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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글을 쭉 읽어온 독자들은 나에 대해 약간의 배경지식이 생겼을 테지만, 그렇지 않을 독자를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학부 때 나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석사 때 IT Business를 전공하였다. 그리고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연구기획, 평가 등의 일을 하였다. 이 배경을 다시금 설명하는 이유는 이 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박사과정을 지원할 대학을 찾고 지원했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인데, 이것이 주어진 상황이나 전공분야에 따라 상이하기에 다시 한번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경영학으로 박사를 하길 원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의 경우 잡을 잡았을 때 학과별로 연봉이 다르고 (경영학과의 경우 다른 학과보다 연봉이 높은 편이다.) 지금까지 쭉 경영을 전공하였으므로 박사과정도 그 연장선 상에서 다른 과를 노려보는 것 보다는 나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사과정의 경우 경영학과가 다른 과에 비해 좀 다른 면은 수요가 공급에 비해서 많거나 유사한 정도라 포닥(Post Doc)을 대부분 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많은 유학 지원자 들이 바로 학생 신분(학부나 석사 신분에서)에서 박사과정을 지원하거나, 직장을 다니다가 지원을 하는데 학생 신분일 경우 지도교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직장인들과는 보다 나은 정보를 찾아볼 가능성이 높기에 (주로) 박사과정을 지원하는 시점에서 본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는 석사 때 IT Business를 하였으나 당시 지도교수님이 산업공학 전공* (이공계)을 하셨던 터라 경영학 분야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전반적인 유학에는 조언을 해주셨으나 지원에 직접적인 지원을 해주시기는 어려웠다. 

 

*미국도 마찬가지인 경우도 있지만, 한국의 경영학과의 교수님들의 경우는 산업공학과 출신들이 많이 계시는데, 생산관리나 SCM과 같은 그 접점에 있는 학문분야가 있어 그렇다. 미국에서 교수로 있어보니 아주 가끔 산업공학과 출신이 경영대학으로 임용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드문 경우이다. 이것이 중요할 수가 있는게 교수는 각 연구분야별로 자신의 전공분야에 특화된 학회 활동을 하는데 그 학회 활동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학문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기에 생산관리나 SCM과 같이 산업공학과 접점이 있는 분야라고 하더라도 그 기반이 되고 접근하는 이론적 기반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최근 논문의 경쟁이 높아지고 학제 간의 융합이 강조되면서 이러한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에 돌이켜 보건데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경우는 학교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대략 어떠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이 다른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먼저 박사과정은 적어도 인생의 4년 이상을 투자하는 외롭고 고통스럽고 긴 과정이기 때문에 그 긴 과정을 버티려면 적어도 그 공부가 내가 흥미 있고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다음은 박사과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원하는 교수가 된다면 아마도 남은 인생 수십 년을 그 분야에 몰두하고 연구하여야 한다는 것 때문이고, 마지막은 그 분야가 그나마 아주 생소한 분야보다 나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한 몫했다고 본다. 석사를 IT Business를 한 것도 프로그래밍을 심하게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대략의 관심 분야를 정리할 때 Information System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석사과정 동안 쓴 맛(?)을 보기도 했고 그것보다 한국기계연구원을 다니면서 연구기획/평가를 하면서 기업의 기술전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어 'Management of Technology', 'Technology Management', '(Technology) Innovation', 'National Innovation System' 정도로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하였다. 그 당시 생각에는 이 분야쪽으로 전공을 한 사람이 많이 없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이 시점에서 관심있는 논문을 리스트업 해보고 그 저자들의 프로파일을 찾아보는 것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에서도 당시 이 분야로 아주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는 학교가 많지 않아서 박사과정을 가지고 경영학과에 기술이 중심으로 되는 학교로 검색해서 대략 15개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사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의 경우는 이렇게 많이 지원하지 않는데, 일단 지원하는 학교당 전형료도 만만치가 않고 (당시 $150 정도로 기억한다 학교당), 아무래도 미국에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교수를 컨택해서 바로 방문이 가능하기에 저렇게 무식하게(?) 지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박사과정을 한국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커뮤니티에서의 일반적인 경우는 꽤 많은 학교를 리스트업 해서 지원을 하는데, 대략 정말 가고 싶은(좋은) 대학, 괜찮은 대학, (자신의 기준으로)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대학 정도로 그룹을 나눠 각 그룹당 5개 정도의 학교를 고르면 15개가 된다. (* 아쉽지만 정확한 리스트가 없다. 10여 년이 지나서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나 역시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문화가 익숙한터라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학교들 (내가 알 정도면 다 좋은 학교)에 좋은 위치의 학교를 고르다 보니 다 아주 좋은 학교들이 리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사실 미국에는 학위를 제공하는 postsecondary 학교가 2019년 기준 4,298개가 있다 (https://www.usnews.com/education/best-colleges/articles/2019-02-15/how-many-universities-are-in-the-us-and-why-that-number-is-changing). 이중에 경영학 박사과정이 있는 학교는 대략 20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최근에 online doctorates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Online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아직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인지 평가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일단 박사과정이 있다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대략의 학교가 정리가 되고 난 후, 각 학교마다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관련된 교수님들을 다시 리스트업하고 그 교수님들의 논문 Abstract를 정리하였다. 이 시점에서 동시에 진행하여야 할 것이 추천서를 써주실 추천인을 선정하고 컨택하는 부분이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보통 학교당 3개 혹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15개의 학교를 지원한다면 15*3=45개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한 분이 일반적이 추천서를 써 주시면 학교 이름을 바꾸어 제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지원할 당시에도 이미 많은 학교들이 온라인으로 추천서를 받고 있고 간혹 Sealed 된 추천서를 별도로 추천인이 직접 보내라는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미리 준비해 놓았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교수님들께 (예전에 공부도 별로 안 하고 연락도 안 드렸었는데) 요청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어려웠다. (평소에 잘합시다.) 이를 바탕으로 SOP(Statement of Purpose)를 작성하고, Cover letter를 작성하고, 기타 영어성적, 학부성적표, 대학원성적표, 졸업증명서 등등의 각 학교마다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고 각 폴더에 담아서 Deadline에 맞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전형료도 내고... 아. 내 돈..

 

지난 편에 이야기를 나눈 바와 같이 나의 경우는 GRE와 TOEFL이 턱걸이 수준이었기에 연구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다행히 연구원이어서 논문을 한 두 개 정도 작업을 하고 있었고 학회 활동이나 논문이 저널에 리뷰 중인 것들이 있어 이러한 것들을 강조하였었다.

 

일반적으로 지원 시점은 11~12월에 대부분 마감을 하고 리뷰를 한 다음 대략 다음 해 4월 중순 즈음까지 합격자/불합격자(모든 경우에 불합격자를 통보하지는 않았음)를 통보하고 합격을 하고 수락을 하면 I-20등의 학생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 작업 및 미국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대략 7월이나 8월 즈음에 미국으로 넘어가 보통 8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하는 가을학기부터 수업을 듣게 된다. (아주 해피한 경우에..)

 

내 기억으로는 15개의 학교를 대략 1월 달까지 지원을 마쳤으며, 그때부터 4월 말 정도까지는 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 전에도 도움을 많이 받지만 Gohackers 같은 사이트에서 매 분 refresh를 하며 다른 분들이 어디서 소식을 받지 않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정보를 확인하게 된다 (다른 사이트도 있고, 해외에도 유사한 admission posting 사이트가 있긴 하지만 나는 Gohackers 사이트를 주로 이용하였음) 이때 학교에 따라서 (대부분 좋은 학교들의 경우는) Skype 인터뷰 요청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진행사항이나 어떤 질문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서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고 준비할 수 있다. 어드미션을 받은 분들이 자신의 스펙과 Admission을 받는 상황을 정리해서 올려주는데 참고가 많이 된다. (그리고 부러워 죽는다.).

 

* 결론적인 이야기 이겠지만 이러한 스펙이 일반적으로는 상관관계를 보이나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학점이나 영어점수가 조금 모자라더라도 자신의 연구활동에 중점을 둔다거나 하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보통 결과는 우편으로 오는데 당시에도 조금 의아해했는데 사실 미국의 경우 10여 년이 지난 아직도 주요한 서류나 일들이 우편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Liability 이슈가 있어서 그런 거 일 수도 있으나 솔직히 미국 생활한 지가 좀 되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2월부터 하나둘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하는데, 보통은 첫 줄을 보면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Dear XXX, Thank you for... "로 시작하면 불합격이고 (지원해줘서 고맙다. 너의 자격은 훌륭하나 올해 몇 명을 안 뽑았는데 아주 경쟁력 있는 친구들이 많이 지원했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쉽고 앞으로 너의 앞길이 잘되길 빈다 - 정도의 아주 예의 바른 형식적인 편지를 받는다), 반면에 "Dear XXX, Congratulation!..."로 시작하면 합격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렇게 주말을 영어학원을 다니고 야근하고 돌아와 새벽까지 단어 외우고,  논문 작업을 하고 15군데에 비싼 전형료를 내고 교수님들을 괴롭혀 가면서 추천서를 받아 지원해서 어떻게 되었어?라고 많은 독자들이 물어보시리라 생각한다. 

 

결론은 0.5승 14패.

 

0.5승이라고 쓴 이유는 2월 경으로 기억하는데 SUNY Buffalo에서 Admission을 받았는데 '네 돈 내고 올 거면 우리가 받아줄게!'였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박사과정은 등록금 면제에 생활비를 지원하는데, 내가 준비한 것이 부족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기쁘지만 기쁘지 않은... 당시에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었고, 집에서는 네가 그렇게 고생해서 준비했고 꿈꾼 건데 가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당시 ICU에 막 부임하셨던 SUNY Buffalo 교수님이 계셔서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안타깝다고 하시며 금전적 부담이 클 거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이때가 2007년.

 

군대를 제대하고 1999년에 편입을 생각하며 미국에서 공부하는걸 꿈꿨고 시간이 흘러 엄청나게 노력을 했는데도 2007년에 받아 든 결과가 이렇다니, 아마 그 날 소주를 꽤 많이 마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결국 그 Admission을 포기한다 (1차 실패).

 

그래서 어떻게 된 건가? 하면서 독자들이 물으실 것 같다. 

 

그 이후 2008년에 다시 준비하게 되는데 GRE는 유효기간이 5년이라 괜찮았으니 TOEFL의 경우 2년이라 다시 영어시험부터 위의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된다. 그래도 한번 경험을 해봤다고 2008년에 준비할 때는 연구 쪽으로 더 정밀하게 준비를 하고 학교도 막연히 이름을 따르기보다는 내 분야에 맞게 micro targeting을 하게 된다. 지원한 학교의 수도 훨씬 줄이고..

 

그러면서 찾았던 학교가 Resselaer Polytechnic Insitute 지금은 경영대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Entrepreneurship을 강조하면서 경영대의 이름이 Lally School of Management and Technology 였고 혁신 쪽으로 연구하시는 교수님이 몇 분 계셨다. 그리고 또 새롭게 지원한 학교가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그리고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의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프로그램 (당시에는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현재는 Science, Technology & Innovation Policy)을 포함한 몇 학교에 다시 지원을 하게 되었다. (2차 시도)

 

영어점수는 비슷했고, 학점도 변화가 없었으나 연구 부분을 좀 더 정밀하게 준비를 해서 지원을 했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1. 제일 처음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의 S&T Policy에서 합격증을 받았으나 여기에서도 펀딩을 찾아보려고 할 텐데 일단은 펀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2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2.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때 4월 즈음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학비 면제와 약 $20,000불의 생활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합격증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가 위치한 뉴저지의 Hoboken은 맨해튼이 내려다 보니는 허드슨 강 바로 옆으로 집값을 포함한 물가가 어마어마 한 곳이었다. 조그만 방을 얻으면 월세가 당시 월 $2,000 불이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비 면제와 생활비를 받는다 하더라도 부부가 살아야 하는 생활비와 혹시나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리고 의료보험은?이라고 계산을 해보니 답이 안 나오는 곳이었다. (보통 Stipend 산정은 학생 홀로 빠듯하게 살 정도로 지원한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Admission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는 답을 받아 들곤 다시 좌절하며 소주를 마셨다. 

 

다시 한번 1999년부터 10년을 준비했는데 결국 못 가는 건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음) 하는 마음에 쓰디쓴 소주를 마시며, 상실감을 달랠 때 당시 신혼집으로 있던 전셋집 주인이 전셋값을 말도 안되게 올려 달라고 했다. 10년의 꿈이 날아가 열 받은 상황이었기에 투덜대며 바로 일주일 만에 집을 사버렸다. (내 인생에 첫 내 집이자 가장 큰 지름 물론, 대부분은 은행 돈). 잔금 정리와 이사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며 그 상실감을 털고 있던 어느 날 현충일을 맞이하여 6월 6일 할아버지를 맞이 하러 가서 (한국전쟁 때 전사하시어 서울 국립묘지에 계심) 아마 미국은 못 가고 한국에서 자주 뵙겠네요 하고 인사하고 온 다음날 회사에서 띵하니 이메일을 받게 되는데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에서 학비 면제에 Stipend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Admission을 받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보통은 4월 말이 되면 대부분은 합격자가 정해지고 정리가 되는데 아마도 그전에 합격을 시켰던 학생이 나중에 다른 학교로 가버렸던지 하는 등의 이슈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6월 7일에 합격자 통보를 받게 된다. 

 

그렇게 1999년부터 꾸었던 꿈이 2009년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야심 차게 질렀던 나의 첫 집은 결국 한 달만 살아보고 미국행을 하게 된 건 또 웃긴 사실 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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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학을 생각하면 영어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무렵까지 영어에 아예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팝을 듣는 걸 좋아했고, 영어 공부하고 단어 외우는걸 꽤나 즐겼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문법 단어만 죽어라 했었다. 실제로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랑 영어를 해본 게 군대 제대를 하고 나서이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아주 활발하거나 Youtube 채널이나 Netflix 같은 영어 콘텐츠를 접하는 게 아주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영어도 졸업이나 취업을 위해 공부한 거지 굳이 유학을 위한 건 아니었다). 요약을 하자면 인도에 갈 때까지 남들이 하는 정도의 정규 영어과정을 밟았다고 보면 된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인도에 갔을때 미드 Friends를 접하게 되는데, 당시 특별히 할 것이 많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일상생활 영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Friends가 상당히 좋은 영어공부 재료가 되었다. 프렌즈는 대략 시즌 1의 5개 정도 에피소드가 넘어가면 그 스토리에 빠져서 계속해서 볼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시즌 1 5개의 에피소드를 처음에는 자막 없이, 다음은 영어자막, 다음은 한국 자막 순으로 3번씩 돌려서 보기 시작했다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다 5개 정도 에피소드를 넘어서서는 그냥 스토리에 빠져 한글자막을 켜놓고 (당시에 듣기가 거의 안되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아침드라마 빠져보듯 보기 시작했다. 기억이 정확히는 안 나지만 당시에 시즌 5인가 6까지 CD로 구워서 들고 온 친구가 있어서 곧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시즌을 다 보게 된다. 근데 더 이상의 콘텐츠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즌1~시즌5까지 다시 한번 정주행을 하게 되고 그게 3번 째인가가 되었을 때 그들의 말이 하나둘씩 적응(들린다기보다는 적응이라는 말이 맞는 듯 목소리나 각 캐릭터의 성향을 이해하면서)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한글자막을 보다가 가끔 재미있는 대화 상황이 나오면 그 부분을 자막 없이 한번 보고, 그러다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 영어 자막을 보고 확인하는 과정을 계속하게 되었다. (일단 공부도 재미있고 봐야 한다). 그렇게 각 에피소드를 대략 5번~6번 정도를 보니 처음에 비해서 상황에 대한 이해나 듣기가 한결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건데, 재미없는 대화 상황을 무작정 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는데, 일단 콘텐츠가 재미있어야 여러 번 보거나 들을 수 있고, 단순히 스크립트를 보거나 글자를 보고 대화 상황을 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아! 그래서 이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이렇게 표현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더 와서 머리에 잘 남는다. 그 이후에도 시즌 10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굳이 화면을 보지 않고 집안일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 계속해서 틀어 놓는다. 통계는 내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각 에피소드 당 적어도 50번은 본 것 같다. (2020년 1월 1일부터 Netflix에서 빠지게 되어 아마 이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내 친구들)

 

* 프렌즈는 시즌 10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1994년 처음 방송되어 각 시즌당 18개에서 25개까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총 236의 에피소드 * 50 을 해보라.. 엄청난 시간을 들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영어공부의 한 고비가 넘어가니 조금은 듣기가 수월해졌던 것 같고 나중에 토플이나 GRE준비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물론 시험으로 제일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건 토익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니 100% 영어수업을 했던 석사과정에서 발표를 할 때 자신감과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석사과정을 하면서 영어로 수업을 하긴 했지만 그때 아주 많이 영어가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한국사람들끼리 (교수님들 그리고 학생들) 영어로 수업하는 게 꽤나 이상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능력으로 아주 고급의 지식을 다루는 건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 특히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것 느낌이다. 석사 과정이 끝날 무렵 취업을 해야 하기에 토익을 준비했는데, 대략 850~890점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900점을 넘어서고 싶었는데 정말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넘지 못해 결국은 한 달 동안 토익 학원을 수강을 했는데 그때 시험 치는 요령을 배워 바로 940점인가로 마무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점수는 한국기계연구원에 입사할 때 쓰였고, 마지막 면접 때 영어공부를 어떻게 했냐고 한 분이 물어보셨는데 Friends이야기를 했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토플(* 그전에 편입 관계로 토플을 몇 번 쳐본 적이 있음)과 GRE를 준비했는데, 많은 분들이 추천한 바와 같이 일단 GRE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경영대학 같은 경우는 MBA나 박사과정 공히 GMAT을 주로 받는데, GMAT을 쳐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GMAT은 영어+논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던 나는 GRE가 맞다고 판단해 GRE를 준비하였다. GRE는 무거운 엉덩이가 중요하다 (2006~7년 이야기라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일단 시험의 성격이나 요령, 공부 방법을 전혀 몰랐기에 학원을 다니기로 하고 이왕 다닐 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서울에 주말반 GRE 학원을 다니기로 한다. 그래서 주중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 집에 와서 영어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수업을 오전/오후에 듣고 저녁에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을 두 달 정도 계속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시험에 대한 감이 생기자 학원을 다니기를 그만하고 (GRE학원도 비용이 만만치 않고 매주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금전적으로 부담이 컸다) 홀로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 커뮤니티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어 지방에 있어도 제법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출연연구원의 기획팀의 경우, 각종 자료 요청이 많아 야근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하루의 일정을 구체화할 수 없어서 일 야근이 있던 없던 단어 공부를 계속했다. 하루의 대략 일정은 6시 30분 기상, 8시 ~ 저녁 9시 (야근이 많아 들쭉날쭉 이었는데 대략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면 평균적인 근무시간이었다) 그 이후 대략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2시 정도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이 과정이 꽤나 고통스러웠는데 GRE 시험 자체의 비용도 만만치 않아 준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분들이 가능하면 짧고 Intensive 하게 공부해서 빨리 끝내라라고 조언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GRE는 대략 암묵적 턱걸이 점수를 받고 그만하기로 하였다.

 

GRE 이후에 토플 시험을 쳤는데 아무래도 큰 산을 넘고 그 뒤의 언덕은 얕잡아 보기 일수다. 하지만 시험의 형태가 다르기에 조금 다른 준비가 필요하고 토플도 미니멈 점수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공부 방법은 GRE와 같은 시간대에 공부를 회사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하였고 GRE보다는 더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진행하였다. 예전에 편입 준비를 하면서 토플 학원에 다닌 적이 있기에 시험의 형식이 낯설지는 않아서 별도의 학원은 다니지 않고 인터넷의 자료와 토플 공부책을 구입하여 준비하였다. 

 

서울에 영어학원에서 풀타임으로 GRE나 토플 공부를 하는 학생(팀)들을 많이 보았는데, 풀타임을 공부해도 쉽지 않은 준비기간이고,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짧은 시간 내에 끝내라고 조언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건 나중에 미국에서 교수가 되든 간에 그때만큼 집중에서 영어공부를 하지 않기에 그 시간이 단순히 입학용 시험 점수를 위해 한다는 마음 가짐보다는 입학 후 닥치게 될 훨씬 더 큰 산을 넘는데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공부하면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교수가 되고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영어점수에 대해서 질문을 종종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Minimum 점수를 넘긴 했는데 조금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Admission을 받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질문이 많았다. 물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학생을 선발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대학원 유학이라는 것은 (특히, 박사과정) 교수 입장에서 자신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연구할 동료를 찾은 과정과 마찬가지로 본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원의 경우에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영어에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 지원을 하기에 영어 점수가 미니멈이 된다면 영어보다는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스펙을 만드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아울러 영어점수가 어느 정도 되면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영어는 모국어가 아닌 이상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또한, 나는 영어공부가 시험/공부용과 회화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플/GRE와 같은 영어공부는 입학 때도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 논문을 읽거나 쓰는 등의 공적인 업무에서 많이 도움이 된다. 즉, 입학시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의 경우 경영학이라 신문을 많이 보려고 하는데 이런데에서도 시험/공부용 영어공부가 도움이 많이 된다. 하지만, 아마도 많은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시험/공부용에 집중을 하고 회화용 영어공부는 조금 등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제 당신이 Admission을 받으면 미국 사회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고 회화는 생활 모든 면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아울러 나중에 미국에서 잡을 잡길 원한다면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이때 회화, 발표 능력은 아주아주 중요하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이 글을 다 읽을 때쯤 아마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어려운 일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는 게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음을 하는 바람이다. 지치고 힘이 들 때 우리가 왜 이 길을 가려고 했는지, 이 길의 끝에 어떠한 결실이 있을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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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을 써놓고 가만히 다시 '내가 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2편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Friends로 미국을 접한 막연한 'American Dream'이 한 몫 했을 테고 별생각 없이 떠났던 배낭여행을 통한 짧았던 외국 경험이 그 트리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다 더 '단순한 이유들도 많이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어 보태기 편을 더해 본다. 

 

대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면 잘 접할 일이 없어 아마 익숙치 않을 테지만, 정부출연연구원은 매년 예산이 100% 정부에서 자동적으로 배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연구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30~40% 정도의 기본연구사업비가 기본 배정이 되고 나머지는 정부 사업비를 따와야 한다. 이 따와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경쟁이라는 말이고 좋은 프로젝트를 만들고, 해당 부처의 공무원을 설득하는 등의 지난한 과정이 뒤따른다. 그 외에 각 출연연구원은 (평가기준이 종종 바뀌어 다르지만, 내가 근무했을 때는) 매년 평가를 받았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업무의 강도가 꽤 센 편이었다. 거기에 기계를 잘 몰랐던 (학부 전공은 경영, 석사전공은 IT Business) 나로서는 고등학교 공업 시간 이후 기계에 대해 처음 듣는 단어들로 가득한 연구원에서 계속해서 학습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업무의 속도는 느릴 수밖에,

 

그런 이유로 야근도 꽤 많은 편이었고, 명절이 될 때면 번 아웃되어 있는 때가 많았었다. 당시 나의 동생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방학이 있는 그의 삶의 얼마나 부럽던지.. 그러면서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었다. 정말 이상적인 생각이겠지만, 몇 가지를 정리해 봤는데,

 

1. 일단 내가 흥미를 가지는 일이었으면 좋겠고 그 일의 결과가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2. 방학처럼 긴 휴식 혹은 재충전을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간혹 세계 곳곳을 둘러보며 새로운 곳을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4. 업무시간에 대한 자유도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5. 그러면서 어느 정도 생활이 될 정도의 연봉이 된다면 더욱 좋겠다.

 

물론 이것을 읽는 독자들은, '다 좋은 것이네'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라며 코웃음을 치시겠지만, 그리고 당연히 누구나 원하는 것이겠지만 정말 이상적인 생각을 정리해본 것이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이러한 것에 가까운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자연스레 교수가 떠올랐다.

 

학부가 경영학과이고, 석사를 IT Business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경영학과 교수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이런저런 글을 통해서 미국에서 경영학 교수는 월급도 다른 과에 비해 높은 편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이나 학회활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교수가 아니던가 그래서 '교수는 본인만 좋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니. 자연스레 오! 한번 꿈꿔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영대학의 경우는 AACSB(Association to Advance Collegiate Schools of Business)라는 미국 중심의 인증제도가 있는데 (*이외에도 유럽 중심의 EQUIS - EFMD Quality Improvement System와 영국 중심의 AMBA - The Association of MBAs가 있다, 대략 전 세계에서 5%의 경영대학이 이 인증을 받고 있다. 이 AACSB소속 대학들의 정보를 정리해서 매년 Report를 하는데 2019년의 경우 경영대의 Management 분과의 조교수(AssistantProfessor) 연봉의 평균값은 $107,900이다.(https://www.aacsb.edu/-/media/aacsb/publications/data-trends-booklet/2019.ashx?la=en&hash=84E51D3E6928ECADF6E8D51D41E64C0D58ED48B8)

 

거기에 다른 공대와는 달리 포스닥(Post Doc) 경험이 거의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잘 마치면 대부분 학교로 바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을 위해 대신 입학의 문이 아주 좁고 프로그램을 타이트하게 관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또한 박사의 경우는 거의 등록금과 이에 더불어 생활비(Stipend)를 지원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는 검색 결과를 얻게 된다. (학부를 무모하게 준비했던 나로서는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회사나 기관에 따라서 개인의 유학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종종 있기는 하나, 내가 근무할 당시 연구원에서는 포닥 연수에 대한 지원은 있었지만 학위를 위해서 유학을 하는 프로그램은 없었고, 지난 편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국내의 경우는 대부분의 학교가 서울에 있었기에 현실적으로 업무와 학위를 동시에 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속한 조직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적극 활용하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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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외국에 대한 생각이나 접촉할 기회가 거의 전무 했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가끔 나오는 유명한 내한 가수들의 인터뷰 정도(?)가 교과서 외에 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문화였고, 나보다 선배들이 가끔 수기에서 언급하던 AFKN이나 영어 방송을 들은 적도 접근하는 방법도 몰랐다. 다만, 입대해서 논산 훈련소를 마칠무렵 카투사를 뽑았는데, 그때 차출되어 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아! 저 줄로 갔으면 영어를 더 잘 했을텐데'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 실제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학생 중에서 카투사 출신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제대를 하고 유럽배낭여행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국을 경험해본 기억이었고, 아직도 싱가포르를 거쳐서 British Airway를 타고 영국 히드로 공항으로가는 비행기안에서 승무원이 '음료 뭐줄까?' 라는 질문에 '코카콜라!'라고 답변했던게 아마 내 인생에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하였던게 아닌가 싶고, 영국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할때 심장이 쿵쾅거리며 버벅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던 그때 조금이나마 싼 가격으로 밥을 먹으려고 찾아다녔던 학교들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지금도 여행갈 때 오래된 학교를 찾는건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그렇게 학교에 대한 묘한 매력과 햇볕을 받으며 잔디밭에서 책을 보고 있던 교수들,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었다.

 

 

영국 배낭여행, 참으로 멋있었던 캠프릿지 캠퍼스
독일의 전통 깊은 훔볼트 대학에서 학생식당이 열리길 기다리며

 

거기에 군대 시절 일과시간을 끝내고 가장 열심히 보았던 드라마가 '카이스트'였는데 물론 드라마지만 추파춥스 캔디를 물고 로봇을 만들며 무언가 몰두하는 모습들에서 꽤나 희열을 느꼈었는데, 그 두가지의 경험이 합쳐서 이후 미국대학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변변치 않은 토플 점수에 유학원을 끼지 않고 (강남에 있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 입이 떡벌어져 그냥 스스로 진행해 보기로 한다), 스스로 틈틈이 하는 아르바이트 중간중간 홈페이지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10여군데 학교에 넣었는데, 사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군대 가기 전의 나의 학점과 커트라인을 겨우 넘기는 토플점수 (500 점 정도 였던 듯)와 형편없었던 자기소개서는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이리라. 또, 그때는 외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막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금액을 쏟아가며 비싼 전형료를 부담하고 토플 점수를 별도로 우편으로 붙여가며 지원했지만, 되었더라도 학비가 지원되지 않았을테고 장학금을 받기 어려웠을테니 미국의 주립대학을 간다하더라도 out of state tuition에다가 생활비까지 하면 감히 살아남지 못했을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도전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전부 리젝을 받은 좌절스러운, 군대 제대이후 첫 프로젝트의 쓰디쓴 패배의 잔을 들수밖에 없었고, 이후 복학하여 그 형편없는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유학에 대한 꿈은 마음 한구석 깊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그라든 줄 알았던 생각이 스물스물 다시 피어오른건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석사과정에서다. 그때 한참 드라마 Friends에 빠져있었던 시기라 1년차에 교수님께 대뜸 "미국보내주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이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럼 논문을 써라. 그럼 학회를 한번 가보자"라고 말씀을 하셨다. 논문이라고는 읽은 적도 거의 없는데 어떻게 쓰는건지 알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냥 닥치는대로 한국 논문들을 읽고 영어논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뭐가 서론이고 뭐가 방법론이고 뭐가 결과인지 당연히 알지 못한채 그냥 소설 쓰듯 뭔가 계속 썼다. 물론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덕분에 한 학기 장학금 못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논문 제출 일주일 전부터 교수님의 끊임없는 야단과 수정이 반복되는 나날이었고, 일주일을 거의 밤을 새다시피 억지로 만들고 만들어 겨울 우리랩 최초의 랩전체 Las Vegas Conference를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이다 (2003년 겨울)

 

 

 촌놈의 Las Vegas 첫 방문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Las Vegas 학회의 첫 발표

 

그 학회에 붙여서 사실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Friends의 배경이 되었던 NYC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회가 끝나고 뉴욕에 며칠만 들렀다 오겠다고 다시한번 용감하게 말씀드렸는데 그러라고 말씀해 주셨다. Friends로 세뇌가 되어서 였던지, LA와는 다른 뭔가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서 뉴욕을 참 좋아하게 되었고, 그때 인석이 형과 혜정이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수이 뉴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뉴욕에서의 첫 목적지는 바로 '감미옥' (지금은 그 위치를 이전하였음). 그 구수한 설렁탕을 잊을수가 없었고 그 첫 맛을 잊지 못해 10년뒤 유학생활 할때 자료조사차 아침 첫 버스를 타고 뉴욕에 내려올때 마다 그 집에서 시작을 했었다. 더 놀랐던 건 형이 감미옥 바로 앞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밥값보다 주차비가 더 많이 나와 '역시 뉴욕 b'하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던가 Time Square를 둘러보느라고 길거리에 대놓았던 형의 차가 견인되어 뉴욕시의 첫날밤을 견인차 보관소에서 찾느라 진땀 빼고 근사한 한끼 식사 비용을 날려 미안함을 가지게 된건 에피소드랄까..


그때 부터 아마 미국 그리고 뉴욕을 나도 모르게 꿈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첫 여행에서 뉴욕에 빠져 셔터를 연신 눌러대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맨하튼 첫 여행은 잘 마무리가 되었고, 그 10년뒤 나는 다시 JFK(뉴욕공항)로 다시 내 생활을 시작하게 될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 오랜기간 드라마로만 봤던 뉴욕을 직접 가본다는 것 외에 뉴욕은 그냥 좋았다. 드라마에서 나온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과도 같은 느낌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구나, 언젠가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mpire State Building에서
대략 10년 후에 이곳에서 박사논문 마무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New York Public Library
역시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Columbia University
선이 아름다운 브룩크린 브릿지
브룩크린 브릿지에서 바라본 Empire State Building
직접보면 반할 수 밖에 없는 뉴욕의 야경

나에게 미국의 경험을 선사해준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석사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석사과정에서 IT Business 라고 지금에 와서 보면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에 가까운 전공을 한 내가 왜 갑자기 기계연구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라. 뭐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같은 대전 연구단지에 속해 있고 입사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마지막 대규모 면접에서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왜 우리(기계연구원)가 IT Business을 전공한 나를 채용해야하는지를 설명해봐라 라는 의심많은 면접관들의 질문에 되도록 열심히 답변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결국 채용이 되었고 정신없이 나의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정부출연연을 보면 크게 연구직과 행정직으로 직군을 구분할 수 있고, 나는 연구기획 분야로 하여 연구직으로 입사를 하였다. 당시 원장님이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기 위해 '미래기술연구부'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어 나를 1번으로 발령을 내어주셨는데, 나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박사님들이 한분두분 조인을 하여 조직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는 Skunk works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자신이 공부한 분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다른 박사님들의 발표를 지켜 보면서 (사회과학 전공한 사람이 공학의 박사분들이 하는 발표를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나도모르는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 비해서 부서가 꽤 젊은 연구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롭고 좋았는데, 그때 일끝나고 시간이 나면 으레 소주 한잔씩 하던 형님들이 지금 성균관대의 김근형 교수님과 원광대의 조영삼 교수님이었다. 두 분과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당시 형님들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아마 어리지 않았을까)로 꽃을 피웠는데, 그때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박사를 하신 김근형 교수님이 나의 과거 이야기 관심사를 듣더니 유학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해주셨다. 물론 KAIST에서 박사를 하셨던 조영삼 교수님도 "그래 그래라"라며 힘들 북돋아주셨다. 

 

다 주변에 상대하는 분들이 Ph.D. 이다 보니 Peer pressure가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 속해 있다 보니 스스로도 '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굳건해 졌다. 물론 처음에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KAIST에서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경영학관련 스쿨이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어 지원이 어려웠고 나중에 기술경영학과가 생기긴 했지만, 그건 이미 내가 미국 박사과정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시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미국생활에 대한 꿈, 유학에 대한 꿈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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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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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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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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