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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차가 끝날 무렵 메일을 하나 받는다. 본인이 현재 포틀랜드에 있는데 RPI 경영학과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며, 당시 싸이월드에 있던 경영학 박사과정 클럽에서 내 연락처를 받고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건물에 한국인이라곤 교수님 두 분을 제외하곤 내가 유일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친구가 학교로 오는 날 Albany 공항에 마중 나가서 오는데 아주 유쾌한 친구였다. 다. 물론 내가 아이가 생기면서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고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1년 차 동기들과 함께 잘 어울리며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랬던지 나보다 훨씬 사회성도 좋고 영어도 잘해 보였다. 부러워), 간혹 나누는 커피 한잔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곤 했는데, 오래는 아니지만 잠시 만나 힘듦을 나누고 서로의 앞날을 파이팅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같은 과에 앞으로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가끔 안주도 변변치 않은 소주 한잔을 나누며, "형, 이제 몇 년만 참고 고생하면 그래도 월급은 제대로 받지 않겠습니까?" 하며 너스레 웃음을 짓는 그 모습에서 나도 많이 힘을 냈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에서 교수님이 된 그 친구는 지금도 가끔 전화 와서 그때 그 소주 한잔을 기억하냐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사실 첫째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하루 종일 집에서 애만 보고 있는 와이프가 안쓰러워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2년 차 수업 듣는 내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려고 소식하고 물도 안 마시고 (참고로 나는 물을 엄청 마신다). 학생들과 하는 점심 혹은 저녁도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고 숙제를 조금 하고 바로 집으로 와서 가족과 시간을 조금 보내고 저녁 8시에 다시 학교로 나와서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하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서는 참 지독하게 힘들었다 싶기도 한데, 예전에 석사 시절 나만의 책상이 있는 게 너무도 좋았어서 집에도 안 가고 책상에서 앉아 있었던 시간과 회사를 다니며 야근 후에도 영어공부를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공부했던 것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에 4~5시간 정도의 잠과 아이를 보며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시간을 쓰는 것 외에 나는 다른 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고, 나도 이 년 차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Dr.Simons와 논문 작업에 들어간다. 당시 교수님은 DataSources라고 하는 전자제품 목록(directory)을 수십 년 치를 일일이 스캔하고 이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NSF 프로젝트), 나는 그중에 일부를 먼저 작업해서 그것을 가지고 졸업논문을 쓰기로 한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데이터는 그 중 하나의 주요한 요소가 된다. 2년 차를 마치면 수업이 없고 전부가 연구학점이 되어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2년 차가 끝나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수업이 없어서 조금 시간에 버퍼가 생기긴 했지만, 전반적 일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략 나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7시 기상 :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시네?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애기가 있는 분들은 아마 아실 것이다. 동이 트면 애가 일어나서 깨운다.'아빠~'

8시 출근 : 데이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노트북으로 하기에는 파일이 너무 크고 이미지 작업이 있어서 교수님이 빌려 쓰고 있는 창문 없는 컴퓨터 실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

8시~4시 : 컴퓨터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데이터 작업 (스캔한 방대한 양의 파일을, Optical Charater Recognition 프로그램을 돌려 digital 화하고, 이를 일일이 눈으로 체크하며 제대로 되었는지 다시 확인)

4시~8시 :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과 육아를 돕고 저녁을 먹고 잠시 쉰다.

8시~1시 : 데이터 작업을 제외한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시간

1시~7시 : 피곤함에 잠들었지만, 2~3시간마다 깨는 아이를 돌아가면서 일어나서 다시 재움

 

하다 하다 안되어 아이가 목을 가누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자, 옷방에 작은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울면 돌아가면서 한 명씩 그 방으로 가서 애를 다시 재우기로 한다. 적어도 그러면 다른 한 명은 계속 잘 수 있으니까. 어느 날은 인기척이 나서 눈을 떴더니 깜깜한 복도를 가로질러 이 녀석이 기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이야!

 

여하튼 그렇게 3년 차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이 3년차와 4년차는 첫 1~2년차와는 달리 뭔가 스스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진도도 안나가는 듯하여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괴롭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제 곧 졸업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다. 사실 잡마켓에는 졸업시점에서 일년정도 일찍 나가서 시작하는데, 즉 4년차가 끝나는 여름에 졸업을 염두해 두고 있으면 (물론 그것은 지도교수의 마음이겠지만), 3년차 두번째 학기인,  봄부터 잡마켓에 나가서 원서를 쓰고 지원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 이것은 나중에 자세히 써보도록 하겠다.

 

아이도 있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을 떨어져 가고 학교에서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학교에서 지원받는 Stipend는 한 사람 정도 겨우 살 정도이다) 도저히 5년 차를 버티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진도는 안나가고 답답한 마음이 이 가득했다. 그때 즈음 부터인가 와이프가 "통 잠을 제대로 못자네"하면서 자다가 소리도 지르고 괴로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컸다. 이 사정을 지도교수님께 설명을 했고 학교에서도 5년차 펀딩에 대해서 (원래는 4년 계약) 불확실하다며 누구도 확답을 해줄 수 없었기에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참 논문을 쓰고 있는 3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바로 잡마켓에 나가보기로 한다. 지금에서는 정말 무모했던 것 같은데 그 당시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님도 "네 사정은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1년 정도 더 준비하는 게 더 좋은 학교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막지는 않으셨지만 아쉬운 마음을 내비쳐 주셨다. 어쨌든 그렇게 지금까지 정리된 CV와 Cover Letter를 쓰고 함께 논문을 썼던 몇몇 교수님들께 추천인이 되어 주시라 부탁을 드렸다. 이 부분은 다 지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경영대에는 몇 명 앉을 만한 박사과정 라운지가 있다 (물론 5명 정도만 앉을 정도로). 그런데 일부러 여기보다는 교수님들 방이 있는 층에 컴퓨터가 몇 대 놓인 오픈공간이 있었는데 초기 2년 동안 매일 그 자리에 앉아서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했었다. 그 이유는 '나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봐주세요'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이 먹혔던지 교수님들은 흔쾌히 나의 추천인이 되어주시겠다 말씀을 해주셨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드린 CV와 Cover Letter를 앉아서 일일이 수정해 주셨고, 나가시면서 나에게 "Good luck"하셨다. 그래서 데이터 작업을 하다가 지칠 때면 AOM의 Career center,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웹사이트를 돌며 내가 갈만한 학교들을 뽑아서 list up 하였다. 사실 뭐 고를 정신이 없었다. 그냥 분야가 맞고 내가 노릴 만한 학교면 일단 list up을 해두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학생 신분이고 Research를 열심히 할 때라 마음적으로는 Research School을 원했지만 Teaching과 Balance가 된 스쿨도 함께 넣었다. (이 부분은 별도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AOM 학회에 참여해서 Career Center를 통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Job Market을 진행하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된 채 시작한 나는 이미 그 기간을 놓치고 시작을 한 것이다. 

 

* 보통의 경영학 박사과정생 들은 AOM의 Career Center를 통해 봄에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Job posting이 올라온 학교에 지원을 하게 된다. 그러면 8월 초에 있는 AOM 학회를 통해 인터뷰를 하고 첫 번째 스크리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이 AOM 학회를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즉, 졸업하기 일 년 반 정도 전부터 미리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4년 차에 취업과 졸업을 한다는 것은 2년 차가 끝나는 봄학기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앞서 이야기했지만 2년 동안 대부분 수업을 듣는 게 전부라 논문이 진행되기 만무하고 실적이 5년 차, 6년 차 학생들에 비해서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는 5년차가 제일 많고 top school의 경우는 6년차 이상 되는 학생들이 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준비가 섣부르게 시작은 했는데 사실 지원하는 시점이 되면 그런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 않고 마치 어딘가는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8월에 AOM 학회의 인터뷰 타이밍을 놓치고, 3년 차 1학기(가을)부터 두 번째 라운드*부터 시작을 한 것이다. 

 

* AOM을 통해 인터뷰를 하지 않는 학교들이 가을에 deadline이 많이 있는 경우가 있고, 그래도 못 뽑을 경우 겨울에 세 번째 라운드가 돌긴 한다. 명시적인 시기는 아니지만 AOM으로부터 시작하는 타이밍상 대략 유사한 기간에 Job posting 많이 뜨거나 Deadline이 몰리는 경향을 보인다. 어차피 뽑는 학교 입장에서도 3월까지는 확정을 해야지 서류 작업 등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스트레스틑 커져만 가고 몸은 지쳐만 갈 무렵, 오랜만에 경영대 건물 (컴퓨터 작업은 별도의 컴퓨터 실에서)에서 지금은 Babson에 계시는 Dr.O'Connor교수님을 만났다. 1년 차일 때 잠시 그 교수님과 일을 하다가 진행이 잘 안되어 흐지부지 된 적이 있는데 정량적 연구를 주로 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Innovation 쪽으로 꽤 이름이 있는 교수님이었고, 나 역시 합격자 발표를 받고 교수님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이 분을 지도교수로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그 분과 잠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차 저차 해서 잡마켓에 나간다고 하니 그 교수님이 갑자기 "I got a job for you"하시는 것이다. 나도 갑자기 반짝반짝하며 물어보니, 당시 교수님이 덴마크의 DTU (Danish Technical University)와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데 Assistant Professor in Innovation Management를 뽑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심이 있으면 이력서를 보내보라고 하신다.

 

알고 보니 Denmark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 Danish 능력을 보기도 하고 사실 쉽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일단 아무것도 몰랐다.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와 티칭 경력을 좀 더 쌓고 경제적인 부분도 좀더 해결한 후에 다시 다른 나라로 노려봐도 될 것 같기도 했고, 일단 지금 같으면 독이든 사과도 단숨에 먹어버릴 기세라 정리된 CV를 보내드렸더니 위의 포지션은 이미 선발이 끝났다고 하시며 다만, 다른 쪽에 나와 맞는 연구분야에 포닥 자리가 있는데 가을에 방문하겠냐며 연락이 왔다. 당연히 YES!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인터뷰 경험도 많이 하면 할수록 느는 것 같다).

 

그렇게 2012년 10월에 방문 일정을 잡고 일정은 대략 30분 정도의 미니 연구 세미나와 해당 포지션에 대한 Q&A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Albany->Newark->Brussel->Denmark / Denmark->Stockholm->Newark->Albany로 돌아오는 복잡한 일정이었다. (항상 제일 싼 티켓을 구한다. 비행기 값을 지원해 준다 하더라도). 10월 10일에 출발을 하는데 Albany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기상 문제로 비행기가 1시간 30분 딜레이가 된다고 한다. Connection 간 시간이 여유가 많지 않았는데, 이거 출발도 못하고 메일을 써서 못 간다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할 무렵 갑작스레 탑승 Announcement가 나온다. Connection 시간이 워낙 짧아 긴가민가 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기장님이 Albany에서 Newark까지 비행기간을 최대한 당겨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진짜 30분 만에 도착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50분). 두 번째 비행기를 뛰다시피 달려서 Final boarding call이 울릴 무렵 겨우 비행기에 탑승을 했는데 거기서 벨기에 까지는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난생처음 덴마크에 도착. 덴마크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깔끔했고 아담했다 (공항에서부터) 그러고 물어물어 호텔에 도착, 당시에 감정이 페북 포스팅에 그대로 담겨있다.

 

"찬바람이 느껴진다. 갑자기 나는 왜 이리 먼 곳까지 오게 된 건가 생각이 든다. 몇 시간 눈을 감았다 뜨며, 지난 밤새 연습하고 또 고치고 하다 한잔 코피에 몸과 주린 배를 채운다. 미국의 거대하고 화려한 부는 아니지만, 초행길에 길을 물어보니 자못 당황하면서, 카운터를 돌아 나와 유창하지는 않지만 성의를 다해 길을 알려주는 빵집 아가씨에서 뭔가 소박하지만 가득 찬 정을 느낀다. 마치 오래전 지나가는 나그네에 개 물 한잔 줄 수 있는요유로 움. 우리가 발전해 나가면서 놓지는 건 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늦가을 문턱의 찬바람에 모르는 길이지만 버스보다는 걸으며 학교에 찾아가 봐야겠다" (Facebook, Oct/12/2012).

 

어떻게 잠이 든 건지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새벽에 눈이 반들반들 떠졌다. 처음 인터뷰니 당연할 것이다. 오는 비행기에서 수십 번이나 연습한 슬라이드를 다시 한번 또 보고 연습한다. 일부러 조금 일찍 호텔을 나서 학교를 향한다. 생각보다 영어가 잘 안 통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나섰더니 아담한 학교가 나타났고 날씨도 꽤나 좋았다. 담당 교수를 만나려고 기다리면서 브로슈어를 보니 KAIST와 함께 연계도 하고 꽤나 유명한 학교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학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면접은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는데 아침시간이라 햄과 빵, 치즈 등이 테이블이 있었고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한쪽 화면에서 발표를 진행하였다.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질문을 하셨고 잘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대답했다.

 

연구발표가 끝나자 학교에 대해서 궁금한 게 없냐고 물어봐서 포지션과 학교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특별히 리서치를 따지는 형태의 압박면접은 아니었고 편안한 상태에서 질문을 주고받았다. 약 40분간의 면접이 끝날 무렵, "이제 계획은 뭐냐?"라고 물어주셨는데 "발표 준비를 하고 학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별다른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캠퍼스를 좀 둘러보겠다"라고 답변하니 "너 운이 좋아서 날씨가 좋으니 시내 구경을 가보라"라고 담당 교수가 말씀을 해주시면서, 중국계 교수와 함께 점심을 하는 기회를 주셨다 아무래도 동양인으로서 낯선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는 이야기 나눠보라는 배려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데, 결론적으로 DTU의 연봉은 그리 높지 않고 물가는 높아서 혼자 벌어서는 살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 그 교수님은 덴마크인과 결혼하여 함께 생활중이었는데 아이는 없고 둘이 같이 벌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더군다나 아이까지 있으니 아무리 복지가 좋다지만 삶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덴마크어도 배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말이다. 

 

그 분과 헤어지고 정말 좋은 날씨에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사실은 한국식당을 찾으러 나섰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주소를 찾아갔는데 한식당이 없어졌다. 밖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어 그만 포기하고 맥도널드를 찾아 먹는다 (사실 덴마크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도시에 대한 느낌은 참 좋고 예뻤는데 일단 삶이 너무나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을 보는 교수님들도 아마 나의 그런 느낌을 눈치채셨으리라 생각이 든다. 결국 그곳과는 좋은 인연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캠퍼스 비짓과 인터뷰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진 빠지는 인터뷰는 이제 시작이었으니...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덴마크의 여명
그날 따라 아침 햇살이 참 좋았는데, 담쟁이 덩쿨이 예뻤던
햇살을 바라보며 잘되어라 했던
면접을 봤던 빌딩
면접을 마치고 시내 구경 (사실 한식당을 찾아서)
백과사전에서만 보던 인어공주 상 (생각보다 작았다)
덴마크 궁
덴마크의 시그너쳐 뉘하운 운하 (정말 예뼜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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