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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영어...

내가 속한 경영대 건물에는 내가 입학할 당시 총 3명의 한국인(Korean American 포함)이 있었는데, 교수님이 두 분 계셨고 그리고 학생은 유일하게 나였다. 학교도 크지 않았을 뿐더러 대학교, 대학원을 통틀어도 50명이 될까말까 였으니 한국인이 많지는 않은 학교였다 (사실 잘 모르시기도 하고) 그래서 언어적인 문제가 정말 힘들었는데, 특히나 외국인과 말한 경험도 별로 없을 뿐더러 미국 생활 자체가 처음이라 더욱더 벽이 크게 느껴졌었다. 그런 환경을 이야기 하니 룸메이트는 "형은 어학연수랑 박사과정이랑 동시에 하는거네요!" 하기도 했었다. 사실 그런 마음이었다. 박사과정을 어학연수랑 동시에 진행하다니..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적인 부분이 이해가 안되니 언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느꼈지만, 처음에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 얼마나 심장이 쿵쾅 거리던지.. 그래서 입구에서 속으로 연습하고 간다. 'Americano please...' 'Americano please...' 그렇게 점원 앞에 다가가면 또 스타벅스의 점원들은 친절하다. 웃으며 말을 건넨다. "How're you doing. Today, I love sunshine out there" 원래 시나라오는 (뭘 줄까? 라고 물으면 어, Americano please)로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날씨를 꺼내니 뭐라고 답변을 해야할지 몰라.."Yes..."하고는 머리속이 폭발해 버린다...!#$@#$^@#$^@!! 오랜시간을 머뭇거리다 "Americano please"라고 했더니 "What size"한다. 또 버벅버벅 (무슨 사이즈? 라지, 빅, 스몰.. 사이즈에 대한 온갖 영어 단어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라지"라고 하자, 점원은 "Grande is okay?"라며 묻는다. '그란데? 이거 무슨 greater 같은 의미인가?' 라는 세상에 온갖 복잡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내 머릿속은 마치 엘론 머스크가 SpaceX의 펠콘 로켓을 쏘았다가 정확한 위치로 착륙시키는 복잡한 물리적 수학적 기계적 공식과 계산들로 가득하다. 그냥 커피 한잔 시키는 것 뿐인데.. 멍한 얼굴로 그 자리를 일단 모면하고 싶어.."(주저하다).. Yes" 한다. 이제 끝났겠거니 생각했더니 이 밝은 미소가 예뻤던 점원은 그냥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You owe me XXX Dollars."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인가? 머릿속으로 다시 펠콘 로켓을 쏜다. '그러니까 You는 너고 Owe는 빌리다 인데, 나는 돈을 빌린적인 없는데? 무슨말인지?...'라고 한참을 로켓을 발사하는데 점원이 내 손에 들고 있는 현금을 가르치면서 웃는다. '아! 돈달라는 이야기구나' (*참고로 물건 등을 살 때 얼마예요. 혹은 얼마를 더 내세요 할때 저런 표현을 쓴다). 그깟 스타벅스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진짜 살떨리는 경험이다. 결국 스타벅스의 물산 사기 프로젝트는 미국에 온 지 두달만에 그래도 적절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4개월이 지나서야 Drive through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지난 편, 김연아의 연기를 보러 갔던 Lake Placid에서 함께 갔던 분과 함께 샌드위치 가게를 갔었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들고오며 "아 내가 바나나 밀크쉐이크를 시켰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줬다"며 "미국에서 산 지가 몇년이 되었는데도 내가 먹고 싶은것도 못시킨다"고 한참을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바꿔달라고 하면 바꾸어 주는데 그냥 먹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유학생활에서 뭉친 한국인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아 나는 원래 혼자 있길 좋아하고 책 읽는걸 좋아하니 미국에서 잘 살아남을 수도 있을꺼야', 혹은 '어차피 공부하러 온 거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열심히 해서 영어도 잘하고 살아남겠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미국에 처음 학회차 와서 맨하튼을 왔을때 당시 뉴저지에서 살고 있었던 혜정이와 인석 형님 부부가 주변을 구경 시켜주었는데, 맨하튼은 맨하튼대로 좋았지만, 뉴저지에 가보니 '와! 이거 영어 못해도 살겠는데?'라고 느낄 만큼 어딜가나 한국어가 통했다. 그걸 보면서, 어학연수든 유학이든 자칫 잘 못하면 시골에서 마치 서울로 학교를 간 국내유학생 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외국에서 일년동안 어학연수를 해도 별로 늘지 않았다는 영어실력을 한탄하는 친구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기본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한국인 유학생 동기들은 (한참이나 어린 나이들이었지만) 참 힘이 많이 되었다. 그들도 힘겹게 대학원과정을 하고 있기에 다들 버거웠지만 한 주에 한번 주말에 맥주한잔 기울이면서 외국인으로써의 삶이 주는 '이주의 바보들' 시리즈 이야기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또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사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이 있으면 된다. 

 

미국에 온 첫 날 공항라이드를 물론 미국의 처음을 열어주었던 윤성호 박사는 RPI에서 공학박사를 마치고 다시 Medical Doctor를 따서 현재 의사 레지던트로 열심히 살고 있고, 그날 이후로 뉴욕에 갈 때마다 연락해서 만나는 인연이 되었고, 미국에서 처음 김치찌게를 끓여줬던 박승호 연구원은 그해말 연수기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며 그간 함께 일했던 Dr. Sanderson과 나중에 내 지도교수가 된 Dr. Simons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처음부터 해서 미국에 지내는 초기에 나를 도와주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이 되어 함께 하고 있다. 9월부터 12월 말까지 룸메이트가 되어 내가 미국 생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동형군은 현재 한국에서 아주 바쁘게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잠시 거실을 빌려 살았고 첫 학기 내가 지칠때 마다 새벽에 함께 새벽공기를 마시며 차를 몰고 나가 던킨도넛에서 커피쿨라타를 사먹었던 지민군은 지금 Las Vegas에서 공연장 엔지니어로 활약하고 있다. 같은 나이로 기계과 박사과정이었던 정준규 박사는 삼성전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우리 주말모임의 홍일점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던 천재소녀 이미지 박사는 현재 하바드에서 바이오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같이 찍은 사진은 별로 없지만,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고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며 의지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참 똑똑한 친구들과 함께했었구나 하며 정말 당신들 덕분에 미국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잘 하길 빈다. 

 

박승호 연구원 한국 돌아가는 날, Dr.Sanderson, Dr.Simons와 함께
윤박사 졸업식
미국을 알게 해 준 지민군

마무리 되는 첫 학기

정말 첫 학기는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끝에 치다르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퍼를 정리하며, 한 학기 동안 살아남았다며 스스로에게 '너 고생했다'고 몇 번을 다독거렸다. 수학이나 통계에 조금더 공부해 놓을껄 부터 시작해서 나는 영어를 왜이리 못할까 하며 읽던 책을 던져버리길 수십번은 했던 것 같다. 큰 결심을 하고 돌아보지 말자며 한국에 있던 집도 돈도 다 정리해 버린 나에게 외국생활에 엄청난 공부 부담은 하루에도 에베레스트 산을 수십번 오를 만큼 감정의 기복이 컸던 것 같다. 그랬기에 함께 하는 동지들(대학원생)이 더욱더 귀하기도 했고, 다행이 한국인은 없었지만 박사과정 동기들이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나이도 제일 많았고 영어도 제일 못했기에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나도 뭔가 역할을 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받은거에 비해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감사한 녀석들.. 영어수업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수업을 열심히 들어 선생님도 잘 했다고 했고, 지난번 시험에서 1등을 했던 과목은 결국 1등으로 마무리 하였다. 물론 경영 기본서를 많이 읽어야 했던 수업은 그래도 A-를 받았고, 통계를 잘 못 했지만 겨우겨우 A를 받았다. 경제학은 아쉽게 B+로 마무리. 박사는 다 A 받는거 아니냐고 혹시 생각했다면 '아니네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첫 학기 고생했다. 나.

 

재 결합하는 가족

학기가 끝날 무렵 한국에서도 와이프가 눈물로 모든 가전을 정리하고 (중고로 정리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상을 이용해서 뭔가를 판매하려면 눈물난다. 정말 똥값이라고 보면 된다. 처음에 얼마에 샀는지는 의미가 없다), 나머지 짐들을 해외이사를 시키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에는 룸메이트와 거실에 지민군이 (잠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사를 나가야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맨하튼으로 내려가며 두 룸메이트들에게 와이프가 오니 집 정리를 잘 부탁한다고 부탁하고 차를 몰고 내려왔다. 내려온 김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맨하튼에서 보내기로 한다. 뮤지컬 라이온 킹도 보고 맨하튼도 구경하기로 한다. 8월 초에 미국으로 돌아왔으니 5개월 만에 만남이다. 

 

커다란 짐을 낑낑대며 공항 출국장에 나타난 와이프를 데리고 뉴저지 (맨하튼 호텔은 너무 비싸) 뉴왁 근처의 호텔에 체크인 했더니 그간 할말이 많았던지 혼자서 집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하루를 쉬고 다음날 맨하튼으로 넘어가 내가 좋아하는 감미옥에서 설렁탄을 먹고 뮤지컬을 즐겁게 보고, 유명한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본다. 정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난다. 다음날 Hmart에서 장을 보고 뉴욕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I-87을 타고 Albany로 향한다. 뉴저지 까지는 집도 많고 한데, 뉴욕주에 접어 들자 마자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웃으며 "여기서 부터 2시간 30분 동안 아마 집이 안보일꺼야"하니 웃음이 사라지는 것 같다. 피곤해선지, 두려움에선지 올라가는 내내 별 말이 없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이 지난 후 집에 도착한다. 다행히 룸메이트들이 집을 잘 정리해놓았다. 저녁 무렵 도착하니 우중충한 날씨게 여기저기 눈이 지저분히 녹아 있고 도시도 우중충 하고 어둡다. 집을 둘러보고 와이프는 씻으러 들어갔고 한참을 안나오기에 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가봤더니 욕실에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물이 안나와".. 하며,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는데 저녁에 맥주한잔을 마시며 그간 한국에서 혼자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고, 미국에 오는 것도 여기서 앞으로의 생활이 두려웠는데 뜨거운 물이 안나오자 왠지모를 서러움이 터진 모양이다 (*미국의 많은 가구들은 워터히터-물을 담아서 데워주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물을 오랫동안 쓰면 다시 데워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시골 도시들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어둡고 건물들도 오래되어 좀 답답한 그런 느낌이 있다. 특히나 밤에는 대부분의 건물에 불빛이 꺼져 한국 도시의 밤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 점도 일조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이제 가족으로써의 유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애정하는 감미옥 설렁탕
도서관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겨울에는 우중충 하다)
룸메이트들이 정리해 놓은 부엌 (이제 집기가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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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독자들이 이거 갑자기 왠 날씨 타령인가 하실 것 같다. 

 

UNIST에 있으면서 제법 많은 학생들이 유학에 대해서 상담을 요청해서 해준 적이 있다. 그중에서 학생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어떤 학교를 지원할 것이며, 어느 학교를 가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인데, 아마도 명확한 계층이 나누어져 있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입시를 준비해 온 학생들이기에 당연히 이를 중요시 여기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유학 관련 FAQ(https://07701.tistory.com/notice/120)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물론 학교의 명성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느 주립대보다는 Harvard, MIT, Stanford를 다닌다면 주변에도 그렇고 스스로도 동기부여가 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저 학교들 다니고 싶다 - 어드미션을 받는다면 일단 먼저 축하드리고 열심히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의 명확한 연구분야와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당연한 이야기 리라 생각한다.) 물론, 자신과 오랜시간 동고동락할 지도교수도 아주 중요하다 (지도교수는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인간이 어떠한 과정으로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모형 중에 ELM(Elaboration Likelihood Model, 정교화가능성모델)이 있는데, 이 모형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심 경로(Central route)나 주변 경로(Peripheral route)를 고려한다고 하는데 중심 경로는 높은 정교화 과정을 통하고 (심사숙고할 만한 정보), 주변 경로는 비교적 낮은 정교화 과정 (단순히 참조할 만한 정보)를 거친다고 이야기하는데, 학교의 선택에서 학교의 명성, 프로그램, 지도교수, 자신의 관심 연구분야와의 매칭은 중심 경로에 해당하는 정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변 경로에 포함할 만한 정보는 무엇이 있는지는 유학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학생들(예비 유학생)에게 공통적으로 이야기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날씨'이다. 한국의 경우 나라가 작기에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뚜렷한 사계절이 존재하고 물론 미세먼지의 공격은 있는 편이지만 비교적 햇살이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북유럽 (영국 포함)을 여행하면 햇살이 나오자마자 온통 잔디밭에서 뒹굴며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든 햇볕을 피하려고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든 햇볕을 찾아다니는구나' 라며 그 차이를 신기해하곤 한다. 실제로 학위가 끝날 무렵 Technical University of Denmark (DTU)에 방문에서 방문면접 (Campus visit)을 본 적이 있는데, 덴마크는 햇볕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어서 모든 건물에서 조금이나마 빛을 받기 위해 채광을 엄청 신경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건물 안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들이 꽤 멋져 보였던 기억이 있다.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박사과정은 참 외롭고 긴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논문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데이터를 돌려서 내가 생각했던 가설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오면 정말 짜릿하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다. 마치 동굴에서 수년 동안 마늘과 파를 먹고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느낌이다. 그러기에 감정의 기복이 상당히 심한데, 나의 경우도 마찬 가지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서 빠듯한 경제사정에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SNS를 통해서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이 가족들과 휴가를 가서 환한 얼굴로 V 자를 그리며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웃는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 수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오기도 하는데, 날씨까지 우울하다면 기름을 붓는다.

 

Upstate NY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누누이 강조했던게 '추위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하나 몰랐던 것이 사람의 체온이 머리로 빠져나간다고 항상 따뜻한 모자를 써서 몸을 따뜻하게 해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렇게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한국에서는 항상 멋짐과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하기에 모자를 잘 쓰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물론 Rochester나 Cornell 대학이 위치한 Ithaca, Buffalo 등 Albany보다 북쪽의 경우는 대략 일 년에 5개월 정도는 겨울로 보면 되는데, 내가 있었던 Albany도 상당했다. 대략 1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로 보면 되는데, 개인적으로 추위를 잘 견디는 편이긴 한데, 문제는 햇볕을 보는 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기분도 처지고 우울감이 증폭되는 영향이 있다. 특히, 가족이 있다면 외부 활동이 별로 없는 경우는 상당히 우울감에 빠질 수 있기에 이에 날씨가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준다. 나의 경우는 나중에 집안에 Sunlight lamp 같은걸 사다 놓기도 하였다.

 

캘리포니아나, 조지아, 플로리다와 같은 경우는 햇볕은 좋으나 다른 기후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어디가 꼭 좋다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맞는 기후,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도시 vs 시골도 마찬가지 고민이다. 어디가 좋다고 이야기 하기 힘들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따라서 위치를 정하는 것이 좋다.

 

물론,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하는건 두 군데 이상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을 경우이기에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첫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을 때 부터 눈발은 날렸고, 박사과정 하는 동안 실컷 눈 구경을 했던 듯싶다. 나중에는 좀 즐기긴 했다만, 눈이나 추위보다 저런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 사람의 감정이 지하실을 파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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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스테잇 뉴욕의 가을

 

미국의 '업스테잇 NY'이라고 불리는 뉴욕의 북부는 캐나다에 접하고 있기에 가을이 빨리 온다. 우리가 한 번 즘은 들었던 '뉴욕(맨해튼)의 가을'도 멋있지만, 나는 업스테잇 NY을 몰랐으니 그 가을을 알 리가 없었다. 뉴욕주의 중북부 - 동쪽으로 매사추세츠와 붙어 있다 - 는 산과 나무가 많아 가을이 참 아름답다. 최근에 뉴욕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을 발견했다고 하니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3080) 우리가 일반적으로 뉴욕하면 맨해튼(혹은 뉴욕시티)을 뉴욕이라고 칭하기에는 뉴욕주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정신없이 여름을 보내고 맞이한 가을은 참 아름다웠는데 캠퍼스도 온갖 낙엽들로 각종 색깔이 물들고, 뒤에 Frear Park를 끼고 있는 아파트도 온갖 낙엽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마시며 멍하니 사색(멍 때리기)하기 참 좋았다. 그래서 주변을 걸으면서 한 주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봄에도 이쁘지만, 가을이 예쁜 Lally 건물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기 딱 좋았던 가을

화룡점정 자동차 구입

그 즈음, 차를 구매하기로 한다. 룸메이트 차로 연명하고는 있었지만, 언젠가 나도 차가 필요할 테고 특히 연말이 되면 와이프가 미국으로 넘어오니 더 이상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마다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보통은 필기시험을 치고 나면 임시운전면허증이 나오고 그 이후에 강의를 한번 듣고, 실기시험을 치고 정식 운전면허증을 갖게 된다. 국제면허증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유효기간이 1년이라 신분증을 위해서 매일 여권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관계로 필수적이라 생각해서 오자마자 한 일 중에 하나는 바로 필기시험을 쳐서 임시면허증을 받는 것이다. 필기시험은 까다롭지 않았고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 혹은 MVA - Motor Vehicle Administration) 웹사이트를 통해 필기시험 문제를 보고 공부를 할 수 있다. 몇 가지 헷갈리는 게 있는데 큰 문제는 없다. Troy에 있는 DMV는 그리 붐비는 편이 아니라서 바로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이 운전면허증에 쓰이는 사진임) 시험을 칠 수 있었고 한쪽 구석에 아주 오래된 칸막이 책상에 앉아서 금방 시험을 칠 수 있다. 얼마 안 되어 임시면허증이 나왔다.

 

학기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조금 미국생활이 적응이 되었을 때 즈음 차를 구매하기로 한다. 미국에서 차량을 구매할 때는 보통 중고차를 살 것인지 새 차를 살 것인지부터 고민을 하는데, 나의 경우는 와이프가 오게 되면 대부분 몰 것이라 수리비며 기타 발생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자 그냥 새 차를 사기로 한다. 지금까지도 중고차를 사본 적은 없지만 구매해 본 사람들은 또 꽤 괜찮다고 들었다.

 

룸메이트는 차를 참 좋아해서 신중하게 고르고 이 때를 이용하여 자신이 타고 싶었던 차 브랜드 딜러샵에 가서 타보고 싶은 차를 실컷 타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하면 픽업하러 오기도 그리고 끝나면 집 앞에 내려주기도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어디 전화해서 통화를 할 자신이 없었기에, 같이 수업을 듣는 미국 친구 Tracy에게 함께 해줄 수 있냐며 부탁했다. 이 친구는 미국 정착에 참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내가 안 되는 영어로 수학을 가르쳐 주고 그 친구는 나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지역 케이블 회사에서 광고영업을 했던 경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카쇼핑을 하기로 한 날 아침에 룸메이트에게 "오늘 차 사러 갈 거야" 했더니 "많이 타보세요"라며 학교를 향했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Tracy와 함께 먼저 현대로 갔다. 현대로 간 이유는 소위 가성비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실제 가보니 가격 흥정이 잘 안되었다. (Tracy가 아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현대와 몇 군데 딜러를 돌았는데 몸만 피곤하고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그 친구가 "다른 브랜드는 안돼?"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뭐 특별히 선호하는 건 없다"라고 하니 혼다 딜러를 알고 있다며, 괜찮냐고 물어본다. 이미 좀 지친 상태라 그러자고 하니 전화를 해보더니 제법 할인을 해줄 것 같다며 가보잔다. 그리고 실제로 갔더니 전년도 모델을 꽤나 할인을 해준다고 하기에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본다. 괜찮다. Tracy가 단도직입적으로 너의 best offer를 달라고 하자 그 딜러는 제법 할인된 가격이라며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더니 Tracy가 나에게 "괜찮은 딜인 것 같다"라고 말하며 인터넷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스마트폰 없었음)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가격을 한번 봐달라고 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형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하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린다. 그렇게 얼떨결에 구매한 Honda Accord. 집에 돌아가니,

 

룸메이트: "형 그래서 그 차 샀어요?"

나: "응"

룸메이트: "반나절 만에? 하며 웃는다."

 

그렇다. 나는 차의 디자인이 예쁘기만 하면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서 반나절 만에 사버린다. 물론 한국에서 저축한 돈의 반이 한꺼번에 날라가 버렸다. 리스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현금으로 사버렸다. (신용점수도 거의 없었기에 옵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거금을 보내야 했기에 일주일 후에 차를 픽업했다. 

 

이제 내 발이 생겼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안나지만 감격적인 순간이라 딜러로부터 차를 인수하는 날

김연아

한인 대학원생 수가 많지 않았던 RPI의 대학원생 (석사, 박사) 동기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특히 박사과정의 경우는 적어도 4년 이상이 걸리는 긴 시간을 공부해야 하므로 육체적 건강은 물론 심리적 안정도 필요하다. 더군다나 익숙하지 않은 미국 생활이니 더욱더 그럴 수도 있고, 하루하루가 언어소통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니 계속해서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주말이면 한인 학생들끼리 모여서 같이 밥도 해 먹고 끝나면 맥주 한잔에 이런저런 한 주 동안 자신이 했던 바보짓(외국인으로서 당연히 실수가 많다)을 공유하고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보냈는데, 

 

그러다가 한 명이 정보를 공유한다. "김연아가 온다는데요?" 웅성웅성... 남학생이 대부분이었던 주말모임에서 한 명이 김연아가 경기를 위해서 Lake Placid에서 열리는 2009 Skate America (2009년 11월 13일 ~ 15일) 정보를 공유한 것이다. Troy에서 Lake Placid는 2시간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형 새 차로 한번 가시죠" 한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김연아의 연기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처음 학교가 있는 동네 바깥을 나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 편을 쓰면서 당시에 연기를 유투브에서 찾아보았는데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당시 김연아가 19살이라고 하니 기량이 한창 오르고 있을 때였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기라 더욱더 좋았다. 둘째 날 Long 프로그램 시작할 때 '김연아 파이팅!'을 혼자 외치는 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왜 혼자면 파이팅하냐'며 구박을 받기도 했던.. 아래 동영상 링크에서 32분 10초 경에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RCPgHhtcYg)

 

여기서 부터는 당시에 썼던 블로그에서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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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15일까지 NY주 Lake Placid에서 열린 2009 Skate America 경기

김연아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좌석을 알아보고 가게 된 곳,

가는 길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곳

그동안 3달동안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Troy를 벗어나 오랜만에 머리를 식히러 잠시 외도를 했고,

그동안 시내주행만 하던 차도 한번 쌩쌩 밟아줘야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떠난 1박 2일 여행

 

일단 김연아 선수는 정말 너무 이뻐 보였고 역시 국민동생으로 칭호를 받을만한,

연기도 정말 일품인, 첫날 세계신기록이 부담스러웠던지, 

둘째 날 연기가 아쉽긴 했지만, 연습 때부터 컨디션이 좀 나 빠보였는데,

그래도 잘한 듯, 앞으로 조금만 가다듬으면 정말 "perfect"이 될 듯,

여기저기 멀리서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잠시 머리 식힌 경험치 고는 너무나 값졌던 여행

 

내년에 또 하게 되거든,

부인과 손잡고 가봐야 할 필수 코스~!!

 

출처: https://07701.tistory.com/category/My life in Troy? page=2 [강박의 2 cents]

 

Troy에서 Lake Placid까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는 여행

올리가는 I-87 이길로 쭉 올라가면 캐나다 몬트리올이 나온다.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려주시고

동형 군이 찍어준 나의 운전 샷, 나의 애마와 함께

온갖 잡다한 버튼이 많은 나의 애마와 함께,

2시간 좀 넘게 걸려 도착한 Lake Placid는 1932년, 1980년 동계올림픽을 치른 곳으로,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나름 고풍스러운 작은 도시

여기는 오늘 김연아가 경기할 경기장 좌석배치도

도시가 아기자기 한 집들로 시내가 이루어져 있고, 걸어서 10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으나 옆에 호수를 끼고 있어 아름다운 도시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샵들이 많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냥 패스.

이 시골에도 있는 스타벅스가 왜 우리 동네에는 없단 말이냐.

저녁 먹으러 임의로 고른 피자집, 엄청나게 큰 피자 2개 시켜서 4명이나 나눠먹었다. 뒤에 보이시는 분은 아마 김연아 보러 오신 분이신 듯

오늘 구경하게 될 김연아 표. 사실은 내일 표긴 하지만, 그거나 그거나

밥 먹고 간단하게 스타벅스 한잔, 뭐 돈은 없고 춥지만 그래도 커피 한잔이 아니면 공부도 집중도 안 되는 나는 이제 미국 사람?

같이 동행했던 룸메 동형 군, 카이스트 천재소녀 미지 양, 기계과 신랑감 후보 1순위 준규 씨.

이곳은 곧 김연아가 나올 경기장 모습

언제 와서 저렇게 김연아 플래카드를 많이도 붙여 놨더라. 대부분 김연아..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붙였겠지만

심사 위원석, 한국 분도 한분 계시고

 

세계기록을 세우고, 인터뷰하는 김연아.

 

이번에 가서 새롭게 부각된 인물, 오서 코치 정말 매너 좋고, 인상 좋고 저 아이스 차 나간다고 손수 문 열어주고, 정말 멋진 코치인 듯

 

다음날 아침 모텔 앞 풍경

뉴욕 북쪽에서 볼 수 있는 산세.. 저 멀리 스키장도 보이고,

아침 공기가 너무너무 상쾌하였던

다음날 아침은 샌드위치 46가지의 샌드위치, 정말 시키기 힘들다 ㅡ.ㅡ;;

나가는 길에 한컷.

발이 되어주고 처음으로 장거리를 운행한 내차

동형 군이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 각도에서 찍어주었네

 

우리가 묵었던 모텔, 그냥 막 찾아간 것 치고 깔끔하고, 저렴한 가격에 잘 쉴 수 있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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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에서 스쿨에 오자마자 박사과정을 담당하는 스텝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건물을 소개받고 방학이라 많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개해 주셨다. 시차 적응은 물론이고, 영어도 잘 안 되는 나는 그 순간이 별로 반갑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거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방학이라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1층으로 내려가니 (건물이 좀 특이하게 언덕에 있어서 현관문으로 들어가면 거기가 3층이고 교수 방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 그래서 던젼이라 불렀다), 교수 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그중에 하나의 방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고, 그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 교수를 인사시켜준다. 할아버지 교수가 반가운 듯 맞아주며 앉으라고 하니 그 할머니는 나를 던져놓듯 놓고 가버리셨다.

 

그 교수님은 Tenure-track (테뉴어를 받지는 않았으나 테뉴어를 받을 수 있는 패스에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형태라 볼 수 있음)은 아니었고 (교수들의 Tenure 및 직급/직책은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미 은퇴를 하시고 학기 별로 계약을 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Clinical Professor 이었는데, 나이가 89세 이셨던 Dr.Pier Abetti 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한번 방문을 하면 1~2시간은 훌쩍 지날 만큼 말씀이 많으셔서 희비가 많이 엇갈리는 분이었다. 그런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일단 나를 반겨해 주시는 그분의 이런저런 질문을 듣고, 본인이 GE에서 근무를 하셨고, 당신의 아버지가 에디슨과 함께 GE에서 일했다고 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첫 만남부터 2시간 동안 역사 공부를 하고 나니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낄 때 즈음, 그분이 "근데 너의 연구 분야는 무엇이냐?"라고 하길래 당시만 해도 아주 개략적인 아이디어만 있었던 나는 출연연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 대학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때 주제가 한국경제발전에서 출연(연)의 역할이었고, 그걸로 학회 발표를 했었다고 하니 그 논문을 한번 가져와 보라고 한다 (아직 학기 시작하기 전),

 

* GE는 많이 아시겠지만 Edison을 포함한 몇 명의 공동창업자가 설립을 했고, 그 중에 Edison Machine Works는 RPI가 위치한 Troy 옆 Schenectady, NY 에 있었다. 현재도 GE의 연구시설이 Niskayuna에 있다.

 

다음날 집정리도 안된 상황에서 노트북을 뒤져서 그 논문을 들고, 그 스텝 할머니께 부탁해서 출력해서 가져가니 당신이 한번 읽어 보겠노라고 하시면서 예전에 KAIST와 학생 연계도 한 적이 있고 모 교수님을 아신다고 또 한참을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미팅에 가보니, 논문을 난도질을 해놓으셨다 (정말로, 난도질.. 컴퓨터가 없으셨고 일일이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면서, 다른 책을 복사를 해서 가위로 오려 붙여 놓으셨다). 그러시면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다. 이거 나와 함께 논문을 써보겠냐고 말씀을 하셨다. (아직 학기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논문을 함께 쓰자고 하시니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분은 정성적 연구를 주로 하시는 분으로 RPI의 박사과정에서는 정성적 연구는 배우지 않았고, 정량적 연구를 주로 배워 다른 교수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어떤 실적이 생기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가 출력해서 드렸던 논문을 손으로 직접 옮겨 쓰시고 어떤 부분은 복사를 하셔서 가위로 오려 붙인 한 뭉큼의 서류를 주셨다. 이거를 정리해서 (다시 타이핑) 다음 주에 보자고,

 

나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일단 손으로 쓰신 필기체의 손글씨를 알아보는데 정말 애를 먹으며 주신 manuscript를 수정하고, 또 다음주에 난도질된 논문을 받아 들고 이를 다시 수정하고 이를 몇 주를 반복하였다. 그 논문이 대략 완성될 무렵 Lally에서는 매년 여름 방학이 지나면 학생들의 완성된 페이퍼를 가지고 박사과정생들이 발표를 하고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듣는 자리가 있다. 나도 이 논문이 완성이 되어 발표를 하겠다고 했고 (지금 생각에서는 무슨 배짱?) 발표를 하자 약간 말을 잇지 못하는 교수님들의 반응들 (아마 정성적 논문 접근 법이기도 하고, 주제가 별로 재미도 없었을 것이고, 일단 영어가 제대로 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남)..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였는데, 동기들은 1년 차가 발표하다니 이건 기록에 남을 거라면서 토닥거려 주었다. (이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지금도 발표는 쉽지가 않다). 여하튼 그 논문은 1년 차가 끝나기 전인 2010년에 출간이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 교수님과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집으로 초대도 해주시고, 틈틈이 맛있는 것들도 사주시곤 했다. 내 다음해도 다른 1년 차 학생들과 꾸준히 논문을 쓰셨고 아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라는 걸 증명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있는 듯하게 느껴졌다. 그의 열정은 참 대단했는데,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컴퓨터가 없는 방) 약 1시 정도까지 연구를 하고 다시 집으로 가셔서 낮잠을 2시간 정도 주무시고, 그 이후 할머니와 함께 2시간 정도 걷는 생활을 반복하신다고 했다. 나이가 89세였지만 운전도 직접 하시고 그 열정이 대단하셨는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그렇게 하셨음), 와이프가 미국으로 오고 나서 가족이 왔다고 알고 있던 중국 친구들을 함께 불러서 직접 이탈리아 음식을 해주시겠노라며 (이탈리아 출신)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는데 아주 아담한 집에 두 분이서 살고 계셨는데, 식사 도중 '어찌 그렇게 건강하시냐?'며 물어보니, 나에게 "그 비밀을 알고 싶니?" 하시기에 끄덕거렸더니 웃으면서 "in born (타고난 거다)"라고 하시는 거다. 알고 보니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100세를 넘는 장수 집안이었던 것이다. 

 

90이 다되신 두분이 직접 차려 주신 저녁상
차려있는 음식을 설명해주시는 Dr.Abetti (한국인과 중국인 학생이 온다고, 아마도 일본에서 받은 외투를 두르셨다)
음식을 직접 덜어주시는 교수님
지하실에 가득 쌓여있는 책들 (저 책장을 직접 만드셨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분이 정말 아기자기하게 사셨다 (미용실을 갈 용기를 못 내 장발이 되어 버린 나..)

그렇게 학기가 한참 시작되고 있을 때 교수님이 "내 친구가 RPI 출신 노벨상 수상자 인데, 내 수업에 특강 하러 오는데 관심 있으면 들으러 와" 하시는 거다. 잉? 노벨상 수상자라니! 기록을 찾아보니 RPI는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1964년에 박사를 받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Dr.Ivar Giaever이다. 당일 교수님 수업을 찾아가니 학생들이 있긴 한데, 내가 기대한 '노벨상 수상자 XXX 강연' 하면서 큰 오디토리옴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업의 일환이었다. 이것이 놀라웠다. 웬 할아버지가 와서 자신이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일생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고, 학생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당연히 30% 알아들었나 모르겠다) 방식이었다. 알고 보니 매년 교수님은 이 분을 수업에 초대해 특강을 하셔서 엄청난 오디토리옴에서 하는 그런 특강은 아니었다.

 

기억나는 것중에 하나가 "나는 노벨상을 너무 이른 나이에 받았다"면서 아쉬움 섞인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곤 '잉?' 하는 것이 나의 첫 반응이었다. 이 분은 너무 이른 나이에 상을 받아서 상금과 여기저기서 연구관제를 받긴 했지만, 연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분의 인생은 연구보다는 초청 강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연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에서는 항상 '최연소' 타이틀을 붙이고 하루라도 일찍 어떤 성취를 이뤘다고 강조를 하는데 진짜는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느꼈다.

 

* 이 분은 44세에 GE에서 근무할때 'Electron Tunneling and Superconductivity' 연구로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

 

수업이 끝나고 흔한 사진한장 찍지 않고 (아마 매년 해서 그랬을 듯, 그리고 너무 오래전 이야기니까) 다들 그렇게 강의실을 나가는 것이다. 나도 그냥 가려다가 언제 또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겠나 싶어서, 그 할아버지 연구실에 찾아가니 두 분이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1973년 노벨물리학생 수상자인 Dr.Ivar Giaever와의 인생샷 (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체육복을 입고, 그 분도 소탈했다)

아직 나는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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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학기는 물론 드라마로 가득하지만 생각보다는 잘 따라가고 있었다. 매일 수업을 하고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어 사실 학교 외에 다른 걸 경험하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나이 들어서 온 게 아닌가. 여기서 돌릴 수 없기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 와이프는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집의 판매는 부동산에게 부탁을 했고, 문제는 나머지 신혼가구 들을 비롯한 기타의 것들을 처분하고 이사를 직장을 다니면서 준비한다고 매일 힘들어 했기에 나도 여기서 힘들다고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가자고 생각을 하고 있으나 정작 심장과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득하다. 

 

학기가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메일을 하나 받았다. 다른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포닥을 찾고 있었는데 RPI에서 오퍼를 받았다고 집을 구하러 잠시 들리는데 혹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냐는 메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미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니 멋진걸?' 하는 생각이 제일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물론이죠 하면서 짧지만 그간 동네를 돌아보면서 알게 된 정보들을 공유하였는데, 얼마 후 자신이 아파트 오피스에 연락해서 몇 군데를 보기로 했는데 혹시 하루 묵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나이도 동갑이었고 얼마 전 내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우연한 인연들 기억이 나 그러시라고 했고, 룸 에이트도 Okay 하였다. 

 

그 날이 다가왔고 그 분은 미국에서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지 능숙하게 아파트를 다 봤다며 다시 한번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하루 묵게 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실까요?' 한다. 그래서 알게 된 몇몇 대학원생 들을 불러서 함께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 거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윙과 피자를 사고 맥주를 사서 조촐한 식사를 한다. 

 

알고 보니 그분은 나와 같은 출연연구원 출신에 스위스 등에서 공부도 하고, 미국에 와서 박사를 끝낸 아주 재미있는 입담을 가진 분이었다. 나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하루하루 겨우겨우 수업을 따라가다 오랜만에 수다를 떠니 기분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미국 박사과정에서 유의할 점 (전공은 달랐지만), 미국 생활의 어려움, 내가 했던 미국에서 했던 실수 들 이야기를 하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미국 박사과정을 하면서 아주 달콤한 정보를 제공했던 '마일모아' 홈페이지(www.milemoa.com)를 알려주며 꼭 해보라고 미국에서 크레디트 카드를 만드는 방법을 강의까지 하고 가셨다. 재미있는 사연과 유용한 정보가 가득했던 그 분과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내가 나도 결혼을 했고, 지금은 와이프가 한국에서 집을 정리하고 있는데 겨울에 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할 말이 많은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 제가 돌싱이거든요" 하시는거다. 당시 나는 TV를 본 지도 오래되었고 한국에서 '돌싱'이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모를 때 여서 대략 말은 안 되지만 '멋진 싱글' 같은 표현으로 생각하고 무던히 넘겼다. 근데 아무리 들어봐도 이야기가 이상한 거다. 그래서 조심히 물어봤다. "근데 돌싱이 뭐예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모르셨구나 요즘 유행하는 말인데 '돌아온 싱글'이요". 설명을 해줘도 내가 못 알아듣는다 "돌아온 싱글이요?" 했더니 웃으며 "아 저 이혼했어요" 하는 거다. 순간 정막이.......

 

곧 그 분은 괜찮다고 오래전 일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결혼해서 와이프가 온다고 하니, 와이프에게 잘해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본인의 목표를 위해서 오면 환경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데, 결혼해서 무작정 따라오는 경우는 남편이든 와이프든 학교를 가지 않는 다른 한쪽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다고 했다. 그분의 와이프도 미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여기서 못살겠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결국 이혼을 하셨다고 했다. '둥!' 동공 지진....

 

그렇다, 내 꿈인 박사과정을 한다고 그렇게 준비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그 생각은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 저녁 자주 가는 Gohackers의 게시판을 뒤지다 보니 '배우자 생생 일기'라는 게시판이 있었고 거기에는 온갖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이야기과 푸념들로 가득한 것이다. '아.. 어쩌지?'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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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결혼을 하고 유학을 오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고 각 선택에 따라서 장단점이 있기에 무엇이 정답이다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다만, 결혼을 하고 유학을 나오는 분들의 경우는 단순히 자신 만의 박사과정에 대한 계획도 중요하지만 배우자가 유학생활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별 준비 없이 오신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종종 포닥이라던지 박사과정생 중에서 결혼한 다른 커플 들과 잘 지내면서 이겨내는 방법도 있긴 하나, 자칫 공부를 하지 않는 배우자의 경우에는 쉽게 자신이 뒤쳐지는 느낌과 향수병, 우울증 등이 겹쳐 오는 경우가 흔하고 배우자가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본인의 공부에도 지장을 줄 수도 있으니 특히, 외국생활 경험이 없는 부부의 경우에는 많은 준비와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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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학교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많기도 하고, 어학연수나 이런 기회가 많지만 (물론 모든 청년들이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대학교를 시작한 95년도만 하더라도 해외연수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사실 있긴 했지만 그런 것을 잘 찾는 친구들의 몫이었지, 수업도 건성건성 듣고 끝나면 동아리 방에서 죽치다가, 마음에 맞으면 나가서 소주를 마시던 날라리 대학생의 눈에 그것들이 들어올 일이 없다. 그래서 지금 대학을 다니는 분들과 느끼는 감정은 아주 많이 다를 것 같다.

 

학기가 다가오면 오리엔테이션을 통해서 (지난 편에서 가능하면 참석하길 추천 드린바 있다) 학교가 있는 곳의 주변 상황이나 고려해야 할 것들을 잘 정리해서 알려준다. 그 시점이 되면 첫 학기 수업을 듣게 되는데, 각 학기 수업을 박사과정 코디네이터와 상의를 해서 결정을 한다. 특히 처음 1년에 대한 커리큘럼은 거의 정해져 있기에 특별하게 선택할 것들은 없다. 경영학 1년 차는 방법론과 아주 기본적인 경영이론 수업을 듣는다. 그래서 첫 학기의 과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과목을 듣게 되었다.

 

내가 1년차를 시작했을 때 전체 9 명의 박사과정이 프로그램에 들어와 함께 시작했는데, 한국은 나 혼자, 중국 2명, 터키 1명, 미국 2명, 인도 1명, 루마니아 1명, 영국 1명이었다. RPI의 경영대는 프로그램이 크지가 않고 크게 경영(Management)과 재무(Finance)로 크게 구성이 되어 있다. 스쿨 자체 프로그램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전체 박사과정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Oral Communication for TA 1 (이건 스피킹 시험에서 떨어져서 들어야 하는 영어수업 ㅜ.ㅜ)

Advanced Quantitative Analysis

Doctoral Research Method #1

Foundations of Management Thought

Seminar in Economic Theory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처음 듣게된 수업은 Advanced Quantitative Analysis 였다. by Dr. Kenneth Simons. 캠퍼스를 미리 돌아가면서 강의실을 알아뒀는데, 이 수업의 경우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같이 듣다가 대학원생 같은 경우는 몇 챕터를 더 공부해야 하는 (시험 범위가 다르다) 형태의 수업이었는데, Dr. Simons (나의 지도교수가 된) 수업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들고 태어나 처음으로 미국인이 가르치는 영어로 된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스스로도 걱정이 많아 사실 전날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첫 수업은 강의계획서를 설명하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교수가 먼저 자기를 소개하고 학생 한명 한 명 인사를 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젊은 대학생들이었고 몇 명 대학원생의 얼굴만 알았기에 나는 겨우 이름만 소개하는 정도로 마무리해야 했다. (아.. 나도 영어를 잘하고 싶다). 강의계획서 설명이 다 끝나자, 교수님은 OHP를 켜더니 (얼마 만에 보는 OHP 이던가.. 내가 대학교 1~2학년 때 썼었는데,..) 거기다 깨알같이 수식을 쓰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아이고 이런 이제 시작이구나...'

 

고등학교 때 인문계이기는 했지만, 수학을 꽤 좋아해서 미적분 푸는 걸 좋아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정도 수준인 것 같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열심히 연습문제를 다 풀고 숙제를 열심히 했다. 이런 식의 공부는 학부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는데, 2003년 졸업 이후 6년 만에 다시 교과서를 보고 풀었다. 나이 들어서 영어가 딸리지만 많은 시간을 들여서 복습을 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미국 친구가 숙제를 물어보기도 했고, 그걸 안 되는 영어로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막히는 문제는 교수님께 물어봤더니 가을로 넘어가는 캠퍼스 벤치에 "여기 앉자"라고 하시더니 종이와 연필을 꺼내서 일일이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이게 사실 첫 번째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했더니 학기가 끝날 무렵 수업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 'Yay!... 나도 가능하구나' (<- 요것이 의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수업에서 잘 할 수는 없다. 다른 박사과정 수업에 Foundations of Management Thought라는 게 있는데 이 수업은 일주일에 경영 관련 고전 들을 한 권씩 읽고 그것을 요약하여 리포트를 제출하고 수업에는 토론을 하는 방식인데, 전체 9명만 듣는 수업이라 교수랑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토론을 진행하는데 첫 시간부터 멘붕이었다. 그 이유는 일단 경영의 고전을 접한 적이 없었고 (학부 때 공부를 안 한 티가 여지없이 났다), 두 번째 책을 구해서 읽었는데 일주일에 한 권을 볼리 만무했고, 첫 챕터만이라도 읽으면 다행이었는데 일단 전혀 이해를 못한 데다가 겨우겨우 인터넷을 뒤져서 대략의 내용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요약 리포트를 쓰는데 영작이 형편없었으니 10번을 고쳐 써도 내가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학기 중간 즈음 교수에게 별도의 메일을 썼다. '교수님, 미안하지만 제가 밤을 새워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리포트를 쓰고 자료를 찾고 했지만 너무나 벅차다. 나의 모자란 영어 때문인데, 앞으로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애걸복걸하는 메일을 썼다. 그랬더니 다음 시간에 '학생 중에 누가 영어의 어려움으로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누군지 다들 알았다. 내가 제일 영어를 못함). 다른 학생들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라고 웃으며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해주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수업은 나에게 정말 힘든 수업이었다. 지금처럼 Ridibooks라도 있고 전자책이 활성화되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갑자기 리디북스 1승)... 노력이 가상했던지 교수님은 A-를 끝에 주셨다. (사실 제가 무엇을 읽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ㅜ.ㅜ).

 

첫 학기는 정말 울고 웃음의 반복이었다. 한 수업은 일등을 하고 다른 한 수업은 꼴등을 하고,.. 나도 내가 종잡을 수 없다. '과연 내가 올바른 길을 선택한 건가?' 온지 며칠 되었다고 벌써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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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교에서 과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힘들지만, 수업에 대한 질문이 있으면 대부분 교수님들이 굉장히 친절하고 답변하게 답변도 해주시고 관련 자료를 찾는 방법까지 설명해 주신다. 내 느낌에는 어른을 대하는 게 아니라 마치 어린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하나하나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따라서 어려움이 있다면 교수님을 찾아가서 어려움을 이야기하라,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주실 수 없으나 공부하려고 하는 의지를 꺽지 않고 응원해 주신다. 지금 반대로 교수에 입장이 되어 보니, 수업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정말 반갑다. 그래서 없는 것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예뻐 보인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고 교수님 방 문을 두드려라. (물론 Office Hours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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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독자분들이 '웬 호들갑'이냐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외국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젊은 나이도 아닌데 (33살에 미국으로 오게 됨) 혼자가 아니라 와이프가 올 때까지 준비해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나에게는 참 많았다. 이제 겨우 집을 마련하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고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적응이 되었다 (곧 학생증으로 버스를 공짜로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온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밥 한 끼 제대로 차려먹지 못했다. (계속해서 라면만 먹고 있었다). 아! 일단 밥솥과 쌀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검색해보니 Hmart에서 전기밥솥과 쌀을 배송해주는 걸 알게 되어 재빨리 주문을 완료하였다. 한국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밥솥도 있고 가격도 다양하지만 일단 미국에서 한국기업의 밥솥은 비싸서, 선뜻 결제를 하지 못하다가 이러다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주문 쌀과 함께 완료한다. 며칠 후, 드디어 밥솥과 쌀이 배송이 되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마주하듯이 학교를 마치고 오자 집 앞에 큰 박스가 떡하니 놓여 있다. (나는 입맛이 완전 한국식이다. 그래서 부모님도 미국에 간다니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어떻게 먹고사느냐?"였다). 몸을 휘날려 박스를 뜯고 쌀을 씻어 처음 밥을 짓는다. 반찬이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와이프가 싸준 볶음 고추장과 계란 프라이를 하나 하여 정말 개눈 감추듯 두 그릇을 비워버린다. 생각해보라, 해외 출장을 가도 하루에 한 끼는 쌀과 고춧가루가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 거의 10일 동안 쌀을 먹지 못하였다니.. (실제로 첫 10일 만에 몸무게가 7 Kg 정도 빠졌었다). 이제 겨우 사람다운 삶을 살겠구나.

 

내 인생에 이보다 기다린 택배 박스가 없었다. (박스 뒤로 당시 나의 모든 살림이 보인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왜 이거 딸랑 두 개만 샀을까 싶다. 반찬도 사지..(밥솥이 300불이 넘어서 선뜻 살 수가 없었음) 
(급속) 밥이 되는 10여 분이 마치 10일 같이 느껴지는

 

이렇게 급하게 밥을 지어먹고 해결하긴 했지만,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밥을 먹자 곧 김치를 먹고 싶다.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주변에 한국사람 (한국 유학생 포함)과 가게는 물론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런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또 다른 인연을 만난다.

 

우연한 만남 2 ,한국사람이다!, 그리고 김치다!.

지난 편에서 집을 계약하고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를 만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인생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게 항상 어떠한 길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김치를 그리워하며 학교를 갔더니 박사과정 담당 스텝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여기 한국 방문 연구원이 왔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수님이 안식년을 오셨나?' , '이 곳 시골까지 오셨네'라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 할머니가 생각보다 젊은(?) 학생같이 보이는 한 한국사람을 데리고 나온다. 

 

나: "어..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어디 교수님이신가요?" 하며 너무 젊어보여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인사를 청했다.

P: "안녕하세요. 네 저 교수는 아니구요. 지금 석사과정에 있는데 방문 연구원으로 왔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박승호 연구원을 만났다. 당시 박 연구원은 석사과정에 있었는데 학교에서 방문 연구하는 기회를 줘서 기술경영/혁신 쪽에 관심이 있어 Dr. Susan Sanderson 교수를 컨택해서 미국에 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첫 생각이 한국사람이다. 정말 반갑다' 그렇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 되는 게 맞다. 그렇게 잠시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박 연구원이 "형, 그럼 오늘 저녁에 밥 먹으러 오실래요?" 하면서 "제가 김치찌개 끓여드릴게요"하는 것이다. 0.5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김치찌개'라는 말에 무너져 버렸다. "근데 제가 차가 없는데 어떻게 갈까요?" 했더니 직접 라이드를 하러 오겠단다. 김치찌개도 감지덕지인데 라이드까지! 마음속에서 감동의 도가니다. 

 

알고 보니 박 연구원은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다른 한국분과 연락이 되었는데 그 박사과정 분이 한국에 잠시 방문하는 관계로 Sublet(렌트한 방을 다시 렌트함)을 받아서 다른 한국분과 함께 아파트를 쓰고 있었다. 동기가 될 대학원생을 한국에서 잠시 만났지만 미국에서 이미 대학원을 다니는 분들을 만난다는 마음에 너무나 궁금한 것도 많고 하여 나에게는 기쁨이 배가 되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 좋았던 박 연구원은 능숙한 솜씨로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동공에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김치다!'.

 

그렇게 둘은 갓지은 밥과 김치찌개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반찬 몇 가지를 꺼내어 마치 최후의 만찬 같은 최초의 만찬을 가졌다. 1인당 수 십만 원 하는 Fine dining의 밥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왜 왔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비슷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곧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형 자주 봬요' 하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날 밤은 아마 내 생애 손꼽을 만큼 행복한 얼굴로 잠에 들지 않았을까.

 

룸메이트가 오다.

박 연구원을 알게되어 진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일단 누군가 물어볼 사람이 있어 좋았고, 필요하면 장 보러 가자며 차로 데려다 주니 기동력이 생겨 더 좋았다. 그즈음 출국 모임에서 만나 함께 지내기로 했던 룸메이트가 Texas에서 차를 끌고 Troy로 오고 있었다. 이 친구는 당시 Texas Austin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기계과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여 와이프가 올 때까지 잠시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어차피 나 역시 돈을 아껴야 하고 미국을 좀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꼬박 이틀을 운전하여 나타난 룸메이트를 뒤가 안보일만큼 한 차 가득 살림살이를 싣고 도착했다. 그러면서 집을 둘러보더니 "형! 필요한게 많을 것 같은데요" 한다. 그날부터 바로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중고 가구를 구매하고, 부엌에 필요한 집기들도 사기 시작한다. 마침 한 한국분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어 가진 가구를 내어놓기에 U-Haul (트럭)을 빌려 그 집의 모든 가구를 가져온다. 그러면서 방안이 하나둘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이제 제법 사람 사는 것 같군.

 

전..

그리고

후, 이제 뭔가 사람사는 것 같고 안정되어 보인다.
중고로 산 가구들, 의자는 샀는데 책상은 아직 없다.
곧 어디서 책상도 구해와 이제 뭔가 사람사는 것 같다.

미국 생활을 해본 룸메이트가 생기자 살림도 하나둘 늘어나고 이것저것 조언을 많이 해준다. 나는 그냥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사다보니 어느새 제법 사람이 살만한 집을 꾸밀 수 있었고, 그때 즈음부터 학교에서도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다. 학교 오리엔테이션은 많이들 별 신경을 안 쓰는 분들도 많을 테지만 외국생활이 전무할 경우는 시간을 쓰실 것을 추천드린다. 아울러 박사과정의 경우 Teaching Assistantship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즈음에 스피킹 시험을 치게 된다. RPI 경영학과의 경우는 TA를 제공하지 않는데 일괄적으로 스피킹 시험을 치게 했고, 점수를 받아 들자 또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 이게 내 영어실력이구나. 그 창피한 점수로 인해서 첫 일 년 동안 영어수업을 들어야 했다. RPI는 학교가 크지 않아 외부에 제공하는 ESL 프로그램이 없고 TA를 지원하기 위한 수업을 몇 개 개설하여 제공하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이때 들었던 수업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제 기다리던 첫 "영어"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뭔가 적응된 내 모습
박사과정 라운지에서 바라본 전경

 

나 같은 경우는 워낙 배경지식이 없어 하나하나 해나가는데 급급해 제대로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건데 이 기간에 중요한 것이 Primary care를 받을 수 있는 Family Doctor를 선정하면 좋다. 한국은 이 Family Doctor 제도가 익숙지 않은데 미국의 경우는 Family Doctor를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의료보험에 따라서 부담해야 하는 Co-pay가 만만치 않긴 하다). 특히, 결혼을 해서 가족이 오는 경우와 출산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 부분을 알아두면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된다. 동네에 따라서 Family Doctor가 새로운 환자를 받지 않은 경우도 많고, 아주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Urgent care나 Emergency room를 이용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둘 중에 차이는 Urgent care는 즉시 목숨에 영향이 없는 경우, Emergency room의 경우는 목숨에 영향이 갈 정도로 구분하면 편하리라 생각한다. 본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 한국에서 미리 검진을 받아 오면 좋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자마자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을 미리 해놓는 편이 좋다. 이것도 학교마다 다르지만, 학교에서 의료보험을 들게 하는데 보통 학생들이 드는 의료보험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 나의 경우는 큰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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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에서 진보는 다양한 체제를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하고, 보수는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이나 태도로 아주 간단히 정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이 이미 경험하고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전공하는 경영학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미 오랜 기간 성장을 해온 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미 성장한 기업의 경우는 기존에 가진 것들 (이건 단순히 제품이나 기업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프로세스든 Tangible / Intangible 자원을 포함한다) 때문에 소위 '관성(Organizational Inertia)'라는 것이 생기는데 그러한 관성이나 지식이나 자원의 stickiness (이동하지 않으려는 경향)으로 인해 스타트업에 비해서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면이 있다. 

 

오늘은 재미없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2009년 8월 유학생활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사실 첫걸음부터 만만치가 않았는데, 오늘은 그 처음 좌충우돌 초기 적응기를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 영어를 배우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하나의 메시지는 이왕 마음을 먹었으면 하루라도 일찍 오시는 게 낳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가만히 보니, 어른과 아이들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호기심 이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쪽팔림'이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해도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고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더해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냄을 알 수 있었다. 어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부끄러워'한다는 점인데, 소위 '쪽 팔리'는게 제일 싫은 것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불 킥!' 같은 신조어도 나오지 않았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도, 미국 문화를 모른다는 것도 모든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늦게 배우나 보다. 

 

이 정도로 서론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첫날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윤성호 박사의 오랜 기다림과 도움 덕분에 그날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윤성호 박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윤성호 박사는 본가가 플러싱(NY주의 한인타운 지역)이고 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갖춰져 있다기보다는 집에서 정말 잠만 자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에어매트리스도 깔아주었다. 짐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어차피 바로 집을 구해서 나갈 예정이었기에) 바로 골아 떯어졌다. 당시 윤성호 박사는 Albany 다운타운이었는데 여기서 Troy까지는 차로 대략 20여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겨우 몸을 정리를 하고 내가 꿈에도 그리던 박사과정을 하는 교정을 같이 가기로 했다. 윤성호 박사도 당연히 연구실로 출근하는 길이니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착했던 윤 박사는 연신 어떻게 돌아다니시려고 그러나, 나중에 갈 때 본인 실험이 언제 끝날지 몰라 어떻게 라이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등의 말을 하였는데 더 이상 피해를 주기 싫어 내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했다.(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가자마자 학생증을 만들고 (일단 학교시설을 들어가려면 필요하기 때문에) 윤 박사와는 저녁에 만나기로 한다. 학생증을 찍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미소가 만연했다. (생각해 보라 10여 년의 꿈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좋았겠는지). HSBC에서 은행 계좌도 만든다. 은행 계좌 만드는 것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하루 만에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확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학생 Email 등의 신청을 위해 VCC에서 아이디 신청을 한다.

 

*RPI는 1824년에 설립이 되어 곧 200년이 되는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이다 (물론 경영, 미술 등의 다른 과들도 있다). 뉴욕 허드슨 강과 5 대호를 잇는 이리(Erie) 운하를 지으면서 필요한 많은 엔지니어 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2차 대전 직전 RPI는 원자력공학이 아주 강했는데 미국 국방부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었으나 당시 총장이 이를 거부하고 이 프로젝트가 MIT로 가게 되면서 MIT는 급성장을 하게 되고 RPI는 잘 모르는 그런 학교가 되어 버린 재미있는 역사가 있는 학교다. RPI는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Troy 도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캠퍼스가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역사만큼 건물이 아름답다. 

 

학교를 일단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위에서 소개한 바대로 학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아직까지는 방학이라 캠퍼를 정리하는 잔디깍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캠퍼스를 둘러보는데 어찌나 감동이 밀려 오던지, 전체적으로 한 바퀴를 둘러보고 앞으로 내가 오랜시간 보내게 될 경영대 건물도 가본다. 방학이라 스텝분들만 몇 명 있어서, 박사과정 담당 스텝할머니께 인사를 했다.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 금방 '아 이녀석 영어 잘 하는구나! (반어법이다)'라고 느끼셨을 것 같다. 그래서 쭉 둘러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경영대 프로그램이 크지 않아서 건물이 조그마하고 한국처럼 대학원 생을 위한 별도의 책상이 있다던지 공간이 있는게 아니라 박사과정 라운지에 책상 5개 정도가 끝인 건물이라 조금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다).

 

학생증 어찌나 좋았던지.. (감동의 도가니였음)
캠퍼스 중간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VCC 건물 (교회같이 보이나 컴퓨터 센터임)
투박해 보이나 전망이 끝내주는 중앙도서관 나의 최애장소
도서관 옆에 달걀을 품에 앉은 유리로된 건물은 실험공연장임 저기에 앉아서 트로이 시내를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임
이 건물역시 독특한 실내체육관과 Gym
언덕위에서 바라보는 경영대 건물, 작고 소박하니 참 정감이 가는.. 입구 바로 옆에 목련꽃이 예뻤던

캠퍼스를 한바퀴 돌자 허기가 진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체육관 옆 학생회관에서 미국에서 처음 먹는 식사를 하기로 한다. 내가 먹고 싶은걸 담으면 그걸 무게로 재서 계산을 하는 형식인데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담아 본다. 그런데! 이놈 짜기만 하고 엄청 비싸다. 물 하나랑 집었을 뿐인데 $16불이 넘게 나왔다. (그 다음부터 저기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다... 4년 동안 다섯번이 될까)

 

실망감이 가득하고 비쌌던 RPI 학생식당에서 첫 끼 (아마 졸업할때까지 가본 적이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미국 도착 첫날 아파트를 계약하다

 

이렇게 돌아봤는데도 아직 12시를 막 넘기는 시간이라 다음 숙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로 집 구하기 주변 사람들이 Troy는 겨울에 추위가 무시무시하다고 가능하면 Heat included 된 아파트를 추천하였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학교 캠퍼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Troy Gardens. 일단 와이프도 겨울에 올 예정이라 2 bed로 된 집을 찾았는데 Troy Gardens은 방이 언제 날지 모른다는 매니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또 아파트가 근처에 있냐고 물어보니 바로 위에 'Park Ridge'라는 아파트가 또 있다고 거기 가보라고 한다. 일단은 윤박사의 집이 Albany에 위치에 있어 통학도 불편하고 매번 라이드를 요청하기도 미안한 마음에 가능하면 오늘 아파트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라 거기도 가보기로 한다. 

 

두리번거리며 오피스를 찾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I'm looking for a 2-beds apartment"라고 매니저에게 말하니 여자 매니저가 마침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는데 보겠냐며 물어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Okay를 한다. 마침 또 3층 건물에 3층 코너 방이라고 하니 한국에서 층간 소음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아주 좋은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목조 건물이 많아 층간 소음이 아주아주 심각하다. 처음 집을 구하시는 분들은 참조를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보자마자 나름 깔끔한 집이라 바로 계약하기로 한다. 한국에서 들어갈 때 환전으로 조금의 여유자금을 들고 갔는데 그걸로 한 달치를 미리 Deposit을 걸고 Social Security Number도 없었던 나는 내 사정을 설명하자 학생들이 많은 캠퍼스 주변이라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던지 그렇게 하자고 하고 열쇠를 받는다. (실질적으로 도착 첫날에 바로 집을 계약하다 -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모했으나 차도 없고 정보도 없었던 나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첫날바로 계약해 버린 나의 Park Ridge 아파트 보이는 코너 3층이 그 집
오래된 집이긴 하나 3층에 정리가 깔끔히 되어 있었다 2 beds

우연한 만남 1

 

일단 제일 큰 숙제를 마쳤는데, 아까 윤 박사와 내리면서 새벽에야 들어온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키를 받아 놓긴 했는데, 문제는 Troy에서 Albany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집 계약을 하고 큰 돈을 지불한다고 (지금 기억에 한 달에 $750불 정도였던 듯) 안 되는 영어로 혹시나 사기 당하지 않을까 온 정신을 집중한데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시차적응이 안되는 몸이라 이미 피곤이 몰려왔다. 아파트에서 아까 처음 들렀던 Troy Gardens으로 내려오는 (학교 방향) 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가 또 나같이 방을 찾는 한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여기 오피스 어디 있는지 아니?"라고 묻길래 아까 방금 전에 와봤던 터라 "알려주겠다"라고 하니 차에 타라고 한다. 그 차를 타고 오피스에 도착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너는 어디서 왔고 이번 학기에 새로운 학생이냐 무슨 과정이냐 이런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물어보기에 답변을 해줬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통성명을 하고 나니 이 친구한테 부탁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당시 오피스는 방을 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매니저가 다른 학생 방을 보여준다고 30여분 뒤에 온다고 하자 나도 같이 기다려 주겠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눠봤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미국 다른 주에서 넘어왔는데, 공대 쪽에 박사과정을 왔다고 했다. 그렇게 20여분을 더 떠들고 나의 본심을 드러냈다. "저기 미안한데, 내가 친구 집에서 임시로 묶고 있는데 하필 알바니 쪽이야. 내가 어제 미국에 와서 길도 모르고 하는데 혹시 라이드 해줄 수 있겠어?"라며 물어봤더니 그 짧은 순간에 같은 박사과정으로의 동질감을 느꼈던지 "Of course!" 한다. 휴.... 그렇게 그 친구가 방을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Albany까지 데려다주며 "Good luck!"이라고 외쳐준다. 그리고 혹시 또 라이드가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그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그 호의가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윤 박사는 밤늦게 들어왔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었나 보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시차 적응을 못해 잠 못 이루다 오늘 한 일들과 집으로 돌아온 과정을 이야기하니, "형! 대단하신데요?" 하면서 웃겨 죽는다. ㅎ 내가 볼 때 나도 내 막무가내 정신이 웃겼다. 다음날 방 하나인 윤 박사에게 민폐를 줄 수 없고 나도 하루빨리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계약한 집으로 오늘 가겠다고 한번만 라이드를 해달라고 했다.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윤박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가진채 다음날 나는 앞으로 내가 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윤 박사 정말 감사해. 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너는 은인이야 :)

 

아파트의 첫날에 느끼는 '아 집에 가고 싶다'

 

윤 박사는 내가 싸온 짐을 즉흥적으로 계약한 집에 데려다주면서, "집 좋은데요?" 하고 돌아갔다. 이제 정말 혼자이다. 가서 잠은 자야 하지 않겠냐고 라면 이과 이불 몇 가지를 와이프가 싸줬는데 바닥에 잘 수는 없어서 윤 박사에게 에어매트리스를 당분간 빌려달라고 했다.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 짐을 정리를 한다. 그리고 삼일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해서 와이프가 싸준 라면을 끓여 먹기로 한다. 그래서 집 앞 RideAid에서 이것저것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다. 

첫 쇼핑으로 내가 구입한 것들... 첫 쇼핑치고 샴푸는 좋은걸 샀네. ㅎ

라면을 끓이려고 생각해보니, 그릇, 냄비, 수저 아무것도 없다. 다시 RideAid로 가서 큰 머그컵을 가지고 와서 전자레인지에 라면을 끓이려고 보니, 전자레인지가 없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어제 매니저가 이야기할 때 여기 전자렌지가 고장 나 당분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계약서를 쓰면서 했던 수많은 대화 중에서 살짝 스쳐 지나갔던 게 생각난다. 어쩌지..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앞에 집을 가보니 1 bed방이 빈방으로 문도 열린 채 있었다. 그 컵에 물을 넣고 봉지라면을 뜯고 앞에 집에 몰래 들어가 전자레인지로 라면을 돌린다 (혹시나 집에 냄새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배고픔은 이성적 생각을 이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매콤한 라면을 먹는다. 근심 걱정 덩어리 와이프는 그런 남편을 위해서 볶음 고추장을 넣어주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얼마나 맛있던지,

 

짐을 대충 풀고 라면을 먹고 나니 아직 점심도 전이다. 이제 곧 학교가 개강할 텐데 미시경제학 교수가 이미 숙제를 나어주셨다. (개강도 훨씬 전인데) 그래서 도서관을 가기로 한다. 이제 내 집도 있고 걸어서 학교를 간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모른다. 생각보다 잘 적응한 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앞으로 닥칠 일은 모른 채)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언덕 위에 자리 잡은 RPI 중앙도서관 3층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전경은 멋지기만 하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터라 아직까지 이메일 계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지 뭔가 제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생각해보니 윤박 사네에서 잘 도착했다고 와이프에게 전하긴 했지만 제대로 통화도 못하고 인터넷 사용도 아직 어렵다. 아.. 어쩌지..

 

중앙도서관에서 바라본 Troy 시내 전망이 정말 좋다. 앞으로 4년동안 저 자리에서 많이도 바라봤다.

밤늦게는 아직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 오후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온다. 새 집에서 처음으로 맞게 될 밤... 뭔가 잘 된다고 했더니, 가만히 보니 이 아파트는 화장실과 부엌의 등을 제외하고 각 방에는 전등이 없다. ㅡ.ㅡ;; 뭐 이런 일이. 화장실과 부엌 불을 켜고 나머지 책을 보고 또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둘째 날을 정리한다. - 책상 등은 하나 사야겠다는 한 채로,

 

아직 시차 적응 전이다. 새벽이 되었는데 눈이 확 떠진다. 그런 김이 아파트는 어떤지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아파트 규모가 꽤 컸는데 바로 뒤에 골프장을 겸하고 있는 Frear Park가 있다는 걸 지도로 봤는데 한번 가볼까 욕심을 내어 본다. 아직 여명이 밝지도 않고 겨우 사물만 바라볼 수 있는 정도지만 공기가 상쾌해서 맨손 스트레칭을 하면서 아파트 안쪽을 통해 반대쪽 공원을 향한다. 그런데! 저기 멀리서 시커면 큰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흠칫 놀랐는데,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보다 더 크고 뭔가 날카로운 뿔이 있는 시커먼 것이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큰 사슴이었다. 사슴이 항상 예쁘고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스름이 낀 새벽에 큰 뿔을 가진 덩치 사슴을 보니 어떠한 공포 영화 보다도 섬찟하다. '저 뿔에 찔리면 찍소리도 못하겠군'이라는 생각에 멀찍이 돌아가는데 이 놈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며 고개를 돌린다. ㅡ.ㅡ;; 무서울때 뛰고 싶지만 저 놈이 훨씬 더 빠를 것이고 놀래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놈을 계속 바라보며 멀찍히 돌아간다. 휴...

 

공원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떴고 그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고 짙은 푸르름이 너무나 좋았다. 역설적으로...

 

오늘은 아침 일찍 제대로 장을 보기로 한다. 4일째 라면과 물, 콜라, 시리얼, 우유 정도만 먹었더니 풀/과일이 먹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첫 식료품 장을 보기로 한다. 전등과 함께... 걸어서는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월마트가 있는데 거기를 가보자고 마음먹는다. 난생처음 미국 버스를 타고 Walmart로 향한다. Walmart에서 냄비, 책상 전등 등을 구매하였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풀/과일이 없다. 잉? 그래서 Walmart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Grocery'라는 단어도 몰라 "Fruit 어디 있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옆 블록에 Price Chopper에 가보라고 한다. 아! Walmart에 다 파는 게 아니구나...

 

냄비, 프라이팬, 책상 전등 등 이미 양손 무거운데 10여분을 걸어서 PriceChopper에 간다. 가서 과일과 계란을 사서 두 손 무겁게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아, 뭐 하나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정말! 집에 가고 싶다. ㅜ.ㅜ;;

 

그래도 계란 프라이와 함께 과일을 이것저것 먹으니 살 것 같다. 와이프에게 이메일이 왔을 텐데 이메일을 위해서는 학교를 "걸어서" 가야 하는데 이미 오늘의 진은 다 빠진 듯하다. 어쩌지 하며 노트북 놓을 때가 마땅치가 않아 창문틀에 얹어 놓았는데, 가만히 보니 암호가 걸리지 않은 와이파이로 뜨는 게 하나 있는데 한 칸이 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결하니 연결이 된다!, 띵! 메일이 날아온다. 아! 하면서 탄성이 나온다. 이제 학교까지 안 가도 이메일은 확인하겠다.

 

아직 미국에 온 지 일주일도 채 안 지났는데, 벌써 한 달은 된 것 같이 피곤하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루하루가 궁금하다.

 

미국에 온지 셋째날 내 방.. 웃음 밖에 안나온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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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부터는 사진과 함께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자료가 많이 없어져서 이전 자료에는 사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9년 제대를 한 이후에 American dream을 꿈꾼 뒤 10년이 지난 2009년 6월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여의치 않아 쓰디쓴 소주에 묻어버리길 몇 차례). 맨해튼은 아니지만 NY주의 주도 Albany에서 약 20여분 떨어진 Troy로 가기로 한 것이다. 2003년 석사과정을 하면서 Las Vegas에서 첫 번째 논문 발표 후 뉴욕에서 느낀 그 감정을 공유 드린 바 있다. 그때 뉴저지에서 친구를 만나며 이곳에 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바로 그 꿈을 꾸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욱더 감동이 더 했던 것 같다. 

 

감동적인 순간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었다.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오퍼를 금전적인 이유로 거절을 하고나서 상실감과 그 시점에서 전셋집 주인이 과도하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던 차에 (일부분 홧김에) 집을 사버린 걸 지난 편에서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집을 사고 한 달만에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돌려 이야기를 하자면, 미국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합격증을 받게 될지 몰랐으니,

 

일단 6월 초에 합격증을 받고 이 오퍼를 받겠다는 수락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냈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관련된 비자 처리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여 한국으로 보내준다. 수락 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냄과 동시에 집과 직장에 나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일단 내 그리고 처의 부모님들은 그간의 노력을 알아서 그러셨는지 그러라고 말씀을 해주셨고, 직장에서도 아쉽지만 열심히 해보라며 흔쾌히 응원을 해주셨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한 달 전에 이사한 집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였다. 

 

와이프가 당시 일을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8월 초를 미국 이주 날자로 생각하기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단 내가 먼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고 나머지 집/집기를 정리한 후에 12월에 와이프가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그 집을 전세로 놓고 갔으면 꽤 쏠쏠했겠지만 (한국의 집값 상승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그런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어서 정리를 하기로 했고 우리가 구매했던 그 부동산을 통해서 다시 판매를 하기로 이야기를 먼저 해두었다. 여하튼 큰 정리와 이사는 당분간 와이프가 거주를 해야 하기에 와이프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미국 갈 준비를 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한번 미국으로 들어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하거나 그럴 여유는 없었고, 일단 당해 합격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출국자 모임에 참여하고 그 때 알게 된 친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어떻게 준비할지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RPI의 경우는 출국자 수가 적어서 그때 3명인가 4명인가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 석사과정으로 합격한 한 친구와 12월 와이프가 올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하고 - 이는 일단은 금전적인 이유도 컸고, 내가 미국을 전혀 몰랐기에 미국 생활을 해본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나는 일단 학교에서 보내준 학생비자 관련 서류로 가족 모두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신분을 Clear 하는데 먼저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렀던지 학교 측은 성과 이름을 바꾸어 써와서 대사관에서 서류를 다시 해오라 하여 급하게 학교로 연락해서 새로운 서류를 받아서 비자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 가서 볼 몇 권의 책들과, 당분간 사용할 국제 운전면허증, 그리고 힘겹게 받았던 F1 비자를 몇 가지 준비하는 게 다였다. 나중에 정리를 하겠지만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한데, 지인에게 인사를 전할 시간도 뭔가 영어를 더 공부할 시간도 없었기에 그저 문제없이 미국까지 갈 준비를 하는 게 다였다. 또 하나 준비한 것이 통신수단,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라 한국에서 미리 미국 전화번호를 개통할 수 있는 '힐리오'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핸드폰도 미리 준비를 하였다 (이제는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행기 티켓도 시간이 촉박해서 회사를 통해서 알게된 여행사를 통해서 편도 비행기를 발권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언제 또 오겠냐 싶은 마음에 와이프와 3박 4일 남도 한 바퀴를 돈다. 바빠 죽겠는데 준비는 안 하고 웬 남도 여행을 했냐고 하시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때라도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와야 한다. 큰 가방 두 개에 가서 당분간 입을 옷가지 외에 다른 걸 준비하지 못하고 8월 10일 ICN->ALB까지 내 인생에 새로운 첫 발을 내딧는다. 당시에 델타로 편도를 발권하였는데 그 발권 표를 받았을 때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으로 델타 제일 싼 비행기로 끊으니, ICN->NRT(일본 나리타)->EWR(뉴어크)->ALB(알바니) 일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확인한 것 중에 하나가 당시 대학원 학생회장이었던 윤성호 (지금은 Ph.D. & MD 를 모두 소유한 능력자) 박사에게 미리 연락해서 픽업을 부탁했었다. 그리고 집을 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양 집안 식구가 배웅해 주는 와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나도 함께 눈물 흘릴까 그 자리가 불편해 재빨리 공항 입국장으로 향했다. 2번의 트랫짓이 남아있기에 긴장을 한 상태로 (여기서 긴장은 뭐 놔두고 오는 거 없나?.. 이런).. 그런데 웬걸 첫 번째 나리타 공항에서부터 미국행 비행기가 연착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 EWR에서 ALB로 가는 연결 편이 문제이고,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윤성호 박사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음은 까맣게 잊은 채

 

다행히 무사히 입국심사를 끝내고 뛰어가며 연결 편 비행기를 찾았더니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찌해야 하며 긴 Customer service 줄 뒤에 서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미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당시에는 몰랐지만 미국의 악명 높은 Airline Customer Service)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구나 하며 하루 만에 가슴은 콩닥거리고 좌절의 벽을 느끼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To albany!'라고 하는 것이다. (공항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고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로 갔더니 다행히 연결편도 연착이 되어 오히려 몇 시간을 더 기다려 한밤중에 타야 했다. 그때 불안한 인터넷 연결(당시만 해도 공항에서 인터넷이 아주 불안했다)을 겨우 연결해 성호에게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다.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들어가라.라고 전했다.

 

무거운 짐을 안고 결국 그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얹었고, 어두워 밖이 잘 안 보이는 가운데 드디어 내가 앞으로 생활을 하게 될 Albany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근데 웬걸, 그 친구가 6시간이 넘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연신 그랬더니 윤 박사 왈 "알바니 공항이 인터넷이 잘 돼요.." 하며 웃는 것이다. 그렇게 꼬박 24시간을 넘겨 겨우 생활할 알바니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는 긴 여정 중 첫번째 코스 이제 정말 떠나게 되다니

 

일본 공항에서 기다릴때는 나의 혼란한 마음과 같이 비가 내림 (연착되어서 한없이 기다림)

 

EWR에서 ALB까지 데려다 주었던 프로펠러 비행기 (처음 타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 같은 경우는 합격을 하고 오퍼를 수락하고 나서 무엇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만일 내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영어와 박사과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통계 등의 준비를 더했을 것 같다. 특히 영어의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생활영어와 당장 미국에서 겪게 될 약간의 기본적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 같다. 물론 다 겪으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늦게 가족을 데리고 전혀 미국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이제 정말 외국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도착해서 2주에서 한 달 정도는 굉장히 충격이 큰데, 미국의 생활방식이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가본 적이 없다면 이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종교가 있는 경우에는 한인교회 등에서 제공하는 정착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윤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지금껏 미국 생활의 은인으로 감사해한다. (다시 한번 고맙다 윤 박사!).

 

합격하면 큰 산을 넘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꽤 스릴 있는 예고편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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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유학과는 조금 떨어진 그 당시 즈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나의 경우는 그때가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기였는데, 아마 일반적인 인생의 패턴을 따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것들이 때론 유학을 고민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뤄보기로 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4년 12월에 한국기계연구원에 들어갔을때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29세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구소에 들어오시는 연구원 분들은 대부분 박사를 마치기 때문에 연배가 좀 있는 편이 많은데, 아예 병역특례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원래 어릴 적 꿈이 과학자였는데, 물론 흰가운을 입고 이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소에서 일을 하니 일종의 과학자가 아니던가 - 물론 사회과학자도 과학자이긴 하지만.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주변에서도 그렇고 아주 많이 좋아해 주셨다 특히 부모님의 경우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시골에서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이 취업문턱에서 번번이 좌절을 하던 아들이 우연히 (*지난 편 참조) 석사를 하게 되고 마치자마자 연구소에 들어갔던 것도 그렇지만 연구단지 주변의 좋은 환경이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곳에서 좋은 직장을 얻은 아들이 되었으니 당연히 좋아해 주셨었다. 나도 좋긴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30년을 근무한다는 거지?'라는 생각과 '어릴 적 꿈을 이뤘는데 뭔가 허탈한데?'라는 두 가지 생각이 많았다.

 

아마 가족들은 거기서 평생을 다닐 것으로 생각했고 ('평생직장이긴 하다') 빨리 집을 사서 이제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특별할 것없는 우리네 부모님 들이었다. 그 당시 테크노밸리라고 하는 대단위 단지가 1차, 2차 이렇게 개발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석사 때 선배형이 분양받은 전셋집 (36평)을 싸게 주셔서 혼자서 그 넓은 집에서 살며 일하는 삶도 나쁘진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흡족하셨고 다음 단계를 내심 기대하시지 않으셨던가 싶다. 내 마음속도 일단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았지만, '일단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자리 잡았던 것 같다. 1년 즈음이 지나자 주변의 많은 박사님 들과 나름 자신의 한계를 느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기 시작했고, 2006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일부분 유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스펙을 잘 알기에 미래는 불투명했고, 지금 맡은 일은 망쳐가면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유학을 준비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를 하는 걸 알게 되신 부모님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러냐"며 말씀을 하시고 명절 때 집에 찾아가 피곤해하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바드를 가지 않았겠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이제 정착하고 덜 피곤하게 살았으면 하는 아들이 일 끝나고 공부하며 피곤해하는 모습이 부모님으로 그리 달갑진 않으셨을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을 한참 진행하고 그것들이 마무리 될 무렵,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현, 와이프), 그리고 전 편에서 0.5승이라고 그간의 결과로 첫번째 합격증을 받아 든 순간이 한참 만날 시점이라 나 스스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와이프는 그렇게 노력한 결과인데 가라고 했지만, 금전적 부담과 꿈 그리고 연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와이프나 처가 식구들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랜 유학을 꿈을 접는 모습이 짠해 보이셨던지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혼자와 둘은 유학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실제로 유학을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 (공대 중심이라 주로 남학생 들이었음)의 경우 아주 극심한 외로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겨울의 날씨가 어둡고 우울하고 많은 눈이 내리는 곳에 가게 된다면 더욱더 그러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때 그 친구들이 나를 참 부러워했다. "형은 외롭지는 않으시잖아요" 하면서. 그런데 결혼을 한 후 같이 오게 되면 외로움은 덜하지만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일단은 돈문제, 학교에서 생활비가 1인이 생활할 정도의 생활비가 지원된다. 그리고 한 명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발전하는 유학생의 모습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엄청 노력하지 않는 이상은 그냥 따라온 사람이 되어 그 자괴감이 크다. 아울러 영어도 잘 안되고 친구도 가족도 없이 공부에 바쁜 다른 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길이 맞을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가던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가능하면 날씨 좋은 곳으로 가라'이다. - 나중에 유학생활을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겠다.

 

그렇게 2007년 말 결혼을 하고 결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2차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나중에 와이프는 이 일을 두고 배신감에 부들부들했다며 아직도 놀린다). 이제 가족이 있고 혹시나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금전적인 부분이 더욱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생긴다. 전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차 유학 준비의 결과와 학교 선택에 주요한 요인을 제공한다.

 

   1.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S&T Policy에 펀딩 없이 합격 - GIT는 학교도 아주 좋은뿐더러 이 학교가 위치한 애틀랜타는 도시도 크고 한국 커뮤니티가 미국에서 4번째로 크고, 한국 직항편도 있고, 집 가격도 싼 편이다. 여름에 더운 것만 빼면 아주 좋은 조건

   2.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경영학과 펀딩 $20,000불 합격 - SIT는 GIT에 비해서 학교의 인지도가 떨어지나 위치가 맨해튼이 내려다 보이는 허드슨 강변에 위치해 맨하튼으로의 접근이 용이하고 월가 등의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겠다는 장점이 있으나.. 맨하튼이 내려다 보이는 곳인 만큼 집값이 살벌함

   3.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경영학과 펀딩 $17,000불 합격 - SIT를 고민하면서 결국 수락을 하지 못한 건 살벌한 집값과 생활비 때문이었는데, 이에 비해 뉴욕 주도인 Albany에서 20여분 떨어진 Troy라는 시골(?)에 위치한 학교라 렌트비 (당시 2 베드가 대략 1000불 가량)를 제외하고 약간이 생활비라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을 보태 부부가 살 수도 혹시나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음. 아울러 학교도 SIT처럼 나 역시 처음 들어 봤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 역사가 200년이 조금 안 되는 학교라 왠지 믿음이 갔지만 결국 주요한 요인은 생활이 가능하냐 여부.

 

SIT 합격을 받고 나서 와이프와 둘이 엄청나게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을 하고 논의를 한 끝에 결론은 현재 재정상태면 어렵겠다는 결과를 내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마시며 포기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전셋집 주인 (앞서 이야기한 선배네 집 아님)이 말도 안 되게 전세금을 올려 달라는 바람에 집을 사버리고 말았고, 6월이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무렵 RPI에서 합격자 통지가 왔을 때는 SIT를 고민했던 적이 있던 터라 맨해튼 바로 옆보다 $3,000 불 차이인데 시골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유학을 결정했으나 결혼을 하고 나면 생각할 것이 배로 늘어난다. 나의 나의 부모님이 허락을 하더라도 와이프와 그의 부모님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경우는 그 간의 노력을 아셨기에 아쉬움은 감추지 않으셨지만 반대를 하시진 않으셨다. 결국 결혼하고 집도 사서 이제는 평범하게 여생을 살겠구나 하는 나의 부모님의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고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야 하는 섭섭함은 나가는 날까지 감추지 못하셨다. 연구원에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주셨다. '너, 일도 못했는데 잘되었다'는 반응은 다행히 아니셨고 -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름 일을 열심히 했다 -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그만두는 거니 잘해보라며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셨다. 물론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이제 아주 작디작은 문을 하나 열고 큰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독자들도 느끼시겠지만 이미 지치는 것 같다. 만일 유학을 안 가는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쉽게 백 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가야 한다는 건, 단 한 가지 이기에 이 결정을 하고 수행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나의 경우처럼 가족에 이러한 길을 간 사람이 없어 어떤 길인지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경우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까지 했다면 안 되는 이유만을 나도 모르게 늘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지금 시점에서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잘 한 결정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유학 나오기 직전에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결정이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일단 나는 죽어라 할 테지만 결과가 지금보다 나빠질 수도 있어, 만일 그런 일이 있더라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사실 박사가 끝날 무렵 나의 모습은 이런 호기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그것을 보실 수 있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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