군이 찍어준 나의 운전 샷, 나의 애마와 함께

온갖 잡다한 버튼이 많은 나의 애마와 함께,

2시간 좀 넘게 걸려 도착한 Lake Placid는 1932년, 1980년 동계올림픽을 치른 곳으로,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나름 고풍스러운 작은 도시

여기는 오늘 김연아가 경기할 경기장 좌석배치도

도시가 아기자기 한 집들로 시내가 이루어져 있고, 걸어서 10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으나 옆에 호수를 끼고 있어 아름다운 도시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샵들이 많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냥 패스.

이 시골에도 있는 스타벅스가 왜 우리 동네에는 없단 말이냐.

저녁 먹으러 임의로 고른 피자집, 엄청나게 큰 피자 2개 시켜서 4명이나 나눠먹었다. 뒤에 보이시는 분은 아마 김연아 보러 오신 분이신 듯

오늘 구경하게 될 김연아 표. 사실은 내일 표긴 하지만, 그거나 그거나

밥 먹고 간단하게 스타벅스 한잔, 뭐 돈은 없고 춥지만 그래도 커피 한잔이 아니면 공부도 집중도 안 되는 나는 이제 미국 사람?

같이 동행했던 룸메 동형 군, 카이스트 천재소녀 미지 양, 기계과 신랑감 후보 1순위 준규 씨.

이곳은 곧 김연아가 나올 경기장 모습

언제 와서 저렇게 김연아 플래카드를 많이도 붙여 놨더라. 대부분 김연아..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붙였겠지만

심사 위원석, 한국 분도 한분 계시고

 

세계기록을 세우고, 인터뷰하는 김연아.

 

이번에 가서 새롭게 부각된 인물, 오서 코치 정말 매너 좋고, 인상 좋고 저 아이스 차 나간다고 손수 문 열어주고, 정말 멋진 코치인 듯

 

다음날 아침 모텔 앞 풍경

뉴욕 북쪽에서 볼 수 있는 산세.. 저 멀리 스키장도 보이고,

아침 공기가 너무너무 상쾌하였던

다음날 아침은 샌드위치 46가지의 샌드위치, 정말 시키기 힘들다 ㅡ.ㅡ;;

나가는 길에 한컷.

발이 되어주고 처음으로 장거리를 운행한 내차

동형 군이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 각도에서 찍어주었네

 

우리가 묵었던 모텔, 그냥 막 찾아간 것 치고 깔끔하고, 저렴한 가격에 잘 쉴 수 있었던 곳

 

반응형
반응형

처음 학교에서 스쿨에 오자마자 박사과정을 담당하는 스텝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건물을 소개받고 방학이라 많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개해 주셨다. 시차 적응은 물론이고, 영어도 잘 안 되는 나는 그 순간이 별로 반갑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거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방학이라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1층으로 내려가니 (건물이 좀 특이하게 언덕에 있어서 현관문으로 들어가면 거기가 3층이고 교수 방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 그래서 던젼이라 불렀다), 교수 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그중에 하나의 방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고, 그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 교수를 인사시켜준다. 할아버지 교수가 반가운 듯 맞아주며 앉으라고 하니 그 할머니는 나를 던져놓듯 놓고 가버리셨다.

 

그 교수님은 Tenure-track (테뉴어를 받지는 않았으나 테뉴어를 받을 수 있는 패스에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형태라 볼 수 있음)은 아니었고 (교수들의 Tenure 및 직급/직책은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미 은퇴를 하시고 학기 별로 계약을 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Clinical Professor 이었는데, 나이가 89세 이셨던 Dr.Pier Abetti 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한번 방문을 하면 1~2시간은 훌쩍 지날 만큼 말씀이 많으셔서 희비가 많이 엇갈리는 분이었다. 그런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일단 나를 반겨해 주시는 그분의 이런저런 질문을 듣고, 본인이 GE에서 근무를 하셨고, 당신의 아버지가 에디슨과 함께 GE에서 일했다고 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첫 만남부터 2시간 동안 역사 공부를 하고 나니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낄 때 즈음, 그분이 "근데 너의 연구 분야는 무엇이냐?"라고 하길래 당시만 해도 아주 개략적인 아이디어만 있었던 나는 출연연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 대학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때 주제가 한국경제발전에서 출연(연)의 역할이었고, 그걸로 학회 발표를 했었다고 하니 그 논문을 한번 가져와 보라고 한다 (아직 학기 시작하기 전),

 

* GE는 많이 아시겠지만 Edison을 포함한 몇 명의 공동창업자가 설립을 했고, 그 중에 Edison Machine Works는 RPI가 위치한 Troy 옆 Schenectady, NY 에 있었다. 현재도 GE의 연구시설이 Niskayuna에 있다.

 

다음날 집정리도 안된 상황에서 노트북을 뒤져서 그 논문을 들고, 그 스텝 할머니께 부탁해서 출력해서 가져가니 당신이 한번 읽어 보겠노라고 하시면서 예전에 KAIST와 학생 연계도 한 적이 있고 모 교수님을 아신다고 또 한참을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미팅에 가보니, 논문을 난도질을 해놓으셨다 (정말로, 난도질.. 컴퓨터가 없으셨고 일일이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면서, 다른 책을 복사를 해서 가위로 오려 붙여 놓으셨다). 그러시면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다. 이거 나와 함께 논문을 써보겠냐고 말씀을 하셨다. (아직 학기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논문을 함께 쓰자고 하시니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분은 정성적 연구를 주로 하시는 분으로 RPI의 박사과정에서는 정성적 연구는 배우지 않았고, 정량적 연구를 주로 배워 다른 교수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어떤 실적이 생기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가 출력해서 드렸던 논문을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고 어떤 부분은 복사를 하셔서 가위로 오려 붙인 한 뭉큼의 서류를 주셨다. 이거를 정리해서 (다시 타이핑) 다음 주에 보자고,

 

나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일단 손으로 쓰신 필기체의 손글씨를 알아보는데 정말 애를 먹으며 주신 manuscript를 수정하고, 또 다음주에 난도질된 논문을 받아 들고 이를 다시 수정하고 이를 몇 주를 반복하였다. 그 논문이 대략 완성될 무렵 Lally에서는 매년 여름 방학이 지나면 학생들의 완성된 페이퍼를 가지고 박사과정생들이 발표를 하고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듣는 자리가 있다. 나도 이 논문이 완성이 되어 발표를 하겠다고 했고 (지금 생각에서는 무슨 배짱?) 발표를 하자 약간 말을 잇지 못하는 교수님들의 반응들 (아마 정성적 논문 접근 법이기도 하고, 주제가 별로 재미도 없었을 것이고, 일단 영어가 제대로 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남)..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였는데, 동기들은 1년 차가 발표하다니 이건 기록에 남을 거라면서 토닥거려 주었다. (이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지금도 발표는 쉽지가 않다). 여하튼 그 논문은 1년 차가 끝나기 전인 2010년에 출간이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 교수님과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집으로 초대도 해주시고, 틈틈이 맛있는 것들도 사주시곤 했다. 내 다음해도 다른 1년 차 학생들과 꾸준히 논문을 쓰셨고 아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라는 걸 증명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있는 듯하게 느껴졌다. 그의 열정은 참 대단했는데,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컴퓨터가 없는 방) 약 1시 정도까지 연구를 하고 다시 집으로 가셔서 낮잠을 2시간 정도 주무시고, 그 이후 할머니와 함께 2시간 정도 걷는 생활을 반복하신다고 했다. 나이가 89세였지만 운전도 직접 하시고 그 열정이 대단하셨는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그렇게 하셨음), 와이프가 미국으로 오고 나서 가족이 왔다고 알고 있던 중국 친구들을 함께 불러서 직접 이탈리아 음식을 해주시겠노라며 (이탈리아 출신)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는데 아주 아담한 집에 두 분이서 살고 계셨는데, 식사 도중 '어찌 그렇게 건강하시냐?'며 물어보니, 나에게 "그 비밀을 알고 싶니?" 하시기에 끄덕거렸더니 웃으면서 "in born (타고난 거다)"라고 하시는 거다. 알고 보니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100세를 넘는 장수 집안이었던 것이다. 

 

90이 다되신 두분이 직접 차려 주신 저녁상
차려있는 음식을 설명해주시는 Dr.Abetti (한국인과 중국인 학생이 온다고, 아마도 일본에서 받은 외투를 두르셨다)
음식을 직접 덜어주시는 교수님
지하실에 가득 쌓여있는 책들 (저 책장을 직접 만드셨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분이 정말 아기자기하게 사셨다 (미용실을 갈 용기를 못 내 장발이 되어 버린 나..)

그렇게 학기가 한참 시작되고 있을 때 교수님이 "내 친구가 RPI 출신 노벨상 수상자 인데, 내 수업에 특강 하러 오는데 관심 있으면 들으러 와" 하시는 거다. 잉? 노벨상 수상자라니! 기록을 찾아보니 RPI는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1964년에 박사를 받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Dr.Ivar Giaever이다. 당일 교수님 수업을 찾아가니 학생들이 있긴 한데, 내가 기대한 '노벨상 수상자 XXX 강연' 하면서 큰 오디토리옴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업의 일환이었다. 이것이 놀라웠다. 웬 할아버지가 와서 자신이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일생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고, 학생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당연히 30% 알아들었나 모르겠다) 방식이었다. 알고 보니 매년 교수님은 이 분을 수업에 초대해 특강을 하셔서 엄청난 오디토리옴에서 하는 그런 특강은 아니었다.

 

기억나는 것중에 하나가 "나는 노벨상을 너무 이른 나이에 받았다"면서 아쉬움 섞인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곤 '잉?' 하는 것이 나의 첫 반응이었다. 이 분은 너무 이른 나이에 상을 받아서 상금과 여기저기서 연구관제를 받긴 했지만, 연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분의 인생은 연구보다는 초청 강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연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에서는 항상 '최연소' 타이틀을 붙이고 하루라도 일찍 어떤 성취를 이뤘다고 강조를 하는데 진짜는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느꼈다.

 

* 이 분은 44세에 GE에서 근무할때 'Electron Tunneling and Superconductivity' 연구로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

 

수업이 끝나고 흔한 사진한장 찍지 않고 (아마 매년 해서 그랬을 듯, 그리고 너무 오래전 이야기니까) 다들 그렇게 강의실을 나가는 것이다. 나도 그냥 가려다가 언제 또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겠나 싶어서, 그 할아버지 연구실에 찾아가니 두 분이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1973년 노벨물리학생 수상자인 Dr.Ivar Giaever와의 인생샷 (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체육복을 입고, 그 분도 소탈했다)

아직 나는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