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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아주 못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재 소리를 듣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자라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학생이었다. 어렵게 부모님이 장만해 준 백과사전을 제본한 곳이 떨어질 때까지 읽었고, 집에서 유일하게 한 질이 있었던 위인전을 읽고 또 읽었던 걸 보면, 책 읽는 것은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며, 새로운 문화를 만나며 아주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울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무대를 넓혀가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러한 삶을 잘 살기 위해 박사과정과 교수는 수단으로 선택되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의 마지막 관문인 디펜스를 마칠 때 지도교수님과 내가 아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신 많은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석사를 마치고 대전에 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정말 길 가다 마주치는 것이 '박사님'들이어서 그런지 잘 못 느꼈는데, 내가 하고 보니 새삼 모든 분들이 존경스럽게 다가왔다. '이 힘든 과정을 잘 겪으셨구나!' 하며

 

물론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들도 그 과정이 고통스럽긴 매 한가지라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는 물론 생활의 속속들이 모든 부분에서 마치 세상을 새롭게 접하는 유치원생처럼 받아 들어야 하는 그것이 덧대어져 더욱더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떤 분들은 "와 정말 힘들었을 것 같은데 대단하네요"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대단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꾸준히 했을 뿐이다. 그러면 또 "아 그럼 원래 꾸준히 하시는 분이신가봐요?" 라고 물으실텐데 사실 누구보다 실증도 잘내고 생각보다 대충대충 하는 그냥 평범한 우리네 사람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다만 조금더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밥은 먹고 살아야 겠는데, 이걸 하는게 나랑 조금더 맞다고 생각해서 였을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 많은 분들이 그만큼의 고생을 안하고 사회(학교)생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석사과정 때 프로젝트와 수업, 연구로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특별한 연구도 아닌데 엄청 고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통계학을 가르쳐 주시러 왔던 어느  연구원 박사님께서 여담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이 정도 공부할 것 같으면 어디서든 성공하실게예요"라고 그게 지식적인 측면보다도 한국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특유의 '장시간 일하는' 문화를 의미하셨던 것 같다. 

 

일의 성과나 효율성을 떠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잠못자면서 해봤던 경험, 그 자체가 내가 박사과정 하는데 가장 큰 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서 줄곳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이 정도는 다 하잖아'라고 되뇌었던 것 같다. 물론 공부와 생활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져서 힘들고 외로움이 있어 더 크게 느껴졌겠지만 말이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이한 한 사람의 인생 과정이다. 해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나 스스로도 내 과정을 돌아보며 지난 10여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고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가끔 인생의 길을 가다보면 지칠 때가 꼭 있기 마련이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라 라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여행을 가던, 게임을 하던, 책을 읽던, 음악을 듣던, 산책을 하던... 생각보다 인생은 길고 지금의 잠시 쉬어가는 것이 길게 보면 결코 별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주저 앉고 싶을때 지금 하고 싶은 한 가지를 하면서 긴 여행길의 에너지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 같다. 부모의 아들, 아내의 남편, 아이들의 아빠, 학생들의 교수, 연구자, 결코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벌어오는 월급쟁이, 낯선 곳의 초보 이민자, 유명하지 않은 팟캐스트의 진행자,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그냥 가끔 글을 쓰는걸 좋아하는 작가지망생, 봄이 되면 집주변에 예쁜 정원을 꾸미고 싶은 초보 정원사, 언젠가는 배우고 싶은 비행기 조정사, 영어를 공부하는 평생 학생 등등. 이런저런 하고싶은 일을 키워나가다 보니 정말 수식어가 끝도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그 수식어에 무엇을 또 더해 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고민남. 그렇게 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같다.

 

이것으로 한국교수, 미국 교수되기 시리즈는 마치고, 다음에는 한국 교수 vs 미국 교수 시리즈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다. 긴 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며, 혹시 궁금한 사항이나 오류가 있다면 언제든 dr.gang2cents@gmail.com으로 연락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각자의 위치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당신을 응원한다.

 

Maryland에서 강광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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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시간은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게 마련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의 그 불확실성에 마음을 졸였었는데, 그 결과는 나에게는 영광스러운 결과였다. 처음 미국, 적응, 영어, 공부, 가족, 이런 단어들로 가득한 삶에서 이제 선생이 추가되었다. 

 

박사과정 말년차 즈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족분이 계신데, 그분들과 식사하는 과정에서 "교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말을 곱씹으며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20대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손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무척이나 방황이 심했는데, 나의 그 나이 때 친구들을 이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명감 같은 거창한 단어는 아니지만 꽤나 긴장을 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은 한명의 연구자를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는 하나 교육자를 훈련시키는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학교마다 좋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거의 95%가 연구자로의 훈련이지 교육자로의 훈련은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좋은 연구자와 좋은 교육자는 꼭 등치가 되는 건 아니다. 선생으로의 평가는 내 수업을 듣거나 나와 함께 인연을 가진 학생들의 몫이겠지만, 그래도 그들과 교류하는 걸 꽤나 즐겼던 것 같다. 아마도 시골 촌뜨기에서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기까지 그 과정에서 참 많은 고민도 했었고 도움도 받았는데 그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영광스럽게 UNIST의 교수가 되고 부모님이 일단은 참 좋아하셨다. 그럴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마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그 즐거움에 친구들에게 꽤나 많은 밥과 술을 사셔야 했을 것 같다. 내가 대단한 효자는 아니지만, 부모님께 좋은 선물 하나를 드린 것 같아서 나 역시 마음이 나쁘진 않았다. 

 

UNIST는 나에게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 나보다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학생들은 싫어했겠지만, 산으로 둘러 쌓인 크지 않은 캠퍼스, 그리고 이런저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볼 수 있는 자유도가 있었다. 물론 처우도 좋았고. 다만 연구중심대학과 티칭 중심대학의 비교를 한 바 있지만, 연구중심대학, 그리고 신생대학으로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내외부의 부담감이 있는 학교였고, 대부분 공대에 사회과학을 하는 과가 껴있는 형상이라, 평가 등 모든 것이 집중화되어 있는 상황은 있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왜 다시 미국으로 가셨나요? 라고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모든 것을 세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는 박사과정 없는 돈에 앞으로 불확실한 내 신세도 참으로 답답했지만, 그래도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함께 밥을 먹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캠퍼스를 천천히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그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한국으로 지원할 것인지, 미국으로 지원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한국의 상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교수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조그만 톱니바퀴 삶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40대 초반에 들어서고 있었기에 무엇인가 결정을 하려면 지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 이면에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이 많은 경우에 박사를 끝내고 미국 대학에서 경험을 가지고 한국 대학으로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면이 달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반대로 박사를 마치고 한국 대학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 대학으로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고 사실 너무도 힘들다는 사실을 몰랐다. (Ignorance is bliss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사실 미국에 이미 많은 후보자들이 있는데 굳이 저 멀리 아시아의 조그만 한 나라에서 사람을 뽑을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한 거지,

 

처음 박사과정을 할 때는 몰랐지만, 다시 준비를 하면서 알게된 것이 참 많은 옵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본, 프랑스, 중국, 미국 이렇게 지원을 하였다. 각 나라들도 국제화에 발맞추어 다양한 International 학자들을 뽑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각 학교 혹은 나라도 궁금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프랑스와 중국이었는데, 지금도 쉽게 이 나라의 학교들이 교수자원 충원에 열심히 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나라에 지원을 하였는데, 다들 캠퍼스 내에서는 영어를 쓰고 있는 나라였다. 

 

지난 실패이후로 정확한 시기를 알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를 하고, AOM을 통해서 각 학교의 Job posting을 확인하고 지원을 하였다. 많은 학교를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준비와 시기가 맞으면 성공확률이 높다. 거의 대부분 학교에서 Skype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재미있게도 각 나라에서 캠퍼스 비짓을 요청받았다. 미리 공부는 했지만, 역시 직접 가서 보면 그 장단점이 명확히 보인다.

 

1. 일본 : 한국에서는 EBS에서 '기적의 학교'로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Akita International University 였다. Akita는 일본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삼나무가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EBS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삼나무로 지어진 도서관을 보여주었는데 이 도서관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일본어라고는 이찌, 니,  정도만 아는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지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을 보여주었고, 노교수와 젊은 교수 간의 명확한 상하가 특징적이었다. (한국이랑 비슷하다). 내 기억으로 한분이 태국 출신이었고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학교 투어를 할 때 스텝에게 도서관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했고 거기서 한 30분만 앉아 있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보여주며 도서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학교는 교육중심의 학교라 연구발표를 짧게 하고 모의수업을 실제 학생과 함께 진행하는 것을 뒤에서 참관하는 스타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이 부분이 특징적이었음), 끝나고 학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끝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캠퍼스 하우징의 1인실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삼나무로 건물이 지어져 향이 너무나 좋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좋았겠지만, 조금 우중충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키타의 유명한 삼나무
내 생애 손꼽을 만큼 예뻤던 도서관, 들어가면 삼나무 향이 온몸을 감싼다.
30여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2. 중국 : University of Nottingham Ningbo. 원래 영국학교였는데 지방정부에서 유치를 해서 적극적으로 학교를 확장하고 있었다. 청주에서 직항 편이 있어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으로 Ningbo에 닿을 수 있었는데, 학교가 신과 구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학교에서 잡아준 호텔 프런트 직원이 영어가 잘 안되어, 캠퍼스를 제외하고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중국어를 전혀 못함. 인터뷰가 끝나고 학교에서 호텔로 걸어오면서 주변 환경을 살펴봤는데, 길거리에 있는 간판을 Starbucks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연구중심의 학교라 연구 중심으로 발표를 했고, 교육경험은 나중에 별도로 질의응답을 하였다. 연구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셨고, 그 이후 학과장님과 별도로 또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UNIST에서 창업교육센터를 맡았었기에 그 학교에서 지금 짓고 있는 창업센터의 청사진을 보여주며 이곳이 완공되면 운영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솔깃한 제안이었다. 저녁에는 그날 그 자리에 면접을 온 사람을 한꺼번에 불러 같이 식사를 했는데 다 한국인이었고, 아무래도 경쟁(?)하는 위치가 뭔가 어색함도 있었다.

 

날씨가 우중충 하긴 했지만, 중국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캠퍼스

3. 프랑스 : NEOMA Business School. 프랑스는 최근 열심히 교원을 충원하여 학교 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데, 굉장히 많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충원하고 있다. 이때가 테러사건 직후이긴 했는데 여전히 엄청난 관광객이 비행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학교는 캠퍼스가 여러곳이 있었는데, 파리에 대부분의 행정 업무가 집중되어 있고, 각 캠퍼스는 교육을 담당하는 듯했다. 그래서 면접도 파리에서 하루하고 다음날 내가 담당할 캠퍼스로 이동하여 연구발표와 교수님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예전 배낭여행 때 파리는 인상이 참 좋았었는데 그곳을 거의 15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라 느낌이 새로웠다. Skype 인터뷰를 끝내고 Campus visit invitation을 받았을 때 이곳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어 친절한 한국인 교수님과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묻기도 하였다. 날씨가 좋아서 그랬던지 활발한 캠퍼스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유럽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유럽 전문가가 되는 것도 꽤나 매력적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15년만에 돌아온 프랑스 파리
파리 캠퍼스에서 HR office와의 미팅, 연봉/지원 등을 논의 하였다.
랭스(Reims)로 이동
잠못이루고 새벽에 일어나서 바라본 Reims 대성당
정말 아름다웠던 랭스대성당
오후에 인터뷰한 NEOMA Business School

4. 미국 : 그리고 마지막으로 Salisbury University. AOM에서 인터뷰를 보긴 했지만, 인터뷰 볼 때 부터 시차를 잘 못 알아서 인터뷰를 놓칠 뻔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당시 노교수님들이 오셔서 인터뷰를 하셨는데 그 인상이 참 좋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 저렇게 콧수염이 하얘질 때까지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은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새롭게 수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내용을 알 리 없는 나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Skype 인터뷰를 다시 하고 그리고 Campus visit 요청을 받았다. 바로 직전에 중국에서 인터뷰를 보고 한국에서 바로 옷 만 갈아입고 다시 미국행을 했어야 했다. Priceline에서 제일 싼 비행기 표를 끊어서 인천에서 다시 중국 베이징을 거쳐 워싱턴으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대략 700불 정도였던 듯 진짜 싸긴 했네). 

 

중국 단체 관광객이 타고 있어 한숨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저녁 늦게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했는데 잠이 올리가 있나, 새벽 3시에 다시 씻고 렌트카를 몰고 초행길을 달려 새벽 6시에 학교 앞에 도착한다. 다행히 Starbucks가 5시 30분부터 문을 열고 있어 커피 한잔에 인터뷰 준비를 한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30까지 하루 빽빽한 일정이었고, 각 교수님들과의 면담, 연구발표, 점심식사, 저녁식사까지 온종일 인터뷰를 보는 것이다. 30분 단위로 돌아가는 일정은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시차 적응에 잠도 며칠째 제대로 못 잔 상태였는데, 다행히 노교수님들이 그 노력을 가상히 봐주셨던 것 같다. 나중에 다시 물어본 적이 있다. 나를 왜 뽑으셨냐고, 당시 Committee chair 였던 교수님께서 주 과목은 Strategy였지만, 창업교육센터를 운영한 경험, Entrepreneurship 를 가르친 경험, 그리고 국제경영까지 할 수 있는 점이 당시 학교에서 찾던 fit에 정확히 맞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커피한잔을 하고, 해가 뜨자 학교를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Purdue Business School
역시 날씨가 중요하다. 아침햇살에 기분마저 상쾌했다.
새로지어져 내부가 멋졌던 도서관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학교에서 오퍼를 받았고, 다행이도 여러 학교에서 받은 오퍼 중에서 각자의 장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익숙한 미국을 선택하고, 그간 정들었던 UNIST와는 작별을 고하고 미국 시골의 한 주립대학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반,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한국-> 미국-> 한국-> 미국 불과 10년 만에 태평양을 두 번 왕복을 했는 나의 여정은 어디로 향할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

 

UNIST의 정들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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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에 걸쳐서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에서 면접을 보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학에서는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UNIST에서 합격을 한 것이다. 일단 본부 면접에서 통과를 했지만, 이사회 통과가 남아 있어서 지원자 입장에서는 도장 찍히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좋은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가서 지도교수님께 합격소식을 전하자 기뻐해주셨다. 그러면서 이제 박사논문 마무리를 잘하자고 하셨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경영분야의 경우에는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교수로 임용되기도 한다. 미국에서도 박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Instructor 신분으로 뽑았다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Tenure track faculty (Assistant Professor)로 신분을 바꾸어주는데 특히 미국에서 외국인 신분일 경우는 비자 문제가 있어서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진다. (물론 HR 오피스에서 도와주나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아직 박사학위를 받은 건 아니라 강사의 형태로 임용을 했다가 학위를 받고 난 이후에 조교수로 변경을 하게 된다. 

 

일단 합격 소식을 받고 (5월), 8월까지 논문을 마치고 들어오기로 한다. 아이까지 있었던 집에서 홀로 집으로 돌아와서 논문을 정리하려니 오만생각이 가득하였다. 아울러 빨리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그때부터는 밤낮이 바뀌었던 것 같다. 미친 듯이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밥 먹고, 쓰고 고치고 가 반복되는 하루하루, 왠지 연필을 쓰면 잘 써지는 듯해서 연필을 쓰고 깎고 했는데 몇 개를 썼는지 모르겠다. 

 

박사라운지에서 한밤중에 쓰고, 오려붙이고 다시 데이터 돌리고..
학교, 도서관이 지겨울 때면 스벅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으로 짐을 보내야 해서 2009년 처음 박사와서 얼마 후 태평양을 건너서 넘어온 큰 짐들이 다시 한국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 이 짐을 쌀 때, 아! 진짜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는 건가 하는 시원 섭섭함이 들었다. 사실 그다음에 한번 더 이사를 했는데, 그전에 첫째가 태어나기 전에 고생해서 이사를 했던 기숙사가 더 이상 패밀리 기숙사로 쓰이지 않게 되어, 학교에서는 다운타운 쪽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그것으로 다시 한번 이사를 하였다. 이 짐들이 또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다. 한국 -> 미국 Albany (여기에서 두 번 더 이사를 하고) ->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 웃긴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점).

 

또 시원 섭섭함이 들었던 이유는 미국에서의 4년동안 경험이 힘들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와 영어, 생활은 한국과 너무 달라 쉽지 않았지만, 자연환경과 깨끗한 공기는 너무도 좋았고 학교 캠퍼스도 좋았다. 아울러 그러면서 그동안 발이 되어 주었던 차도 중고로 처분한다. 아! 진짜 이제 한국에 가는구나.

 

키를 넘기기 직전이었던듯
저 짐중에 반 정도는 나중에 미국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가.

그렇게 짐을 대략 보내놓고 나니 이제 진짜 덩그러니 비워진 집에서 최소한의 물건들로 생활한다. 마치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과 비슷하다. 다만 그때보다는 조금 더 미국에 익숙해졌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드디어 디펜스 날자가 다가온다. 한국에서 석사를 할 때도 꽤나 큰 일이었는데, 박사라니 긴장이 안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쯤에 완성된 논문과 발표자료를 미리 커미티들에게 공유하고, 수십 번 또 연습을 한 것 같다. 

 

7월 12일, 당일날 아침에 이런저런 서류와 출력물을 준비한다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체육복 입고 건물을 돌아다니니 스텝분이 '어허 재 왜저러지?'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고 오후에 말끔하게 씻고 UNIST 면접 때 입었던 양복도 갈아입고 발표에 나선다. 한 시간이 넘게 발표가 이어졌는데 뒤에는 동기들과 후배들이 나의 발표를 보고 있고, 제일 앞 줄에는 교수님들이 앉아 있었다. 이제는 눈감고도 알 수 있는 슬라이드와 백번은 고쳤을 것 같은 슬라이드와 기억 안 날 만큼 연습했던 발표. 다행히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과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지도교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마치 억겁의 세월 같은 시간이 흐르고 (느낌상) 문이 열리며 지도교수님이 나오시면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Congratulation Dr. Gang" 하신다. 무너짐... 크게 몰아쉬었던 큰 한 숨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휴~~". 그러고 나서 각 교수님들의 코멘트가 쏟아진다. 그리고 빽빽한 두 장이 넘는 종이에 코멘트가 가득하다. "이거 수정하면 되겠다"라고 하신다. 밖으로 나오니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의 축하 인사가 쏟아진다. "축하해~.." 동기들 중에서 처음으로 디펜스를 한 것이다.

 

그렇게 이제 진짜 박사가 되었다. 그날밤 집에 그 소식을 알리고, 아마 얼마만인지 모를 숙면을 취했던 것 같다. 세상이 멈춰진 것처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수정요청은 꽤나 까다로웠는데 마무리까지 지도교수님이 찬찬히 도와주셨고, 다행히 여름 학기 졸업사정 Deadline 마지막 날 그것도 지도교수님이 직접 걸어가서 서류를 제출해 주셨다. 나는 수정본이 완성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해서, 끝까지 그 웃음과 도움을 잊지 않으셨다.

 

디펜스 발표
사진에서는 왠지 자신감이 가득차 보이긴 하지만, 긴장감 백배였다.
교수님들끼리 심사를 하시는 동안 수고했다며 응원해주었던 동기와 후배들 (이제는 다들 교수님 들이시네)

 

그렇게 이제 공식적으로 박사가 되고 한국에서 그렇게 되고 싶었던 교수가 된 것이다. 미국행을 꿈꾼지 15년, 그리고 박사과정을 마음먹은 지 9년 만이었다. 돌아오는 길도 역시 처음 미국 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Newark 공항에서 갈아타고 입국했는데, 미국에서 떠나기 직전 날 저녁 호텔에서 그간의 소감을 담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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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마지막 밤에.

2009년 6월 6일에 할아버지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돌아오고난 다음날 아침, 나는 10년을 준비하던 미국 유학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즐거움(?), 행복함(?)이 느껴질 줄 알았지만, 실은 비장함이 더 컸던 것 같은 느낌이다. 와이프에게 전화해서 합격소식을 알리고, 결정은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니, 이미 갈 것을 결심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과 안정된 생활을 뿌리치고, 새롭고, 힘들게 시작했던 미국생활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언어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생활의 차이, 주택 문화의 차이, 문화의 차이 모든 것이 크게 다가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런 불평 없이 첫날을 했던 그 당시 학생회장 성호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 생활 새내기를 도와준 것은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새로 들어간 집안에는 한국에 모든 방마다 당연히 있는, 등이 없어 화장실 불을 켜고 몇일간 책을 읽어야 했으며, 준비해 갔던 봉지라면을 끓일만한 냄비가 없어서, 비어있는 옆집에 몰래 들어가 전자레인지를 사용(당시 이사 간 집에는 전자레인지를 수리 중이라 사용할 수 없었음)하여 제대로 익다만 라면을 먹어야 했다.

글쎄,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산책하는 그 길과 공기가 좋았고, 지평선까지 보일만하게 탁 트인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첫 수업의 긴장은 뭐라할것 없이 대단했으며, 수업 때마다 시키는 자기소개는 항상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고 적응하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서서히 미국생활이 익숙해 가고, 이제는 어느덧 스타벅스에서 떳떳이 "room for cream"을 외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6개월 뒤었지만,

첫 수업을 들었던 그 교수님은 나의 지도교수님이 되어 있었고, 10여 년의 기다림의 보상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지 그 첫 수업에서 일등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항상 선순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공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낌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첫해 겨울에 한국에서 모질게 질렀던 첫 번째 내 명의 집을 처분하고, 신혼살림을 눈물을 머금고 정리해야 했던 와이프가 미국으로 왔고, 첫날 집에 와서 샤워하다 뜨거운 물이 끊기는 바람에 그동안 쌓였던 아쉬움과 회한이 터져버려 울고 앉았던 와이프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또다시 마음잡은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해를 마치는 봄학기, 나의 논문이 90세가 넘는 노교수의 도움으로 출판이 되었으며, 그 논문은 일 년 차 처음으로 학교에서 실시하는 박사과정 학생 세미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무슨 깡이었는지, 동기들은 "전설"이라며 나를 추켜세웠으나, 교수들의 나름 멍했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2년 차가 되면서, 사랑하는 불똥이(아라)가 들어서,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래도 효녀라 입덧은 여름방학 때, 출산은 마지막 수업과 시험을 마친후에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타이밍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미국 경영학회가 매년 1월 초에 논문 마감일이 있어서, 아라가 태어나자마자 벌건 눈으로 한 손엔 아라 한손엔 논문을 들며, 전전긍긍하던 시기를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몸이 피곤하고, 짜증도 났지만, 아라의 손짓 발짓에 서로 행복해하며, 좌충우돌하는 초보 부모였지.
그래도 하늘이 도왔던지 2년 차 때 홀로 냈던 논문이 채택되어 Texas, San Antonio에서 불볕더위를 직접 실감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라가 태어나고부터,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보고 있는 와이프도 힘들어했고, 일은 쌓여만 가고 절대적 시간이 없는 나도 초조함이 더해져 가면서, 2년 차가 마칠 때 즈음 떨어져 가는 통장잔고에 나는 벼랑 끝에 서있지 않았나 싶다.

아마 그때 즈음부터였을까, 지금 논문을 마치는 시점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교에서 공부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지도, 점심을 먹지도 않게 되었다. 시간 때문에.. 아마 다 합하면 열 손가락을 못 채울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 동기들과의 파티는 참가해본 적도 없다. 이때 내 일과는 10시에 학교 가서 4시에 퇴근하고, 4-9시까지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새벽 2시에 돌아가는 루틴이 반복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언어적인 문제가 아무래도 Native 보다는 절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잔고와, 힘들어하는 주변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찍 나갔던 Job market은 사실 절망의 연속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그럴 만도 하지만, 항상 초조해하는 지켜봐 주며 힘을 주던 와이프가 생각난다. "걱정하지 마, 오빠 잘될 거야". 이 말이 나를 더 초조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와이프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총 60개가 넘는 원서를 보내어, 10 여 곳에서 전화 인터뷰를 받았으며, 4 곳에서 캠퍼스 비짓(현장 인터뷰)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으나, 임용과정은 정말 피를 말리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취업 과정에서 항상 힘든 과정을 보내었지만, 주변 상황상 벼랑 끝에 몰린 나로서 그 체감 효과는 훨씬 컸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좋은 곳에서 오퍼를 받아, 지금 학위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무리하며, 현재 한국으로 돌아가는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정리하고 있다.

누군가 여기(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보더라.
미국 생활 새내기에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이렇게 잘 살아남았고, 보스턴, 샌안토니오(텍사스), 맨해튼(뉴욕), 뉴저지 한인타운, 올랜도 (플로리다), 샌디에이고, LA, San francisco (캘리포니아) 등 많은 곳에서 다양한 것을 가족과 함께 느끼고 배웠다.
언어적 장벽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주변의 자연환경과 남들을 그리 의식하지 않고, 가족을 위하는 문화는 배울만 했으며,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 정말 부러웠다. 물론 의료시스템 등 힘든 점도 있었지만,.

모든 것들을 물어가며 배우고, 몸으로 겪었기 때문일까.
초보 부모에서 중급 부모로 업그레이드 때문일까.
이제는 티브이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들이 많은 부분 들어오기 때문일까.
많지는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맥주 한 병과 바비큐 고기 한 점의 즐거움 때문일까.
가끔 여름밤 잘 모르는 오케스트라였지만, 정말 감동을 주었던 오케스트라 연주를 잔디밭에서 널브러져, 피자와 맥주와 함께 즐겼것 때문일까.

이곳이 참 정이 들었다.
아라의 고향이기도 하고, 나와 지영이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던 곳이기 때문이겠지.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입장에서 처음으로 섭섭한 기분이 많이 드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 지독했던 4년의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일 거라 생각한다.

미국 적응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줬던 많은 주변 후배들, 선배들,
영어 못하는 제자를 만나, 몇 시간을 같이 앉아서 일일이 고쳐주던 지도교수 Dr. Simons
멀리서 애태우며, 지켜봐 주시던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
모두 고맙고, 짧은 글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힘든 경험이었지만,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에 짧게나마 정리해 본다.

그리고, 내가 처음 왔을 때부터 나를 도와줬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는 Tracy.
나 혼자 있을 때도 가족처럼 추수감사절 때 초대해줬으며, 와이프가 처음 왔을 때도, 아라가 태어났을 때도 기뻐해 주던 친구인데, 몇 달 전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잘 마무리한 것을 알면 기뻐했을 텐데,..
이 녀석 하늘에서 잘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3년 7월 17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Newark 공항 한구석 호텔방에서.

" (Facebook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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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미국 대학(https://07701.tistory.com/131)에 대한 과정을 소개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미국 대학에서는 오퍼를 받지 못했기에 성공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대략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2017년에 UNIST에서 Salisbury University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학교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임용된 스토리를 써보도록 하겠다. 사실 4년이 흘러 다시 준비할 때 이때의 실패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긴 했다.

 

* 이번 편도 역시 학교에 따라 임용과정은 상당히 다를 수 있기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나는 일단 한국과 미국을 가리지 않고 지원을 하고 일단 합격을 한 후에 고민을 하자고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가릴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과 미국 학교는 원하는 지원자의 수준 자체가 다르기에 미국 대학을 준비하면서 별도로 한국 대학에 대한 대비를 했는데,

 

일단 대부분의 한국 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이미' 가진 상태여야 하고, 어느 정도의 계량화된 점수가 되어야만 지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당시 나의 상황에서 처럼 ABD (All but dissertation) 상황에, 1년 차 때 출판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계량화할 수 있는 점수가 거의 없어 대부분의 학교에 지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Job posting에 대한 정보는 하이 브레인 (www.hibrain.net)을 통해서 정보를 구할 수 있었고, Job posting에 구체적인 원하는 지원자의 자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면 충분히 판단이 가능하다. 일단 그런 자격도 문제였지만 일단 물리적인 학교의 숫자가 미국에 비해 월등히 작기 때문에 Job posting  자체의 수가 적고 더군다나 경영학 분야에서 특정 분야를 전공하기에 내가 전공한 분야에 교수를 임용하는 Job posting이 드물었다. 

 

그때즘 집에서 부모님이 "여기 울산에 UNIST라고 좋은 학교가 생겼는데.."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학교가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는 유학 나올 때 즈음 듣긴 했는데, 좋은 학교라 어떨지는 몰랐지만, 일단 신생 학교면 교수자원을 집중적으로 충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 전공분야별로 뽑아야 1명이 다지만, UNIST는 모든 분야에 오픈해서 교수를 충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석사 때 선배가 임용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꽤나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 메일을 보내 보기로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떻게 충원을 하는지 물었더니 사람을 열심히 뽑고 있고, 네가 전공하는 분야도 뽑고 있는 것 같다며 약간의 내부적인 이야기를 공유해 주었다. 그러면서 전공분야를 담당하는 모 교수님께 한번 컨택해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그분께 연락을 했더니 마침 2012년 AOM meeting에 참석하신다면서 나에게 혹시 그 학회에 참여하면 식사를 한번 하자고 하셨다. 어차피 발표도 있고 해서 학회에 참여해야 했던 나는 그 길로 그 교수님과 함께 점심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궁금했던 점도 물어볼 수 있었고,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며 연구분야와 티칭 관심 분야를 물어보셨다. 당시에는 막 3년 차를 마치는 찰나라 아직 프로포절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드렸더니 선배 교수로서 어떤 부분을 준비하면 좋을지 (일반론)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혹시 프로포절을 끝나서 ABD가 되면 연락을 달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UNIST의 경우는 다른 일반적 한국학교와는 달리 미국 시스템에 가깝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 논문의 잠재력을 보고 임용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도 젊은 교수들이 대부분이고 미국에서 학위 하신 분들이 많아 미국 대학에서 임용과정에 익숙해서 일 것이다. 아울러 신생학교이기도 하고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여하튼 그 대화가 있은 이후, 나는 적어도 이 곳에 지원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의 희망 섞인 기대를 하면서 박사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하였다. 그 만남 이후 인사는 드렸지만, 그 이후에는 별도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해가 지나 2013년 봄 프로포절을 끝내자마자 미국 대학을 열심히 지원하면서 그 교수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다. 한국 대학은 학기가 3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은 전년도 11~1월이 임용절차가 진행되는 시기인데, UNIST의 경우는 당시만 해도 3학기제에 교원을 적극적으로 충원할 때가 시기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는 했다. 조마조마하며 이제 ABD 상태가 되었고, 논문의 진행상태를 설명한 메일을 드리고 나서 얼마 후에 답장이 왔는데, 대략 요약하자면 "안녕하세요. 메일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UNIST에 있지 않습니다. XXX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보세요. 저도 전화를 해 놓겠습니다." 하는 메일이 왔다. 쿠쿵! 아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기도 했고 나에 대해서 설명도 드린 분이 다른 학교로 옮기셨다고 하니 그날 밤 꽤나 좌절했던 것 같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소개를 해주신 그 교수님께 다시 이메일을 썼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다시금 나의 소개를 처음부터 시작하는 소개글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메일을 드리게 되었다며 현재의 논문 상황을 설명을 포함해서, 그랬더니 생각보다 금방..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원 날자가 조금 지나긴 했는데, 아직 리뷰 전이니 한번 지원해 보시죠."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서둘러 정리해서 지원을 마쳤다. 

 

그렇게 지나고 며칠이 흘렀나. Skype 인터뷰 요청이 왔고, 이때가 사실 미국 학교와 몇 번 전화 인터뷰를 마친 상태라 어느 정도 담금질을 마친 상태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연구에 대한 소개, 티칭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해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Skype 인터뷰 요청이 왔다. '뭐지?' 하는 생각에 다시 이메일을 드려보니 나를 심사하는 분과가 달라져 다른 Committee와 인터뷰를 한번 더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당시에 여러 분야를 동시에 충원하고 있었는데 내가 Management와 Entrepreneurship 이렇게 두 분야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아시고 다른 분과에 추천을 해주신 거였다 - Entrepreneurship 분야가 급하게 충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 두 번째 하는 거라 Skype 인터뷰가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은 안 나는데 하나의 질문에서 꼬이기 시작하더니 나도 모르게 당황을 하기 시작한다. '망했다.'... 두 번째 인터뷰가 망했으니 이거 무효로 하고 첫 번째 것으로 해주면 안 되겠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며 그날 밤잠을 설쳤다. 아무래도 좋은 인상을 못 드린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이 너무 작아지고 '같은 곳이랑 두 번째 인터뷰를 했는데, 이걸 망치냐'며 스스로를 책망하며 이불 킥을 몇 번을 했던 것 같다. 그게 4월 초였는데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책하면서 연구가 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4월 25일 학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UNIST 교수 공채 면접심사 일정 안내' 

 

아직 임용 확정된 것도 아닌데, 마치 합격자 발표를 받은 것 마냥 기뻤다. 달려가 와이프에게 말했다. "한국 가자!". 미국의 경우는 각 학과별로 채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면접 날자를 조정하는 등의 여유가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학부 면접에서부터 본부 면접 (총장 혹은 부총장)까지 진행하기에 면접 날자를 조정하고 이런 게 힘들다. 4월 23일에 메일을 받았는데 면접 날자가 5월 9일이니 빨리 서둘러야 했다. 서둘러 비행기를 예약하고 쌓아두었던 마일리지를 다 털어 가족도 함께 가기로 했다. 간 김에 가족도 만나고 해서 대략 일주일 정도의 일정을 잡았다. 그 메일에서는 대략의 일정을 알려주셨는데 미국 학교와 인터뷰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했던 게 학부에서 연구 세미나를 하고 다음날 대학본부에서 연구와 교육에 대해서 정리해서 다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질의응답을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급하게 한국행을 떠난다. 사실 나는 울산 출신이고 본가가 UNIST에서 불과 차로 15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갔더니 부모님의 눈이 희망의 눈으로 가득 차있다. '혹시나 되지 않을까?' 하는 눈빛이셨다. 그 부담감을 뒤로하고 면접 준비를 하는데 RPI에서 5년 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메일이 박사과정 코디네이터로부터 날아왔다. 마음은 더 있고 싶지만, 더 이상 버틸 돈도 없었고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하여 마음의 결정은 한 상태이긴 하지만, 코디네이터는 이틀을 줄 테니 결정하라고 한다. 그래서 지도교수님께 물어봤더니 여전히 같은 말씀 "더 있으면 좋긴 한데,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안 그래도 면접을 봐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는데 타이밍도 절묘하다. 

 

두 가지의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더 이상 하는 건 금전적으로 힘들지 않을까?"하시는 것이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는 좋은 소식이 올 거 같지도 않았고 UNIST도 이제 면접을 보러 온 상황이라 불확실성으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일 안되면 다른 회사에도 지원을 해보자' 하는 생각에 일단 5년 차를 더 하지 않겠다고 코디네이터 교수님과 지도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고 약간 껄끄러운 마음으로 면접을 준비하였다. 

 

학부 면접날 시간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도 말끔하고 캠퍼스가 참 예뻤다. 산에 둘러 쌓여있긴 했지만, 그런데 익숙한 사람이라 오히려 더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석사 선배를 만났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학부 면접과 본부 면접의 팁을 물어볼 마음에서였다. "자신감 있게 하라고" 하시는 거였다. '네.. 자신감 있게', 학부에서 하는 연구발표와 면접은 별문제 없이 진행이 되었다. 아무래도 서류를 뽑으면서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국까지 비행기를 지원하면서 부른 터라 다들 응원해 주셨다. 거기다가 연구발표도 이미 수십 번도 더 한 발표라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학부 발표 후 개개인의 교수님과의 면접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시며 나는 본부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상을 드릴 수 있을지 묻는 걸 잊지 않았다. "자신감 있게 하세요!" 같은 말씀이셨다. 미국 대학에서 혼이 빠질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한국이라 마음이 편한 게 있다. 다들 잘 대해주시기도 했고, 끝나고 저녁을 함께 먹으러 갔더니 거기에 내일 본부에서 면접 볼 교수님들이 함께 동석하셨다. 같은 포지션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각각 다른 포지션으로 내 기억이 맞다면 4분의 지원자가 저녁을 다른 경영학과 교수님과 함께 했다. 그러면서 "다들 잘하셔서 좋은 소식받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본부 면접날,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는 본부 면접이 아주아주 중요하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어제 만났던 다른 분야에 지원한 교수님들과의 짧은 대기실에서 만남을 뒤로하고 본관동에 큰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아주 긴 회의 테이블에 멀리 창밖으로 산이 보이는 게 분위기가 벌써 주눅 들게 만드는 것 같다. 당시 총장님과 부총장님, 그리고 다른 원로 교수님들이 함께 하고 계셨는데, 내가 발표를 끝내고 나자 질의응답하기 전에 어색한 정적이 조금 흘렀다. 그러던 중 어제 만났던 한 노교수님께서,

 

"고향이 울산이랍니다." 하시면 총장님께 말씀을 드리니, 웃으시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 게 아닌가.

 

분위기가 압박일 수도 있고 그때그때 다르다고 말씀을 들었던 터라 꽤나 긴장을 했었는데, 저 질문 하나로 분위기가 생각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외쳤다. 지금까지 기계연구원에서 했던 일들, 연구하는 분야들 내가 생각하는 울산 지역 출신으로서 생각하는 UNIST의 모습들을 내 나름 '자신감'있게 말씀을 드렸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어느덧 면접은 끝났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은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으니 꽤나 만족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나고 경영학과 교수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니 부모님, 와이프, 온 가족이 왕눈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에 나는 그저 "열심히 했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고, 수고했다라며 이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사실 언제 결정이 날지 몰랐기 때문에 아마 소식은 못 들을 것 같았는데, 그날 저녁 선배에게 전화를 해보니 기다려보라는 말씀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본부 면접의 결과가 끝나면 결과를 정리해서 결재를 맡고 또 이사회의 결재를 맡아야 하는 과정이 기다린다 (특별히 결정이 바뀌진 않겠지만, 도장이 중요하다). 아울러 그날 본부 면접이 총 8명인가 9명인가 진행했는데, 한꺼번에 경영학과 지원자가 많기도 했고, 분위기가 좋지 많은 않은 것 같다는 애매한 답변을 주셨다. 더 채근할 수 없어서 그냥 기다리기로 하고, 서울에 처갓집으로 향했다. 당시 전체 일정이 대략 일주일 정도였고, 면접 준비 및 면접으로 4일을 쓰고 잠시 서울에서 숨을 고르고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일정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예정된 전날 저녁, 저녁을 먹고 다시 2살짜리 애기를 데리고 비행기 탈 생각에 한 편으로는 깜깜하기도 하고, 면접이 잘되었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선배 교수도 내 분야 분과 교수님들께 민폐를 끼칠 수가 없어서 그냥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되고 와이프는 이제 일찍 자려고 씻으러 들어갔는데, 전화가 온다. "띠리리~". 선배다.

 

두근두근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그 선배는 밝은 목소리로 "소식 들었지?.." 하시는 것이다. '아 이제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박사과정 준비를 하고, 한 번의 실패를 하고, 재준비를 하고, 미국을 알지도 못하면서 시작한 유학생활에, 돈이 쫓기어 가며 섣부르게 잡마켓에 나온 수년간의 과정이 필름처럼 지나가더라. 됐다.

 

이후, 원래는 함께 미국으로 와서 정리를 해야 했지만, 굳이 또 비행기를 온 가족이 타고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나 혼자 들어가서 정리하고 논문 마무리하고 디펜스를 마치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겠다. 미국 동부로 비행이 항상 힘들었는데 어느 때보다 가벼운 비행이 아니었나 싶다. 

 

소식을 들은날, 페북에 짧게 소감을 남겼는데, 아직 박사논문도 마무리해야 하고, 나 역시 공식적으로 소식은 들은 것 아니라 애매하게 쓸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나인데도 믿고 따라와 준 사랑스러운 아내와 힘든 와중에 태어난 이쁜 내 딸 아라, 물심양면으로 마음 써주신 양가 부모님들, 힘들 때 파이팅을 외쳐주던 친구들 모두 감사합니다. 정말 깡 하나로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마무리를 앞두고 있네요. 아직은 채우지 못한 1%가 있기에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영광스럽게도 좋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돌아가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해온 만큼 잘 마무리해 나가겠습니다. 많은 이들의 걱정과 관심이 때론 부담이 되고, 지치게 만들지만 지금껏 잘 해왔듯이 앞으로도 잘하나 갈 것을 약속드리며, 조금은 한걸음 뒤에서 그저 잘 쳐다봐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한 모습 보여 그릴게요. 많이들 마음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소식 전하겠습니다."

 

인생 손꼽을 만큼 감동적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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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에서 말씀드리는 내용을 일반화할 수는 없으며, 각 학과와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박사과정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포닥을 거쳐) 교수가 되는 과정을 내 구직자로서의 경험과 구인자로서의 경험을 종합하여 단순화하여 이야기해보면, 1) 원서 지원 -> 2) (학회 인터뷰, 경우에 따라 생략될 수 있음) -> 3) 1차 Skype Interview -> 4) Campus visit -> 5) 결과 의 절차를 따른다. 

 

전편에서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경영학 분야의 경우에는 보통 이르면 5월 초부터 시작하여 8월 초 AOM 학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많은 수의 학교들이 Job posting을 올린다. 1차 Job market 라운드가 열린다고 보면 된다. 보통은 Job market paper라고 하는 본인의 리서치 페이퍼와 현재까지 실적을 정리한 CV, 그리고 추천인(추천서를 미리내는 학교도 있고, 나중에 내는 학교도 있다) 정도가 필요한 준비라고 이해하면 된다. 다른 전공분야와는 달리 경영학 분야는 대부분 포스닥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어 먼저 설명하도록 하겠다.

 

한국 대학 vs 미국 대학

처음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미국에 남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특히 가족이 있다면 지원 전에 일단 생각해야 할 것이 한국으로 들어갈 것인가, 미국에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장단점은 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에서 원하는 지원자의 프로파일 자체가 다르기도 하고, 미국에서 4~5년을 생활을 하다 보면 대략 나는 미국이 좋다. 아니면 한국이 좋다. 대략 선호하는 지역이 나온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이방인의 삶이 녹록지 않기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우선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가족이 있다면 나는 한국 가는 게 좋고, 가족은 미국에 남는 게 좋다거나 반대의 경우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이에 대해 미리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유럽 국가나 중동,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교수를 충원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까지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서 준비과정이 조금은 다를 수 있기에 이 부분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나누길 추천드린다. 

 

나의 경우에는 일단 나는 미국이 마음에 들었으나 와이프는 한국에 들어가길 원했다. 그 행복한(?) 고민은 뒤로 미루고 일단 다 지원해 보기로 한다.

 

연구중심대학 vs 티칭 중심대학

지역과 함께 또 고민해봐야 할 것이 연구중심대학이냐 티칭 중심대학이냐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을 명확하게 가르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의 기준으로는 박사과정의 유무이다. 박사과정이 있다는 것은 그 학생들의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교원이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는 이야기 이므로 연구중심대학이라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대학의 경우는 티칭 중심대학으로 분류한다. 물론 어떤 학교의 경우는 Balanced school이라고 (연구와 교육이 균형 잡힌 학교)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박사과정의 유무와 더불어 한 학기 수업이 2과목 이하인 경우는 연구중심에 가깝고, 3과목일 경우는 Balanced, 4과목 이상일 경우는 교육중심의 학교라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다. 

 

연구중심이 좋으냐 교육중심이 좋으냐는 사실 그렇게 의미 있는 논의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연구도 필요하고 좋은 교육도 필요하기에 둘 다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보상 차원에서 보면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을 가진 대학들은 연구중심대학에 가깝고 연구에 대한 지원이 풍부하고 교원에 대한 연봉도 높은 편이다. 물론 그에 따라서 높은 수준의 연구결과를 내는 것이 평가의 주된 요소가 되고 그에 따라서 정년이 주어지기에 스트레스가 많은 편이다. 혹자는 박사과정 6,7,8,9년 차라고 할 만큼 생활에 큰 변화가 없다. 연봉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 외에는. 그에 반해 교육중심의 대학은 좋은 강의평가와 수업의 질 향상을 강조하고, 학생들과의 교류에 대한 서비스 점수가 크다. 또한 교원의 평가에 있어서도 연구보다는 교육이나 서비스에 대한 평가가 높기에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이나 서비스가 중요하다. 

 

이렇게 학교에 따라서 그 지향점이 다르기에 사실 뭐가 좋고 뭐가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박사과정들의 경우는 대부분 연구중심의 대학에서 연구중심의 지도교수 아래서 지도를 받기에 연구중심대학에 가는 걸 선호하는 편이긴 한다. 

 

포닥(Post-doc), 정년트랙(Tenure track), 비정년트랙(Non tenure track)

사실 학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교수/학생 정도만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교수도 계약 조건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양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겸임교수, 산학협력교수, 명예교수 등등 다양한데 크게 나누어 보면 정년트랙과 비정년트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실 의미상으로는 Retirement (정년)까지 임용을 보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Tenure는 학자가 자신의 권력자나 정부, 혹은 종교에 대립된 의견을 내더라도 자신의 자리에 대한 위협을 받지 않고 의견을 개진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최근에는 오히려 이 제도를 이용하여 하나의 인사권으로 활용하는 듯한 경우를 많이 봐서 개인적으로는 별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제도이긴 하다. 어쨌든 교수의 Job posting을 보면 정년트랙 (Tenure track 혹은 TT)으로 뽑느지 아니면 비정년트랙(Non tenure track, NTT)으로 뽑는지를 명시하고 있는데 정년트랙이라는 것은 Tenure 심사를 받을 수 있는 패스(path)에 있는 자리를 의미하고 비정년트랙이라는 것은 아예 그 기회가 없는 패스를 의미한다. 그래서 비정년트랙의 경우 몇 년 계약인지를 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 있지 않은 분들이 생각하는 교수는 정년트랙에 있는 교수를 의미한다. 정년트랙에 들어가면 조교수(Assistant Professor) ->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 정교수(Full Professor)로 나뉜다. 이 직급과 정년보장의 유무는 별도이긴 하나 일반적으로 연계되어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경우는 부교수 = Tenured (테뉴어 심사에 통과돼 정년이 보장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한국의 경우는 정교수 = Tenured 가 되는 경우가 많다. 포닥은 말 그대로 박사과정 이후에 교수가 되기 전까지 연구를 하는 신분인데, 보통 공대의 경우는 박사학위를 따고 포닥으로 수년을 연구한 다음에 충분한 실적이 쌓이면 교수로 지원하여 임용이 되는 경우가 많고, 경영학 분야의 경우는 수요공급상 박사학위와 동시에 교수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대학에 지원하기

 

1) 지원 준비

경영학 분야로 미국 대학에 지원할 때, 일단 그 지원자의 잠재력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이는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았어도, 출판된 논문이 하나도 없어도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에 지원할 때는 대부분의 학교가 ABD(All but dissertation - 졸업 논문에 대한 프로포절은 끝났지만 아직 작업 중이고 1년 안에 졸업 논문 디펜스를 끝낼 것으로 예상이 되는 상태) 정도가 되는 지원자의 지원을 받아주는데, 타과에서 박사과정을 하시는 분은 '응?' 하실 수도 있지만 수요공급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 Primary(주)연구(티칭) 분야와 Secondary(부) 연구(티칭) 분야이다. 최근 경향상 하나 이상의 전공분야를 갖는 걸 선호하는데 학교에서 올려진 잡 포스팅을 보면 "Assistant Professor in Strategic Management"라고 하고 그 포스팅을 자세히 읽어보면 "Secondary areas, such as entreprenuership or international business preferred"라는 식의 표현이 있는 포스팅이 많이 보인다. 최근의 학문분야가 융합되기도 하고 학교 입장에서는 폭넓은 과목을 소화할 수 있는 지원자가 아무래도 좋기에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따라서 내가 가장 강한 분야는 어떤 분야가 있고, 거기에 추가해서 확장 가능한 분야가 무엇이 있는지를 미리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프로포절을 끝나고 본격적으로 학교에 지원을 하기 시작하는데, AOM 학회에 포스팅된 학교 중에서 내가 가볼만한 학교를 list up 했다. 일단은 연구중심대학을 위주로 했고, 그 이유는 박사과정 자체가 연구가 그 주된 잡이고 지도교수님도 연구중심대학에 가서 계속해서 논문 작업을 하길 바라시는 점도 있다. 또한 티칭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고, 티칭이 중심이 되려면 당연히 영어가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연구중심대학에만 지원하기에는 내 스스로의 실력을 알기에 적어도 학기당 3과목 정도 되는 수업을 하는 Balanced 된 학교도 List up 하였다. 

 

내 전공분야(주/부를 다 고려한)를 바탕으로 List up 된 학교들 중에서 내가 갈만한 곳을 선정하는데 나의 경우는 1차로 그 학교들의 최근에 임용된 Assistant Professor의 출신학교와 실적을 살펴 내가 타깃 할만한 학교를 일단 먼저 골랐고, 그다음에 다른 요소들을 - 날씨, 위치, 한인타운 유무, 직항 편 유무 등 - 고려하였다. 물론 많은 분들이 대도시에 살고 싶고 (아무래도 편리하다) 직항 편이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지만, 우리가 쉽게 알다시피 한국으로의 직항 편이 있는 도시들의 학교들 대부분 엄청 좋은 학교들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3시간 안쪽으로 대도시(한인타운)에 접할 수 있는 곳까지로 그 범위를 넓혀 두었다. 

 

2) 지원

각 학교별로 원하는 deadline이 있기에 가능하면 deadline을 맞추어 지원을 했다. 나중에 학교에 와서 사람을 직접 뽑아보니 Deadline을 맞추는 건 생각보다 훨씬 중요했다. Recruiting committee가 모여서 함께 심사를 하기에 deadline이 넘어가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현재 내가 있는 시골 학교도 1명의 교수를 뽑는데 대략 70~100명 정도가 지원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Deadline을 맞추는 것이 좋다. 아울러 대부분은 비슷한 수준과 위치를 가진 학교에 무조건 지원을 하고 보기 때문에 학교 이름이 헷갈리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검증을 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일이 몰리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 실제로 그런 지원서를 받아본 적이 있음). Cover letter에서부터 지원학교에 대한 관심이 충분히 묻어나게 작성을 해두는 것이 좋다. (내가 지원할 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심사를 해보니 그러하더라...)

 

3) 1차 학회 인터뷰

나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AOM 등의 학회의 Career Center를 통해서 첫 번째 인터뷰를 한다. 학교에 따라서 다르지만, 여기서 1차 스크린을 하는 경우도 있고, 약간 Information session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있다. 학회에서 인터뷰는 가능한 한 많은 지원자들에게 학교에 대해 궁금증을 풀고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간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질문은 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 왜 우리 학교를 지원하는가?

2) 본인의 연구분야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3) 티칭 경험은 어떠한가?

4) 서비스 등의 경험이 있는가?

5) 혹시 질문이 있는가?

 

약간의 트윅이 있긴 하지만 대략은 크게 이 정도의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질문의 태도나 관심사 혹은 미리 학교나 교수에 대해서 얼마나 조사를 하고 알고 있는지가 사실 첫인상을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잘 봤다고 생각하던 그렇지 못하던 감사의 노트를 인터뷰 후에 남겨주는 게 좋다. 

 

4) 2차 Skype 인터뷰

1차 학회 인터뷰의 경우는 정보전달의 목적이 강했다면 2차 Skype 인터뷰가 실질적인 첫 번째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통은 1명을 뽑는 경우에 Skype 인터뷰는 대략 3~5 배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대략 30여분의 시간을 주고 미리 시간 약속을 정하는데 가능하면 자신이 사용할 컴퓨터를 세팅을 마쳐놓는 게 좋다. 아울러 요즘은 Skype을 쓰기도 하고 Zoom이라는 것을 쓰기도 하는데 인터뷰가 진행되기 전에 조금 미리 알아 놓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화상으로 하는 것이라 소리 음질도 중요하고, 본인의 옷차림이나 (상반신이라도) 뒤에 배경도 신경을 쓰는 걸 추천드린다. (* 사실 미국 사람들은 안 그럴 것 같지만, 내가 면접관으로 참여할 때 몇몇 미국인 커미티 멤버가 상당히 깐깐하게 그럴 부분을 체크하는 걸 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누가 함께 인터뷰에 참여할지 알려주기도 하는데 이때는 대략 자신의 관심사와 맞는 교수님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구분야, 내용 들을 알아 놓는 게 좋고, 티칭 중심학교의 경우에는 티칭 카탈로그 정도는 봐 두는 게 좋다. 질문은 학회에서 했던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학교 분위기에 따라서 압박 형태의 인터뷰가 진행되기도 한다. 

 

1) 왜 우리 학교를 지원하는가?

2) 본인의 연구분야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3) 티칭 경험은 어떠한가?

4) 서비스 등의 경험이 있는가?

5) 혹시 질문이 있는가?

 

모든 부분에서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5번째에서 좋은 질문을 하면 아무래도 면접이 끝난 후에 기억에 남는다. 아울러 이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감사의 노트를 남겨주는 것이 좋다.

 

5) Campus visit 

지금까지 과정도 사실 진 빠지는데 최고봉인 Campus visit이 남았다. Skype 인터뷰에서 대략 2~3 배수 정도의 인원을 선정하여 Campus visit을 하는데, Skype 인터뷰가 끝나면 얼마 후 Campus visit을 위한 후보 날자를 주면서 그에 필요한 일정을 조율한다. 이때 Committee chair나 Admin이 도움을 주는데 일정은 그대로 정하면 되고, 나의 경우에는 항상 비행기 티켓을 가장 싼 티켓으로 구매를 했다. 물론 이것이 당락에 크게 좌우하지는 않겠지만, 학교 입장에서는 조금이나마 적은 비용으로 임용을 하길 원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게 아주 큰 요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교에 따라서 1박 2일, 혹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진행하는데 일반적인 경우는 전날 저녁식사부터 하루 종일 인터뷰+ 당일 저녁 정도까지 일정이 있고 다음날 돌아가는 정도로 보면 된다. 캠퍼스 비짓은 대략 캠퍼스 투어, 학교 소개, 리서치 발표, 티칭 시연(학교에 따라 다름), 각 교수들과의 1:1 혹은 1:n 면접 그리고 식사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경험으로는 학교에서는 가능하면 지원자에게 많은 정보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가도록 일정을 짜주는데, 지원자 입장에서는 정말 빡빡하고 진 빠지는 하루가 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할 것들이 많은데 자신의 리서치 발표는 물론이고 만나게 될 각 교수의 면면들 그리고 식사시간에 나눌 이야깃거리를 준비하면 좋다. 아울러 해당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질문 혹은 정보를 모아 놓으면 아무래도 지역이나 학교에 관심이 많다는 인상을 주기에 좋다. 물론 이것도 돌아오자마자, 내가 좋았던 점과 각 교수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짤막하게 요약을 해서 감사의 노트를 남기면 좋다.  

 

6) Negotiation

합격이 최종 결정이 되면 이제 계약을 하게 되는데 이때 AACSB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의 Salary 및 package에 대한 협의를 하면 된다. 사실 이 부분도 미국에서는 꽤나 중요한 부분인데, 아무래도 뭔가 기준이 될만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에는 전 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3년 차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서서히 정보를 구하기 시작하면서 준비를 했다. 사실 지금에서 보면 그것조차 참 섣부른 판단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떨어지는 돈과 체력, 그리고 가족들의 스트레스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년 차가 되고 EAOM이라고 하는 지역 학회와 AOM에서 만났던 다른 학교 교수님 (내가 가고 싶은 학교의 교수님들과 전략적으로 연락을 드렸음)께 내 진행사항을 업데이트를 계속해서 드리는 등의 노력을 지속하였다. 

 

지도교수님께 말씀드려 잡마켓에 나가겠다는 의향을 전달하고 이를 위해 Field exam과 박사논문 프로포절(제안) 심사를 위한 Committee 위원 구성을 마친다. (내부 3명 + 외부 1명).

 

3년 차 2학기가 끝나고 RPI에서는 Field exam이라고 부르는 시험을 치는데 교수님께서 미리 내어준 30~40편의 논문/책을 읽고 미리 준비를 한 다음에 자신만의 논문을 일주일 안에 기준에 맞추어 develop 하는 시험을 쳤다. 나의 경우에는,

 

1. 제품이나 기술 분야를 선정하고,

2. 기존의 이론을 활용하여 가설을 만들고

3. 이를 실험할 각 회사의 매년 측정 가능한 발명이나 기술 발전을 제안하고,

4. 가상의 데이터 셋을 설명하고

5.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할 분석 모델을 제시하고,

6. 예상되는 결과의 제시

 

정도가 짧게 요약한 나의 Field exam이었다. (물론 실제 내용은 훨씬 많다). 시험 시간을 일주일.. 거의 밤을 새우듯이 마무리하여 한 관문을 또 마무리한다. 

 

4년 차 1학기 (가을)가 되자 박사과정 프로포절을 준비하면서 함께 학교 지원을 준비한다. 그러나 하나의 패착은 너무 일찍 준비했다는 것인데 학교에서 ABD 상태가 되어야만 (프로포절을 마친 상태) 진지하게 고민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4년 차 2학기 초 프로포절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지원이 가능했다. 사실 봄이 되면 내년 가을 임용을 학교에서는 준비할 때이라 마지막 임용 라운드라고 볼 수 있다. (거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 사실 그걸 따질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2013년 3월 6일 어렵게 프로포절을 마치고 나도 공식적으로 ABD가 되었다. 그때부터 알아보니 사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풀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5년을 추천한다). 총 60 여 군데에 원서를 보냈고, 10여 군데에서 전화 인터뷰를 받게 되었다. 그중 한 곳은 프로포절을 하고 바로 다음날 Skype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때는 도서관의 1인실을 빌려 놓고 시스템 체크를 마친 후에 각 교수님의 연구분야 및 교과목, 그리고 학교에 대한 정보를 미리 준비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미리 준비하였다. 사실 Face to face 영어도 익숙지가 않은데 Skype 인터뷰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예상 질문과 답변을 미리 스크립트를 써놓고 한 시간 전부터 미리 수십 번 되뇌었다. 한창 긴장 끝에 한 전화 인터뷰는 생각보다는 언어적으로는 나쁘진 않았지만 끝나고 나서 잘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아쉬움...

 

전화인터뷰 준비

그렇게 안되었다고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학교에서 Campus visit 요청이 왔다. 한 달이나 더 지나서... 여하튼 나에게는 Denmark이후로 처음 하는 미국 주립대학에서 하는 인터뷰라 엄청나게 준비를 많이 했다. 날자를 정하고 하루 전날 학교 근처에 도착해서 하루 종일 진 빠지는 인터뷰를 보았다. 교수님들은 대부분 굉장히 친절했으며, 그때 사실 학장이 내가 다니는 학교 출신이어서 조금은 호의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그분이 가장 공격적으로 질문을 하셨다. 내가 인터뷰를 봤던 학교는 한 주의 메인 캠퍼스는 아니었고 대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교였다. 학교 건물도 새로 짓고 해서 깔끔했고 내가 받은 인상은 좋았다.

 

아침 일찍 연구 발표를 진행했는데, 혼자 준비를 하려면 30여분 시간을 주었는데 그때 파일을 옮기려고 컴퓨터를 쓰다가 보니 바로 며칠 전에 누군가가 발표한 자료가 있었는데, 아마도 같은 position에 지원한 지원자였고 바로 Purdue school 출신이었다. 그때 맥이 탁 풀렸다. Purdue school은 경영학 분야도 유명하고 잘하는 학교라서 갑자기 자신감이 팍 떨어졌다. 그래서 그랬던지 최선을 다해서 했지만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안되더라.

 

이윽고 점심때가 되자 이탈리안 음식점을 가서 교수님 네 분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스파게티 소스가 타이에 딱 떨어졌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 그때 담당 교수님께서 "내가 너 깨끗하게 입고 온 거 봤으니 이야기해줄게" 하면서 웃으시는 거다. 아.. 왠지 징조가 불길하다. 그렇게 각 교수님과의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그렇게 미국 주립대와 했던 캠퍼스 비짓은 끝이 나버렸다. 그때 정신적인 고통이 꽤나 컸는데, 그것을 잘 나타내 주는 페이스북 포스팅이 있어 공유한다.

 

"지독 시리 힘들었던 3월, 프로포절 디펜스와 같은 주에 3번의 전화 인터뷰, 그리고 그 다음주 한 번의 전화 인터뷰, 그리고 화상면접, 이제 두 번의 면접이 더 기다리고 있다. 이번 한 달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스트레스와 수십 번의 면접 준비를 해왔다. 그래도 첫 면접이 끝날 때 정말 다리에 힘이 풀리도록 주저앉고 싶었는데 넘어 갈수록, 조금씩 발전함을 느낀다. 그래야 일차 면접일뿐 아직 갈길은 멀다. 이과정을 다 넘긴 선배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기. 고생했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많기에 다시 평정심을 가지고 파이팅!" (3/20/2013년 facebook에서)

 

다음 편에서는 한국 대학 지원 이야기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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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차가 끝날 무렵 메일을 하나 받는다. 본인이 현재 포틀랜드에 있는데 RPI 경영학과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며, 당시 싸이월드에 있던 경영학 박사과정 클럽에서 내 연락처를 받고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건물에 한국인이라곤 교수님 두 분을 제외하곤 내가 유일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친구가 학교로 오는 날 Albany 공항에 마중 나가서 오는데 아주 유쾌한 친구였다. 다. 물론 내가 아이가 생기면서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고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1년 차 동기들과 함께 잘 어울리며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랬던지 나보다 훨씬 사회성도 좋고 영어도 잘해 보였다. 부러워), 간혹 나누는 커피 한잔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곤 했는데, 오래는 아니지만 잠시 만나 힘듦을 나누고 서로의 앞날을 파이팅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같은 과에 앞으로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가끔 안주도 변변치 않은 소주 한잔을 나누며, "형, 이제 몇 년만 참고 고생하면 그래도 월급은 제대로 받지 않겠습니까?" 하며 너스레 웃음을 짓는 그 모습에서 나도 많이 힘을 냈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에서 교수님이 된 그 친구는 지금도 가끔 전화 와서 그때 그 소주 한잔을 기억하냐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사실 첫째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하루 종일 집에서 애만 보고 있는 와이프가 안쓰러워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2년 차 수업 듣는 내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려고 소식하고 물도 안 마시고 (참고로 나는 물을 엄청 마신다). 학생들과 하는 점심 혹은 저녁도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고 숙제를 조금 하고 바로 집으로 와서 가족과 시간을 조금 보내고 저녁 8시에 다시 학교로 나와서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하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서는 참 지독하게 힘들었다 싶기도 한데, 예전에 석사 시절 나만의 책상이 있는 게 너무도 좋았어서 집에도 안 가고 책상에서 앉아 있었던 시간과 회사를 다니며 야근 후에도 영어공부를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공부했던 것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에 4~5시간 정도의 잠과 아이를 보며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시간을 쓰는 것 외에 나는 다른 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고, 나도 이 년 차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Dr.Simons와 논문 작업에 들어간다. 당시 교수님은 DataSources라고 하는 전자제품 목록(directory)을 수십 년 치를 일일이 스캔하고 이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NSF 프로젝트), 나는 그중에 일부를 먼저 작업해서 그것을 가지고 졸업논문을 쓰기로 한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데이터는 그 중 하나의 주요한 요소가 된다. 2년 차를 마치면 수업이 없고 전부가 연구학점이 되어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2년 차가 끝나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수업이 없어서 조금 시간에 버퍼가 생기긴 했지만, 전반적 일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략 나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7시 기상 :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시네?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애기가 있는 분들은 아마 아실 것이다. 동이 트면 애가 일어나서 깨운다.'아빠~'

8시 출근 : 데이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노트북으로 하기에는 파일이 너무 크고 이미지 작업이 있어서 교수님이 빌려 쓰고 있는 창문 없는 컴퓨터 실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

8시~4시 : 컴퓨터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데이터 작업 (스캔한 방대한 양의 파일을, Optical Charater Recognition 프로그램을 돌려 digital 화하고, 이를 일일이 눈으로 체크하며 제대로 되었는지 다시 확인)

4시~8시 :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과 육아를 돕고 저녁을 먹고 잠시 쉰다.

8시~1시 : 데이터 작업을 제외한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시간

1시~7시 : 피곤함에 잠들었지만, 2~3시간마다 깨는 아이를 돌아가면서 일어나서 다시 재움

 

하다 하다 안되어 아이가 목을 가누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자, 옷방에 작은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울면 돌아가면서 한 명씩 그 방으로 가서 애를 다시 재우기로 한다. 적어도 그러면 다른 한 명은 계속 잘 수 있으니까. 어느 날은 인기척이 나서 눈을 떴더니 깜깜한 복도를 가로질러 이 녀석이 기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이야!

 

여하튼 그렇게 3년 차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이 3년차와 4년차는 첫 1~2년차와는 달리 뭔가 스스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진도도 안나가는 듯하여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괴롭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제 곧 졸업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다. 사실 잡마켓에는 졸업시점에서 일년정도 일찍 나가서 시작하는데, 즉 4년차가 끝나는 여름에 졸업을 염두해 두고 있으면 (물론 그것은 지도교수의 마음이겠지만), 3년차 두번째 학기인,  봄부터 잡마켓에 나가서 원서를 쓰고 지원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 이것은 나중에 자세히 써보도록 하겠다.

 

아이도 있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을 떨어져 가고 학교에서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학교에서 지원받는 Stipend는 한 사람 정도 겨우 살 정도이다) 도저히 5년 차를 버티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진도는 안나가고 답답한 마음이 이 가득했다. 그때 즈음 부터인가 와이프가 "통 잠을 제대로 못자네"하면서 자다가 소리도 지르고 괴로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컸다. 이 사정을 지도교수님께 설명을 했고 학교에서도 5년차 펀딩에 대해서 (원래는 4년 계약) 불확실하다며 누구도 확답을 해줄 수 없었기에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참 논문을 쓰고 있는 3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바로 잡마켓에 나가보기로 한다. 지금에서는 정말 무모했던 것 같은데 그 당시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님도 "네 사정은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1년 정도 더 준비하는 게 더 좋은 학교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막지는 않으셨지만 아쉬운 마음을 내비쳐 주셨다. 어쨌든 그렇게 지금까지 정리된 CV와 Cover Letter를 쓰고 함께 논문을 썼던 몇몇 교수님들께 추천인이 되어 주시라 부탁을 드렸다. 이 부분은 다 지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경영대에는 몇 명 앉을 만한 박사과정 라운지가 있다 (물론 5명 정도만 앉을 정도로). 그런데 일부러 여기보다는 교수님들 방이 있는 층에 컴퓨터가 몇 대 놓인 오픈공간이 있었는데 초기 2년 동안 매일 그 자리에 앉아서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했었다. 그 이유는 '나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봐주세요'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이 먹혔던지 교수님들은 흔쾌히 나의 추천인이 되어주시겠다 말씀을 해주셨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드린 CV와 Cover Letter를 앉아서 일일이 수정해 주셨고, 나가시면서 나에게 "Good luck"하셨다. 그래서 데이터 작업을 하다가 지칠 때면 AOM의 Career center,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웹사이트를 돌며 내가 갈만한 학교들을 뽑아서 list up 하였다. 사실 뭐 고를 정신이 없었다. 그냥 분야가 맞고 내가 노릴 만한 학교면 일단 list up을 해두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학생 신분이고 Research를 열심히 할 때라 마음적으로는 Research School을 원했지만 Teaching과 Balance가 된 스쿨도 함께 넣었다. (이 부분은 별도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AOM 학회에 참여해서 Career Center를 통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Job Market을 진행하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된 채 시작한 나는 이미 그 기간을 놓치고 시작을 한 것이다. 

 

* 보통의 경영학 박사과정생 들은 AOM의 Career Center를 통해 봄에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Job posting이 올라온 학교에 지원을 하게 된다. 그러면 8월 초에 있는 AOM 학회를 통해 인터뷰를 하고 첫 번째 스크리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이 AOM 학회를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즉, 졸업하기 일 년 반 정도 전부터 미리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4년 차에 취업과 졸업을 한다는 것은 2년 차가 끝나는 봄학기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앞서 이야기했지만 2년 동안 대부분 수업을 듣는 게 전부라 논문이 진행되기 만무하고 실적이 5년 차, 6년 차 학생들에 비해서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는 5년차가 제일 많고 top school의 경우는 6년차 이상 되는 학생들이 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준비가 섣부르게 시작은 했는데 사실 지원하는 시점이 되면 그런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 않고 마치 어딘가는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8월에 AOM 학회의 인터뷰 타이밍을 놓치고, 3년 차 1학기(가을)부터 두 번째 라운드*부터 시작을 한 것이다. 

 

* AOM을 통해 인터뷰를 하지 않는 학교들이 가을에 deadline이 많이 있는 경우가 있고, 그래도 못 뽑을 경우 겨울에 세 번째 라운드가 돌긴 한다. 명시적인 시기는 아니지만 AOM으로부터 시작하는 타이밍상 대략 유사한 기간에 Job posting 많이 뜨거나 Deadline이 몰리는 경향을 보인다. 어차피 뽑는 학교 입장에서도 3월까지는 확정을 해야지 서류 작업 등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스트레스틑 커져만 가고 몸은 지쳐만 갈 무렵, 오랜만에 경영대 건물 (컴퓨터 작업은 별도의 컴퓨터 실에서)에서 지금은 Babson에 계시는 Dr.O'Connor교수님을 만났다. 1년 차일 때 잠시 그 교수님과 일을 하다가 진행이 잘 안되어 흐지부지 된 적이 있는데 정량적 연구를 주로 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Innovation 쪽으로 꽤 이름이 있는 교수님이었고, 나 역시 합격자 발표를 받고 교수님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이 분을 지도교수로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그 분과 잠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차 저차 해서 잡마켓에 나간다고 하니 그 교수님이 갑자기 "I got a job for you"하시는 것이다. 나도 갑자기 반짝반짝하며 물어보니, 당시 교수님이 덴마크의 DTU (Danish Technical University)와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데 Assistant Professor in Innovation Management를 뽑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심이 있으면 이력서를 보내보라고 하신다.

 

알고 보니 Denmark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 Danish 능력을 보기도 하고 사실 쉽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일단 아무것도 몰랐다.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와 티칭 경력을 좀 더 쌓고 경제적인 부분도 좀더 해결한 후에 다시 다른 나라로 노려봐도 될 것 같기도 했고, 일단 지금 같으면 독이든 사과도 단숨에 먹어버릴 기세라 정리된 CV를 보내드렸더니 위의 포지션은 이미 선발이 끝났다고 하시며 다만, 다른 쪽에 나와 맞는 연구분야에 포닥 자리가 있는데 가을에 방문하겠냐며 연락이 왔다. 당연히 YES!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인터뷰 경험도 많이 하면 할수록 느는 것 같다).

 

그렇게 2012년 10월에 방문 일정을 잡고 일정은 대략 30분 정도의 미니 연구 세미나와 해당 포지션에 대한 Q&A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Albany->Newark->Brussel->Denmark / Denmark->Stockholm->Newark->Albany로 돌아오는 복잡한 일정이었다. (항상 제일 싼 티켓을 구한다. 비행기 값을 지원해 준다 하더라도). 10월 10일에 출발을 하는데 Albany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기상 문제로 비행기가 1시간 30분 딜레이가 된다고 한다. Connection 간 시간이 여유가 많지 않았는데, 이거 출발도 못하고 메일을 써서 못 간다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할 무렵 갑작스레 탑승 Announcement가 나온다. Connection 시간이 워낙 짧아 긴가민가 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기장님이 Albany에서 Newark까지 비행기간을 최대한 당겨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진짜 30분 만에 도착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50분). 두 번째 비행기를 뛰다시피 달려서 Final boarding call이 울릴 무렵 겨우 비행기에 탑승을 했는데 거기서 벨기에 까지는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난생처음 덴마크에 도착. 덴마크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깔끔했고 아담했다 (공항에서부터) 그러고 물어물어 호텔에 도착, 당시에 감정이 페북 포스팅에 그대로 담겨있다.

 

"찬바람이 느껴진다. 갑자기 나는 왜 이리 먼 곳까지 오게 된 건가 생각이 든다. 몇 시간 눈을 감았다 뜨며, 지난 밤새 연습하고 또 고치고 하다 한잔 코피에 몸과 주린 배를 채운다. 미국의 거대하고 화려한 부는 아니지만, 초행길에 길을 물어보니 자못 당황하면서, 카운터를 돌아 나와 유창하지는 않지만 성의를 다해 길을 알려주는 빵집 아가씨에서 뭔가 소박하지만 가득 찬 정을 느낀다. 마치 오래전 지나가는 나그네에 개 물 한잔 줄 수 있는요유로 움. 우리가 발전해 나가면서 놓지는 건 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늦가을 문턱의 찬바람에 모르는 길이지만 버스보다는 걸으며 학교에 찾아가 봐야겠다" (Facebook, Oct/12/2012).

 

어떻게 잠이 든 건지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새벽에 눈이 반들반들 떠졌다. 처음 인터뷰니 당연할 것이다. 오는 비행기에서 수십 번이나 연습한 슬라이드를 다시 한번 또 보고 연습한다. 일부러 조금 일찍 호텔을 나서 학교를 향한다. 생각보다 영어가 잘 안 통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나섰더니 아담한 학교가 나타났고 날씨도 꽤나 좋았다. 담당 교수를 만나려고 기다리면서 브로슈어를 보니 KAIST와 함께 연계도 하고 꽤나 유명한 학교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학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면접은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는데 아침시간이라 햄과 빵, 치즈 등이 테이블이 있었고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한쪽 화면에서 발표를 진행하였다.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질문을 하셨고 잘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대답했다.

 

연구발표가 끝나자 학교에 대해서 궁금한 게 없냐고 물어봐서 포지션과 학교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특별히 리서치를 따지는 형태의 압박면접은 아니었고 편안한 상태에서 질문을 주고받았다. 약 40분간의 면접이 끝날 무렵, "이제 계획은 뭐냐?"라고 물어주셨는데 "발표 준비를 하고 학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별다른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캠퍼스를 좀 둘러보겠다"라고 답변하니 "너 운이 좋아서 날씨가 좋으니 시내 구경을 가보라"라고 담당 교수가 말씀을 해주시면서, 중국계 교수와 함께 점심을 하는 기회를 주셨다 아무래도 동양인으로서 낯선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는 이야기 나눠보라는 배려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데, 결론적으로 DTU의 연봉은 그리 높지 않고 물가는 높아서 혼자 벌어서는 살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 그 교수님은 덴마크인과 결혼하여 함께 생활중이었는데 아이는 없고 둘이 같이 벌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더군다나 아이까지 있으니 아무리 복지가 좋다지만 삶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덴마크어도 배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말이다. 

 

그 분과 헤어지고 정말 좋은 날씨에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사실은 한국식당을 찾으러 나섰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주소를 찾아갔는데 한식당이 없어졌다. 밖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어 그만 포기하고 맥도널드를 찾아 먹는다 (사실 덴마크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도시에 대한 느낌은 참 좋고 예뻤는데 일단 삶이 너무나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을 보는 교수님들도 아마 나의 그런 느낌을 눈치채셨으리라 생각이 든다. 결국 그곳과는 좋은 인연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캠퍼스 비짓과 인터뷰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진 빠지는 인터뷰는 이제 시작이었으니...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덴마크의 여명
그날 따라 아침 햇살이 참 좋았는데, 담쟁이 덩쿨이 예뻤던
햇살을 바라보며 잘되어라 했던
면접을 봤던 빌딩
면접을 마치고 시내 구경 (사실 한식당을 찾아서)
백과사전에서만 보던 인어공주 상 (생각보다 작았다)
덴마크 궁
덴마크의 시그너쳐 뉘하운 운하 (정말 예뼜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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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활동

 

박사를 지원하기 전에 연구라는 것을 나름 흉내는 내봤던 적이 있어서, 약간의 데이터를 들고 있었기에 1년 차에 Dr.Abetti 교수와 연구하나를 출판할 수 있었고, 첫 해에 냈다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많은 연구였다. 학기를 더해 가면서 자신만의 연구에 대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아마 이때가 가장 활발히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부족하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학기가 아닐까 한다. 특히 1년 차 말 Qualifying exam을 통과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논문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데, 수업도 이에 발맞추어 각 분야별로 맞는 수업을 교수님들께 들을 수 있다. 

 

3학기 들은 수업들;

- Strategic Management of Technology Innovation

- Empirial Issues in Management Research

- Seminar in Innovation Management and Entrepreneurship

- Data Analysis for Doctoral Student

 

다만, 3학기에 접어든다고 영어가 나아지는 건 결코 아니고,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전공분야가 깊어지고 그에 심도깊은 논문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더욱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논문이 점점 포커스가 되어 좋을 것도 같지만, 부족한 영어는 한층 나를 괴롭게 한다. 여전히 논문 하나를 소화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1년 차 봄학기 (두 번째 학기) 때 들은 IT & Organization Design 박사 세미나 텀페이퍼를 냈던 논문을 교수님께서 함께 발전시켜 HICSS라는 하와이에서 하는 학회에 제출하자고 하셨고 봄학기가 끝나고 얼마 후 제출을 하여 결국 Accept을 받게 되어 2011년 1월에 첫 학회를 참석하게 된다. 박사과정은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약간의 Conference 참여 비용을 지원해 주는데 RPI의 경우는 $500불 정도로 기억한다. 동부에서 하와이까지는 비행기 비용, 호텔 비용, 학회 등록비 하면 그 돈으로 부족했는데 교수님께서 $1,000불을 지원해 주시고 나머지는 내가 부담해서 참석하기로 하였다. 난생처음 가보는 하와이였는데, 첫 째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떠나야 해서 어떻게 보내고 왔는지는 가물할 정도이다. 다만 그간의 스트레스는 약간 날려버릴 수 있긴 했는데, 이 학회의 경우는 좀 특이했던 게 발표하러 양복을 입고 갔더니 나만 양복을 입고 온 것이다 (다들 하와이 특유의 반바지에 꽃 프린트 티를 입고 오셨다). 이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발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에서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당시 시간날때 Lost 드라마를 종종 봤는데, 마치 Lost의 한장면 같았던
한겨울에 하와이에서 학회를
조용한 바다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산책을
하와이에서 돌아오자마자 동네가 얼어붙었다. 영하 30도 (진짜 코가 어는듯한 추위)

그즈음부터 경영학 분야에 박사과정을 하는 학생들이면 아마 비슷한 조언을 받겠지만, 2년 차가 되는 시점부터 해서 교수님들이 AOM(Academy of Management)에 멤버가 되어 리뷰어로 참여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이는 AOM annual meeting에 제출하는 논문의 수가 어머어마하여 이를 심사할 리뷰어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리뷰어로 참여하는 3개 정도까지 최신의 논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리뷰를 하면서 또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년 AOM은 겨울에 논문을 제출하여 8월 초에 학회가 진행되고 전 세계에서 참여하는 가장 큰 학회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부분 경영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참여를 하고 특히 북미에 있는 사람은 웬만하면 참여하는 학회이다.

 

HICSS에 발표했던 논문과 마찬가지로 1학년 2번째 학기인 봄학기 때 들었던 Seminar in Organzation Theory 박사 세미나에서 한국기업의 지배구조와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논문 (Kim, Kim, Lee 2009 Organization Science)을 접하게 되고, 그 논문을 그대로 replicate 하기로 한다 (기존에 출판된 좋은 논문을 그대로 따라가 보는 것은 데이터 처리나 방법론 학습에 아주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한국기업의 데이터를 구해 그 논문과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데 그다음 한 학기의 대부분을 써버렸다. (데이터셋이 똑같지 않아 같은 결과는 아니었음). 이왕 데이터가 모이고 결과를 돌려본 김에 AOM에 논문을 제출해보기로 한다. 

 

첫째가 태어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쓴 논문을 보며 눈물겹게 한줄한줄을 더해가며 마무리했는데, 리뷰어들이 잘 봐줘서 그런지 혼자서 작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Accept을 해줘서 2011년 여름 불같이 뜨거운 한여름에 San Antonio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세션에는 많은 분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세션 체어 분이 지금은 기억을 못 하는 교수님이었는데, 처음 발표이며, 박사과정 2년 차라고 하자, "열심히 했네"하시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분들에게서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AOM은 학회가 너무 커서 사실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기보다는 네트워크의 효과가 크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Recuiting도 이 학회에서 주로 이루어지니 안 찾을 수가 없긴 하다. AOM 이후 나는 AOM(전미 학회) + EAOM(동부지역 AOM)이나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 등 지역이나 분야에 특화된 학회를 함께 참였는데, 이런 특화된 곳으로 가면 사람 수가 적어서 보다 긴밀한 관계와 논문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은 박사과정이 지원할 경우 교통비 일부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AOM이나 WCRS 등 각 학회에서는 Doctoral student workshop 같은 게 있는데 박사과정이 성공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서 논문의 최신 흐름이나 주요 저널들의 에디터가 나와서 어떤 부분을 조심하면 되는지, 그리고 초기 교수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고, 또한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다만, 학회 때 reception이나 networking dinner가 있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자리이긴 하나, 영어가 짧고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도 못하며 낯도 많이 가리는 나는 좌절의 연속인 자리였다. 거기서 유명 교수님을 사이에 두고 박사과정들의 치열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자체도 진 빠지는 일이거니와 정말 똑똑한 친구들이 많은데 여기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동기부여와 좌절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이 자리는 익숙지가 않다). 

특히 서로 대화를 하는데 뻘쭘이 서 있다가, 끼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몰라, 지도교수님(미국분)께 물어봤더니.

 

"아, 그건 미국 사람도 어려운 일이야. 다만 일단 그 사람들 서클 옆에서 서있다가 한 발을 내딛으면 그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 줄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중 누군가가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을 할 것이야.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아주 간단히 말씀해 주셨지만,

 

실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대화를 하고, 못하는 영어로 끼어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니 언제쯤이야 영화에서 보듯 자연스레 와인 한잔을 들고 그 대화의 무리 안에 들어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다만, 거의 말년 차가 다가오자 나도 급했던지, 내가 원하는 학교의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말을 던지는 무리수(?)를 뒀던걸 생각하면 맞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식구가 늘었지만, 함께 학회를 가기로 첫째의 첫 비행기 (앞으로도 비행기는 지겹게 탐)
라구아디어 공항에서 바라본 맨하튼
저녁 7시가 넘어서 도착했지만, 온도는 아직 105도..
너무 더웠던 San Antonio, TX
WCRS가 열렸던 University of Washington, 학교가 참 예뻤다.
UW 의 business School.
Networking Dinner가 열렸던 Seattle의 상징 Space Needle.

지도교수 선정

사실 한국, 미국을 막론하고 박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지도교수이다. 한국에 많은 언론에서 지도교수의 갑질이 뉴스에 종종 나오는 걸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지도교수의 영향력은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막강하다. 생활은 물론이고 졸업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졸업 요건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 한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석사/박사 과정에 대한 졸업 요건이 있다. 영어점수 얼마 이상, 그리고 SSCI 논문 2편 이상 등등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정해진 기준이 있다 (물론 그 기준은 학교에 따라 다르다). 석사를 한국에서 하고 미국으로 온터라 그 부분을 모르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그런 졸업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좋지만은 않은 게 다른 말로 하자면, 지도교수 마음이라는 거다. 지도교수가 생각하기에 아 이 친구의 졸업논문은 졸업할 만하다고 판단된다고 생각이 들어야 하기에 그만큼 주관적이고 그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선에서 엄청나게 동떨어진 기준은 아니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를 한 바가 있지만, 공대의 경우 펀딩 등의 문제로 지도교수를 미리 선정하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문 사회계열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RPI의 경우도 Qualifying exam이 지나면 지도교수를 서서히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1년 차 2학기, 2년 차 1학기 정도에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본인이 원하는 연구분야를 선택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받는다. 본인이 박사과정 이전에 학문분야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아는 경우는 이 접근법이 의미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접근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2년차 첫 학기가 되자 그동안 들었던 수업과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을 바탕으로 지도교수가 되실 몇 분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다. 전략하는 분과 IS(Information System), 그리고 산업생태학을 전공하는 분이었다. 많은 부분을 고민을 했는데, 일단은 경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고, 아무래도 좋은 곳에 논문을 많이 출간하신 분, 그리고 수업을 들으면서 내 핏에 맞다고 생각이 되는 분, 아울러 나의 경우는 가족과 아이가 있는 관계로 그것을 조금 이해해 주실 만한 분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생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하나둘 지도교수를 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빨리 학회 논문을 발전시키면서 다행히 몇 분의 교수님들과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는 동안 어떤 교수님이 나와 맞을지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사실 생뚱맞게 경제학과에 계시는 Kenneth L. Simons 교수님께 찾아가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했다. 이 교수님은 방법론 수업을 하셨었고, 첫 학기 때 내가 1등을 했던 수업을 가르치셨던 분이었다. 아울러 여름방학 때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학은 여름에는 계약이 안되어 있음 = 월급이 없음) 본인이 NSF를 통해서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셨는데 그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여름 인건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나는 이 분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와 대략의 연구분야를 알 수 있었고, Disruptive innovation에 대해 연구해보자는 교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맞아서 선택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분이 경제학과 교수님이시고 (경영학과에도 일부 소속하셨으나 주는 경제학과였음) 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이 분을 선택했다고 하자, 박사 코디네이터였던 교수님이 좀 마땅치 않아하셨던 것 같다. 아무래도 경영학과에도 교수가 많은데 왜 경제학과 교수를 선택했냐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까지 그분을 고민했던 것은 경제학과 교수님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Job을 잡을 때 아무래도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로 가시는 학회가 경제학회 이셨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경영학 주요 탑 저널에도 출판을 하시기도 하여서 경제학 중심은 또 아니시기도 했다. (사실 중간 즈음?)

 

그래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제일 가깝고, 그 교수님이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고, 방법론에 뛰어나셔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나중에 그 교수님을 선택했다고 와이프에게 이야기하니 "아! 그분 되게 엄격하실 것 같은데.." 하면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고, 다들 의외의 선택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지금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친절히 Open door policy로 언제든지 찾아가면 앉아서 몇 시간이든 시간을 보내주셨고 (이메일 연락은 잘 안되지만, 오피스에 주로 계셨음), 논문을 써가면 일일이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수정해 주셨다. 본인이 나중에 Jobs을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시며, 이력서, Cover letter 쓰는 것도 하나하나 봐주시기도 하셨다. 아울러 나중에 졸업 시점이 되자 일 년 더 준비를 해서 제대로 잡마켓에 나가길 원하셨는데 (사실 대부분의 교수님이 그러하다), 나는 경제적 상황도 그렇고 일 년을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그걸 이해해 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고맙기 그지없으신 분이라. 나중에 UNIST에 임용되고 난 후 미국 출장 나올 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뵜었고, 한 번은 과제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으로 초대를 드렸다. 사실 지도교수, 박사과정 학생이라고 해서 한국처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고 4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은 박승호 연구원이 돌아갈 때 저녁 한번, 그리고 내가 졸업 디펜스를 하고 박사가 된 후에 점심 한번 이렇게 두 번 식사를 하였으니 그분도 나도 어지간히 관계가 사무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한국으로 오셔서 서울에서부터 카이스트에서 강연하시고 (석사 때 지도교수님이 초대해 주심) 그리고 울산에 오셔서 UNIST에서 특강도 해주시고 내 학생/다른 교수님과도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 경주 불국사를 구경시켜 드렸는데, 불국사가 참 좋았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연락이 뜸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연락을 한번 드려야겠다 싶다. 

 

그렇게 2년 차가 마무리되고,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UNIST에서 학부생/대학원생 들과 다과를 들면서 자신의 연구자 인생을 공유해주셨다.
사진을 찾으려고 생각해 보니 교수님과 찍은 사진도 한장 제대로 없네. 이건 한국에서 출국하실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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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참 사이가 좋았고 서로 도움이 많았던 동기들은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

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엠블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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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5편을 써오면서 공부에 대해 상당히 강조를 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사과정은 공부가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어떻게 1년 365일 24시간을 공부만 하겠는가? 아울러 그렇게 어렵게 박사과정을 왔으니 '나는 공부만 해야지'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 공부가 주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왕 새로운 문화를 가진 미국에 온 거 주변을 둘러보고 그 미국을 경험하는 것이 긴 박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글을 쓰다보니, 공부에 파묻혀서 사는 것처럼 나왔는데 (사실 나도 자각을 못했음), 글을 쓰려고 사진을 검색하다 보니 첫해부터 엄청 돌아다닌 걸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더 힘들었구나.. 이번 편은 사진이 좀 많을 것 같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미국에 와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자연이었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길이 었다. 아무래도 과정 자체가 긴 관계로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진을 죽 다시 정리하다 보니 정말 머리가 장난이 아닌데, 사실 미국 미용실에 가서 자를 수도 있었는데 왠지 모를 불안함 마음에 (그리고 돈도 아낄 겸)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본의 아니게 70년대 장발족이 되어 버렸다.

 

건강을 잘 돌봐야 합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Upstate NY은 자연환경이 참 좋다. Troy에서 약 40분 정도 북쪽으로 운전해 가면 Saratoga Springs가 있는데 여름 휴양도시라고 보면된다. 여기에는 Saratoga Performing Arts Center가 있는데 이곳이 여름에는 Philadelphia Orchestra가 공연을 하는데, 나는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오케스트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거기서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Lake George라고 있는데 이곳도 참 아름다운 호수이다. 이곳에 종종 가서 자연을 보면서 상쾌한 숨을 내쉬곤 했다. 이 뉴욕 북부는 The Adirondack Mountains (애디론댁 산맥, https://visitadirondacks.com/)은 미국본토 (하와이, 알래스카 제외)에서 가장 큰 주립공원이라고 하는데 자연환경이 참 아름답다. 

 

겨울, Lake George NY
겨울 Lake George NY

그러던 중, 기계연구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성균 씨가 동부로 출장을 왔다기에 급 번개를 하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알바니로 온 그 친구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우리를 찾아온 손님이었다. 새로운 손님이라 우리는 보스턴과 로드아일랜드를 한 바퀴 도는 급 여행을 가기로 한다. Troy (Albany 포함)는 그 자체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동쪽으로 2시간 30분 정도면 보스턴에 갈 수 있고, 남쪽으로 2시간 30분 정도 가면 뉴욕, 서쪽으로 4시간을 가면 나이아가라 폭포, 북쪽으로 3시간 가면 캐나다 몬트리올을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님이 온 김에 동쪽 도시를 짧게 한 바퀴를 돌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보스턴은 참 좋은 기억이 있는 도시이고 여름에 가보긴 했지만, 겨울에 보스턴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다만 엄청 추웠던 억이.

 

아무래도 박사과정에 있고, 그 친구도 공부에 관심이 있어 하바드를 한바퀴 돌기로 한다.

하바드 대학 지도
학교를 보니 진짜 공부해보고 싶긴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바드에 가고싶은 마음이 담긴 존 하바드 동상 (설립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하바드 경영대 건물
이제는 보기 힘든 이런 책방 분위기
보스턴에 왔으니 랍스터를 먹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하는 Union Oyster House 
보스턴의 상징인 프루덴셜 빌딩
프루덴셜 빌딩에 가면 야경이 멋있는 Top of the hub 가 있다
다음날 로드아일랜드에서 만난 갈매기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박사과정 같음

Troy에서 동쪽으로 1시간여를 달려가면 메사추세츠 주를 넘어가게 되는데 그곳에 Williamstown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사실 이 도시를 많은 분들이 알기는 어려울 것이고 알만큼 큰 도시도 아니다. 이 도시에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아주 유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Williams College이다. 나도 잘 몰랐었는데 Williams College는 1793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좋은 private liberal arts college이다 (https://www.usnews.com/best-colleges/rankings/national-liberal-arts-colleges). 년간 학비가 $57,000 이 넘어가는 학교이다. 한국에는 liberal arts college라는게 다소 생소하지만 교수-학생수의 비율이 아주 낮고 (Williams College의 경우 1:7 정도의 비율이다), 몇몇 전공에 집중하면서 교육에 집중하는 형태의 대학이다. (Williams college는 arts and humanities, social sciences, and science and mathematics의 3개의 전공이 있음). 일반적으로 재력이 있는 집의 아이들이 이곳을 통해서 기본기를 쌓은 후에 대학원을 진학하는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교수/학생 비율이 낮고 학교 자체가 교육에 집중하다 보니 보다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은 학교가 있다 보니, 이곳에는 괜찮은 미술관이 하나 있는데 The Clark이라고 하는 미술관이 있다. 간혹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다.

 

Troy에서 Williamstown으로 넘어가는 겨울길은 참 멋있다
Williams College, MA
The Clark 미술관, MA

2010년 봄, 기계연구원의 이준희 박사님이 포닥으로 필라델피아에 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Troy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운전해서 내려가기로 한다. 필라델피아는 사실 나는 잘 몰랐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록키 영화를 찍은 무대이기도 했고, 미국의 3대 미술관 중에 하나라고 하는 필라델피아 뮤지엄이 있다. 아울러 어디가서든 맛볼 수 있는 필리스테이크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 박사님은 우리에게 안방을 내어주시기도 하고 항상 훈훈한 얼굴로 맞이 해주는 형님. 나중에 Albany도 오셨었다. 외국에 있으면 누구든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 갑자기 필라델피아로 짧은 여행 돌아오는 길에 뉴저지에서 잠시 들렀던 프린스턴..

 

박사과정이라서 그런건 아니지만 나는 항상 학교를 처음 방문한다. 유명한 와튼 스쿨
필라델피아 시청
자유의 종
필라델피아의 맛을 보여주시겠노라고 간 Jim's Steaks 줄이 엄청길다.
이렇게 하면 왠지 맛있게 느껴지긴 한다. 수많은 싸인들
한 시간을 기다려 받은 필리치즈스테이크, 대박!
다음날 찾아간 필라델피아 뮤지엄
브랑쿠치 작품
돌아오는길에 들른 프린스턴, 참 학교가 멋있었다.

사실 일년동안 보스턴, 필라델피아,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뉴욕, 버지니아 등 많이도 다녔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미국에 와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멍하니 자연환경을 보며 운전을 하는 것이라. 이렇게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어디로 가던 주변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큰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

 

Troy에서도 틈틈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친구도 가족도 없으니 시간이 될때마다 조촐하게 음식을 차려서 나눠먹기도 하고,

Troy에는 Troy Savings Bank Music Hall이라는 유명한 건물이 있다 (https://www.troymusichall.org/visit/about/). 1871-75년까지 건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건물이 건축과 음향적으로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한다 - 전공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주 유명한 분들이 가끔 와서 연주를 하곤 한다. 

 

Music Hall에서 가끔 연주도 듣고,

다음에 봄이 되고 여름이 다가오자, 녹음이 드리워지고 The Adirondack Moutains을 접하고 있는 Troy는 주변에 갈만한 공원이 많이 있다 그래서 동기 유학생들(가족)과 함께 바비큐의 시즌이 시작되고 주말이면 맥주 한잔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리고 Saratoga Springs에서 Philadelphia Orchestra와 함께 여름을 보낸다.

 

음 바베큐, 언제나 지민군이 불잡이.
눈과 입이 호강스러운 주말
Saratoga Performing Arts Center의 잔디밭에서 (lawn pass)로 만나는 Philadelphia Orchestra, 맥주에 피자면 여름밤 그만이다.
오케스트라의 매력에 빠지게 만든 필리오케스트라
요요마와 사라장이 협연을 가끔하는데 사라장의 사인을 받음
주말을 함께 보내는 유학생들, 바베큐가 익길 기다리며
반딧불과 함께 이렇게 여름밤은 깊어간다.

네.. 이렇게 놀았습니다. 공부만 하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공부만 하겠습니까? 

이때 즈음 저희 가족에는 큰 변화가 생기는데, To be continued...

다음편 예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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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가족이 재 결합을 하니 불안하지만 뭔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첫 학기가 마무리되고 두 번째 학기는 조금 더 심화된 방법론과 본격적으로 전공분야에 관련된 논문을 세미나 형태로 읽기 시작한다. 수업은 여전히 4개 Doctoral Research Method II, Strategic Management Theory Seminar, IT and Organization Design PhD, 그리고  Seminar in Organization Theory PhD. 이렇게 네 과목을 듣게 되었다. 영어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더 이상 영어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2010년 봄학기는 전략, Information system, 조직 이론의 과목들에서 주로 매주 최근 관련된 토픽의 논문 4~5개를 읽고 교수와 함께 토론하는 수업 형식이다. RPI의 경우는 크게 재무와 경영 두 개가 있어 1년 차 2학기부터 바로 절반에 가까운 동기들이 나누어졌다. 그래서 교수 1명과 5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는 방식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법론을 제외하고 3과목을 4~5개 논문을 읽어서 summary를 하고 critique을 하는 것이다. 매주 12개 논문이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한 개의 논문을 보면 그 논문에서 틀이된 이론이 있는데 일단 이 이론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린다. (이래서 공부도 하던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에 논문 하나를 정리하는데도 버겁다. 

 

예전 블로그 글을 보니 2010년 1월 25일에 학기 시작! 이라고 쓰고 이틀 뒤에 포스팅에서 이렇게 써놨다.

"

바야흐로,
끝내주게,
힘들구만,

^_^;;

"

단지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아마 이때 힘들게 느꼈던 것은 논문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 주가 되는 이론들에 대해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니 이를 다른 책을 뒤져보고, 무슨 말인지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리뷰 페이퍼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어진 하나의 논문을 위해서 몇 배나 되는 책과 논문을 뒤져봐야 하는 상황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 가설을 읽어 보고, 나는 어떤 가설을 세울 수 있을지 경험에 비추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고 그걸 정리한 다음, 데이터와 방법론 섹션으로 넘어간다. 일단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힘든데 그래서 방법론 수업을 듣는 것이다. 그래도 수업에서 듣는 거랑 실제 논문에서 쓰는 거랑은 제법 차이가 있어서 거기서 또 많은 시간을 쓰고, 그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고 결과를 도출했는지 읽어 본다. 그리고 결론과 토론 부분을 읽는다. 전체를 읽고 다시 조금 정리를 한다. 이런 사이클을 돌다 보면 하나의 페이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틀이 넘기도 했다 (배경 지식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힘들긴 했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고, 첫 학기에는 전반적인 내용을 커버하는 반면에 두 번째 수업에서는 각 분야별로 포커스 된 논문을 읽다 보니 아! 하는 부분도 많이 있고, 그걸 비평하다 보면 이런저런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친다. 어쩌다 보면 스스로 '아! 대박'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조금 더 찾아보면 누군가가 하고 있긴 하다).

 

팁으로 읽은 논문들을 기록해 놓는 노트를 하나 마련하면 좋다. 그리고 각 논문을 도식화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논문이 인과관계를 구명하기에 도식화가 가능해진다. *경영 분야의 경우), 방법론과 측정방법 그리고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면 도움이 된다. 또한, 이를 측정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한데 데이터를 어디서 구했고 그 데이터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정리해 놓으면 도움이 된다. (물론 나도 생각은 했는데 꾸준히 하기 쉽지가 않다).

 

스스로의 상상이겠지만, 자신만의 지식이 아주 크게 성장하는 것 같고 나 스스로도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기 때문에, 참 행복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을 실제로 테스트하고 작성을 하려고 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아이디어 내는 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각 세미나 수업에서는 학기말 페이퍼를 요구하는데 실제로 자신만의 논문을 써보는 것이다. 데이터는 당장 구하기 힘드니 데이터 부분을 제외하고. 그 와중에 IT 세미나 수업에는 예전 연구소 때 설문조사했던 자료가 하나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교수와 이야기를 하였고 고 Ravichandran 교수님이 HICSS (Hawaii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ystem Sciences) 학회에 내보라고 해서 내었는데 결국 2학기가 조금 지나고 다행히 accept을 받았다. 이렇게 이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신의 텀페이퍼를 발전시켜서 자신의 논문 타픽을 정하기도 하고, 이때 대략 지도 교수님도 대략 선정을 하게 된다. 

 

커피와 함께 쌓여있는 읽어야할 논문들

2 학기가 끝나면 (1년 차가) Microeconomics와 Research Method 두 과목으로 Qualifying Exam을 치게 하는데 이게 엄청 스트레스이다. 물론 열심히 하면 된다지만, 시험 범위가 뭐 전체 이런 형식이라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에 그냥 무작정 처음부터 보고, 또 보고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박사과정의 경우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이렇게 매년 Filtering을 하는 시험 혹은 연차 페이퍼를 쓰게 한다. 그게 지식의 습득을 확인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듣기에는 박사과정이 긴 과정이기 때문에 맞지 않으면 빨리 나가서 다른 길을 모색하라는 의미에 서라는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은 바 있다. 생각해보라 고시에도 장수생들이 있는데 박사과정도 능력이 안되어 막연히 질질 끌 수는 없는 일이니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RPI에 있을 때는 Qualifying Exam으로 1차를 거르고, 2차는 field exam이라고 해서 교수님이 대략 30~40개 정도 되는 논문/책을 주고 이것을 읽고 관련된 자신만의 페이퍼를 발전시키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고통스럽다).

 

학교마다 이 절차를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어서 듣기로는 매년 50% 정도를 탈락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학교 선정을 하실 때 이런 학교의 분위기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 중에 이 Qual이 안되어 한국에 돌아가신 분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어드미션 포스팅을 할 때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만, 그 뒤에는 엄청 큰 산이 있다는 것이다. 입학한다고 다 졸업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내 개략적 생각에 입학에서 졸업까지 성공적으로 되는 경우가 60%가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험을 위해서 여름 방학 내내 아침에 일어나 도서관에 가고 와이프가 싸주는 도시락 까먹으면서 공부하고 저녁에 잠시 들어와 저녁 먹고 휴식을 취하다 다시 학교로 가서 자정이 넘게 까지 저 두 과목을 풀고 또 푸는 과정을 거쳤다. 뭐 다행히 시험은 패스했지만, 동기 중에 한 친구는 패스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다행히(?) 내치지는 않았고 방법론을 처음부터 다시 듣게 하여 결국에는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학교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아는 학교만의 분위기인데, 직장인에 가족을 데리고 목숨 걸고 오는 분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통 Qual에서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학교에 다시 지원해서 박사과정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학교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시험을 일주일 앞둔 포스팅에서 그 심정을 엿볼 수 있어서 가져와 본다.

 

"퀄이 이번 주로 다가왔다
며칠 동안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뭔가 허전한 이 기분은
인생을 살면서 기백 번은 더쳤을 시험에도 더 심해져만 간다
아마 조금은 부담감 때문일 런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머리는 멍 몸은 축 쳐져 있다
간신히 오늘 수업 준비를 끝내고 조금 널브러져 있기로 한다"

 

1년차를 마치고 Qualifying exam 치기 전에 동기들 모여서 함께 식사 (시험 전이라 얼굴들이 밝네)

정말 공부 이야기밖에 없네요.. 진짜 공부 열심히 하셨겠어요! 하시겠지만,

다음 편에는 이제 노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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