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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를 계기로 가장 크게 타격을 맞은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대학이지 싶다. 한국도 마찬 가지겠지만 미국 대학의 경우 COVID19 자체도 그러하지만, 이를 계기로 트럼프 정부의 유학생에 대한 정책 변화 등으로 상당히 고통스러운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아마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그 여파가 지속되리라고 본다. 

 

물론 비지니스 스쿨의 일부 프로그램 (MBA)의 경우는 오히려 지원자가 느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기가 나쁘면 나쁠수록 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긴 하다. 더군다나 COVID19으로 인해서 온라인 수업의 확대 등으로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수업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www.wsj.com/articles/applicants-flock-to-elite-business-schools-to-ride-out-the-coronavirus-pandemic-11601409456)

 

다행히 내가 있는 Salisbury University는 유학생 수가 적고, 지역에서 터줏대감(?) 같은 역할을 하는 터라 약간의 영향이 있긴 했지만, 다른 학교의 아주 horrible 한 소식들에 비해서는 얌전히 이 난관을 겪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앞으로 오랜 기간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내가 2017년 임용이 된 뒤로 계속적으로 노교수님들이 은퇴를 하고 있고, 그 자리를 새로운 교원들로 자리를 메우고 있다. 올 때만 해도 과 전체에 약 20여 명의 교수 중에 나 혼자 한국 사람이었는데 (중국계 1명, 인도계 1명, 나머지 다 미국인), 이제는 한국 교수님이 과에만 해도 나를 포함해 4명이 되어 다수가 되어 버렸다. (다수가 되어 버린 ㅎ)

 

그렇게 지속해서 일종의 물갈이가 되고 있는데, 어려운 COVID19 상황에서도 신규 임용을 추진하는 몇 안 되는 학교 중에 하나였고, 그 중에 실제로 Candidate를 캠퍼스로 직접 불러서 인터뷰하는 정말 몇 안되는 학교 중에 하나였다. 최근 Campus visit(임용 과정 중에 제일 마지막 과정)을 오는 지원자들을 보면 '참 잘한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자극을 받는 건 항상 행복하면서 두려운 일이긴 하다.

 

이번 주 내내 3명의 Candidate이  Campus visit을 하였고, 하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직접 발표도 듣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봤는데... 모든 지원자가 그러하지 않겠지만, 대부분 약간이라도 직장경험을 가지다가 Academia로 온 사람이 많았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발표를 들어 보면, 연구 주제의 선정에서부터 수업에서도 굉장히 실무적인 방법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 온 지원자의 경우는 본인이 직접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박사과정에서부터 수업에서 실제 프로젝트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어서 이제는 박사과정생들이 연구뿐만 아니라 (물론 연구 주제를 현업에서 가져오는 경우도 많이 있다) 수업에서도 실제 프로젝트를 접목하는 노력을 많이 한다는 느낌을 받아 상당히 신선했다. 

 

개인적으로도 바로 연구자가 되기보다는 약간이라도 경험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것을 일부러 그렇게 한건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약간 detour한 나의 경험은 연구뿐만 아니라 수업이 아주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말이 좋아 Project-based teaching이지만, 이를 위해서 교수는 Teacher 이전에 Project manager의 롤을 해야 한다. (그 외에 학교 서비스와 연구를 제외하더라도) 그것이 사실 쉽지 않은 일이고, 기업 입장에서도 시간과 돈, 데이터를 공유해 가면서 불확실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도전해봤었고, 사실 한국에서는 Service에 대한 명확한 Scope definition이 불분명하고 이러한 컨설팅 서비스에 대해서 그냥 돈 낭비라고 (많은 경우 그냥 학교랑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아니면 지인의 부탁이니 없는 샘 치고 하는) 참여하다 보니, 이러한 프로젝트에서는 Client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가 주요한 관건인데 '나는 바쁘니 그리고 내가 돈을 내었으니 알아서 결과만 다오' 하는 식의 접근법이 많다. 어떤 분들은 학생팀을 막내 직원 부리듯 잡히는 단순 일을 던져주는 경우도 보았다. 2년 동안 그 중간 역할이 너무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는데 결론은 좋은 프로젝트/컨설팅 결과를 위해서는 갑과 을 모두의 교육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 인건비가 워낙 비싸기도 하고, 법적 문제가 항상 귀결되다 보니 Project의 Scope이 명확한 편이고 기업들의 참여 또한 적극적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학생들의 수준이 높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만 커뮤니티에서 함께 교육하고 결과도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 적이 많았다. 그들이 부담하는 비용 또한 적지 않은 편이기도 하고,

 

오늘 지원자의 발표와 수업 방식에 대한 설명을 묻고 답하며, 앞으로는 이러한 실질적인 교육이 더욱더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것이 지금 사회가 가지고 있는 대학의 불신을 없앨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보면, 연구 또한 실제로 활용이 가능한 연구가 많이 될 것이고 실제로 이를 활용하는 모습을 본다면 더욱더 만족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지방대의 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대학 교육이 어떻게 변해갈지 몸담고 있는 나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일 것이고 그것이 무엇 일지에 대한 고민을 앞으로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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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인 Peloton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이 글을 쓰는 현재는 2020년 11월 9일로 필자의 아이들이 COVID19을 뚫고 9개월 만에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이다 (부모로서 참으로 역설적인 날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부모들에게 여유를 주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COVID19의 확진자수가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시기라 불안함 또한 감출 수가 없다). 그런 연유로 멋진 가을날 차를 정비를 맡겨 놓고 오랜만에 여유를 부려 본다.

 

오늘은 이러한 COVID19 상황의 가장 수혜 받은 기업 중에 하나인 Peloton은 현재 시총 32조의 회사가 되었다. 이는 오늘 시점에서 한국 전체 시총의 10위인 카카오(약 32조)와 같은 기업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Fitness 기업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기업이 되었을까?

 

John Foley

(https://www.forbes.com/sites/bizcarson/2019/09/11/pelotons-ipo-pricing-john-foley-not-a-billionaire/?sh=25fef1d520da)

 

다음화에서는 Peloton의 Co-Founder인 John Foley의 개고생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전에 먼저 현재 한국의 10번째 기업과 기업가치가 같은 Peloton의 시작을 알아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이 아이디어를 만든 John Foley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John은 어떠한 사람인가?

 

John Foley는 미국 플로리다의 Keys라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Key West이자 필자가 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인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주부였던 어머니와, Delta의 Pilot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가정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 US News and World Report에서 나오는 "Best Schools for your money" 분야에 있던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조지아텍)에서 산업공학(Industrial engieering)을 전공했다고 한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 어렸을 때부터, Macdonarld's, PizzaHut 등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대학에 가면서 Co-op 프로그램에 참여해 3개월을 일하여 돈을 벌어 나머지 3개월 학비를 대었다고 하며, (*이 글에서 제대로 Co-op  프로그램의 원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경험'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하지만 미국의 경우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 등록금을 댄다). 그는 이때 Texas의 Waco의 M&M/Mars 공장에서 캔디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제조업에서 벗어나 Citysearch를 거쳐(LA로 거쳐를 옮김), Harvard MBA 이후, B&G Music에 잠시 들어갔으나 (Napster의 등장으로 Department가 없어짐). 이후, Company builder인 IAC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여러 회사의 임시 대표를 하면서 여러 스타트업을 성장시킨다 (i.e., ticketmaster & ebites). 이후 Barnes & Nobles로 자리를 옮겨 ebook device인 Nook을 담당하게 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조업의 경험에서부터 B&N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본인이 원하는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변에 어떠한 영향을 받기보다,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점차 자신도 모르는 Assets이 쌓이게 되고 이러한 경험과 더불어 Startup의 생태계를 접하면서(IAC) '나도 언젠간?'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B&N에서 Amazon의 Kindle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로 처참하게 깨진 Nook project를 담당하면서 어쩌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잇는 기술 플랫폼의 고민이 Peloton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뉴욕에서 Spinning이 유행을 하고 있었고, 그전에 LA에서 살면서 몇 번 해보긴 했지만 실감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는 차에 자신의 와이프가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몇 자리 없는 Spinning Class의 자리를 맡는 모습을 보고 (자신은 늦게까지 일어나서 한 번도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훌륭한 Instructor들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면? 여기에서부터 32조 기업 Peloton이 시작이 된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지만, 전통적 공학이 아닌 Industrial engineering을 전공을 하고, 자신이 생각했을 때 이러한 큰 기업에서 했던 경험들이 스타트업을 하는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현실을 정반대였다고 한다. VC나 Angel investor 들에게는 이러한 스타트업이 아닌 경험과 비 전통적 공학 경험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경험을 했다고 하니 3년 동안 천 번이 넘는 Angel investor를 만나고, 400번이 넘는 Pitching에서 단 한 푼도 투자받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화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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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단어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헬스장이나 Gym이라는 말로 쓰이는 것 같은데, 글을 시작하다 보니 헬스장이라는 한국식의 표현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 것 같아서 선택한 단어임.

 

사실 펠로톤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호기롭게 던져 놓은지, 벌써 석달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연초의 매일 쓰겠다는 그 호기로움은 어디 갔냐고 독자들께서 호되게 질타를 하실 것 같다. 그렇다... 귀찮았다.

 

귀차니즘의 인문학적 토대는 생각보다 대단히 넓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누군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자면 꿈꾸고 싶다'라는 게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위에 계신 조상님들도 이 말씀을 하시며, 동굴에서 사냥은 안 하고 낮잠 늘어지게 자지 않았을까 싶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간 거냐)

 

그렇다! 교수가 되면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인 여름방학을 맞아, 그동안 코로나로 지치고 갇혀 있었던 갑갑함의 발로라 핑계를 대고 싶다. 그러면서 바닷가를 나가 온몸을 잔뜩 태운채 바다낚시와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여전히 핑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냥 여유를 가진 김에 푹 여유를 가져버렸다. 솔직하게 고백을 하고 시작한다.

 

사실 그와 더불어, 사람들이 왜 헬스장이라는 것을 만들었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 사실 어디서부터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 점도 있었다. 사실 원초적 이유라면 헬스장이라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 미에 관심을 가졌어야 할 테고 (사실 미술은 잘 모르지만, 그 미를 남기기 위해 인물화를 그리지 않았겠는가 싶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보릿고개 등 예전에 생산성이 지극히 낮을 때야 몸을 가꿀 여력이 없이 그저 여기저기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헬스장이라는 것에 대한 필요조차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헬스장은 적어도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해 보이는데, 1) 먹을 것이 그나마 풍족할 것 (그래야 뚱뚱해지니), 2) 사람이 육체적 미에 관심을 가질 것, 이라는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같은 조건을 가진 (먹을 것이 풍족해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고 그렇게 자신의 몸과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부터 멀지 않은 시간에 헬스장이 생겼으리라 생각을 했고,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운동경기가 국가 간 자존심 대결 양상을 보이며 Elite 체육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이러한 헬스장 (Fitness industry)이 공공에서부터 민간으로 점차 파급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조금 다른 형태인데, 첫 번째 헬스장이라고 하는 것이 주로 일반 시민들의 운동을 위한 욕구를 충족해 주는 반면, 후자인 Gym(체육관)은 전문적인 운동선수를 체계적으로 기르기 위한 접근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터넷을 조금 검색을 해보니, Gym(체육관)이라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 대로 그리스어인 Gymnasium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전문 운동선수를 교육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시설로 보면 되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는 운동경기에 따라 꼭 실내일 필요는 없다. Wikipedia의 역사에 따르면 (en.wikipedia.org/wiki/Gym) 최초로 기록된 체육관은 약 3000년 전 고대 페르시아에 Zurkhaneh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여기는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아마 백과사전을 좀 유심히 읽었던 분이라면 (혹은 역사책을) 한 번 즘은 보았을 로마의 대형 목욕탕이 이러한 체육 시설과 함께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설에는 모자이크로 운동 챔피언을 꾸며놓았다는데 - 사실 요즘 목욕탕 시설과 다를 바가 없다. ㅎㅎㅎ)

 

독일에서는 1811년에 Friedrich Jan이 야외 체육관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미국에 들어가 1827년 Maine에 Jahn 모형을 따다가 만들었다고 한다. 최초의 실내 체육관은 1852년에 Adolph Spiess가 Hesse에 지었다고 한다. 이후 Turner movement*의 일환으로 1848년부터 체육시설을 지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YMCA를 중심으로 체육시설이 확충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Turner movement는 독일의 문화와 체육문화, 정치, 노동운동 등을 전파하기 위한 운동.

 

Fitness center로 검색해보면, 최초의 Public Gym은 1847년에 파리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최초의 public health club은 194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정의에 따라 애매할 수 있어, 무엇이 먼저다 딱히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조각조각의 사실을 모아볼 때 일단 문화와 교육혁명의 일환으로 체육 교육이 소개가 되고 체계화가 되면서 체육관 시설이 생기고 이것이 Turner movement와 같은 통로로 전세계에 전파되었으며, 이들이 전문화가 되면서 헬스장으로 발전한 패턴으로 보인다.

 

종합해 볼때 19세기 중반 정도에 운동에 대한 전문적인 시설들이 시작되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19세기는 대략 어떤 시기일까. 1808년 나폴레옹 전쟁,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시작하여 19세기에 전 세계를 바꾸어 놓았던 시기라는 것이다. 이전 봉건제가 해체가 되고 이전보다 좀 더 자유로운 형태의 농민층 및 노동자 계층이 나타남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 등으로 자본 역시 확보가 되는 시기이다. 즉, 앞서 전제했던 먹고살만하고 자신의 미에 신경을 쓸 수 있을 만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럼 Fashion 산업은 언제부터였을까 찾아보니 이 시기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본격적 Fashion 산업의 시작이 18세기에 프랑스 왕족 (왕비의 드레스 메이커)과 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Charles Frederick Worth(1825-1905)가 최초의 근대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대략 19세기에 이 패션 산업의 성장이 함께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옷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 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터인데, 이 당시는 미술에서도 격변의 시대라 불린다고 한다.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미술 또한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고 혹은 미치며, 다양한 사조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크게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상징주의 등의 다양한 사조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고 한다. 미술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고 거의 문외한에 가까워 이를 논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다양한 형태의 미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펠로톤 이야기를 쓴다면서, 헬스장의 역사, 체육관의 역사, 하다 보니 패션디자인의 시작과 미술사조에 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너무 많이 와버린 것 같다. 사람의 미에 대한 탐구와 욕망은 사실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오랜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이.. Fitness industry가 아닌가 싶다. 다음 편에서는 fitness industry에 집중하는 걸로.....

 

역시 펠로톤에 대한 글은 펠로톤을 막 탄 이후에 써야 제 맛! (내 최애 trainer, Matt Wil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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