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학회활동

 

박사를 지원하기 전에 연구라는 것을 나름 흉내는 내봤던 적이 있어서, 약간의 데이터를 들고 있었기에 1년 차에 Dr.Abetti 교수와 연구하나를 출판할 수 있었고, 첫 해에 냈다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많은 연구였다. 학기를 더해 가면서 자신만의 연구에 대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아마 이때가 가장 활발히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부족하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학기가 아닐까 한다. 특히 1년 차 말 Qualifying exam을 통과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논문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데, 수업도 이에 발맞추어 각 분야별로 맞는 수업을 교수님들께 들을 수 있다. 

 

3학기 들은 수업들;

- Strategic Management of Technology Innovation

- Empirial Issues in Management Research

- Seminar in Innovation Management and Entrepreneurship

- Data Analysis for Doctoral Student

 

다만, 3학기에 접어든다고 영어가 나아지는 건 결코 아니고,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전공분야가 깊어지고 그에 심도깊은 논문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더욱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논문이 점점 포커스가 되어 좋을 것도 같지만, 부족한 영어는 한층 나를 괴롭게 한다. 여전히 논문 하나를 소화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1년 차 봄학기 (두 번째 학기) 때 들은 IT & Organization Design 박사 세미나 텀페이퍼를 냈던 논문을 교수님께서 함께 발전시켜 HICSS라는 하와이에서 하는 학회에 제출하자고 하셨고 봄학기가 끝나고 얼마 후 제출을 하여 결국 Accept을 받게 되어 2011년 1월에 첫 학회를 참석하게 된다. 박사과정은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약간의 Conference 참여 비용을 지원해 주는데 RPI의 경우는 $500불 정도로 기억한다. 동부에서 하와이까지는 비행기 비용, 호텔 비용, 학회 등록비 하면 그 돈으로 부족했는데 교수님께서 $1,000불을 지원해 주시고 나머지는 내가 부담해서 참석하기로 하였다. 난생처음 가보는 하와이였는데, 첫 째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떠나야 해서 어떻게 보내고 왔는지는 가물할 정도이다. 다만 그간의 스트레스는 약간 날려버릴 수 있긴 했는데, 이 학회의 경우는 좀 특이했던 게 발표하러 양복을 입고 갔더니 나만 양복을 입고 온 것이다 (다들 하와이 특유의 반바지에 꽃 프린트 티를 입고 오셨다). 이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발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에서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당시 시간날때 Lost 드라마를 종종 봤는데, 마치 Lost의 한장면 같았던
한겨울에 하와이에서 학회를
조용한 바다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산책을
하와이에서 돌아오자마자 동네가 얼어붙었다. 영하 30도 (진짜 코가 어는듯한 추위)

그즈음부터 경영학 분야에 박사과정을 하는 학생들이면 아마 비슷한 조언을 받겠지만, 2년 차가 되는 시점부터 해서 교수님들이 AOM(Academy of Management)에 멤버가 되어 리뷰어로 참여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이는 AOM annual meeting에 제출하는 논문의 수가 어머어마하여 이를 심사할 리뷰어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리뷰어로 참여하는 3개 정도까지 최신의 논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리뷰를 하면서 또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년 AOM은 겨울에 논문을 제출하여 8월 초에 학회가 진행되고 전 세계에서 참여하는 가장 큰 학회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부분 경영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참여를 하고 특히 북미에 있는 사람은 웬만하면 참여하는 학회이다.

 

HICSS에 발표했던 논문과 마찬가지로 1학년 2번째 학기인 봄학기 때 들었던 Seminar in Organzation Theory 박사 세미나에서 한국기업의 지배구조와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논문 (Kim, Kim, Lee 2009 Organization Science)을 접하게 되고, 그 논문을 그대로 replicate 하기로 한다 (기존에 출판된 좋은 논문을 그대로 따라가 보는 것은 데이터 처리나 방법론 학습에 아주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한국기업의 데이터를 구해 그 논문과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데 그다음 한 학기의 대부분을 써버렸다. (데이터셋이 똑같지 않아 같은 결과는 아니었음). 이왕 데이터가 모이고 결과를 돌려본 김에 AOM에 논문을 제출해보기로 한다. 

 

첫째가 태어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쓴 논문을 보며 눈물겹게 한줄한줄을 더해가며 마무리했는데, 리뷰어들이 잘 봐줘서 그런지 혼자서 작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Accept을 해줘서 2011년 여름 불같이 뜨거운 한여름에 San Antonio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세션에는 많은 분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세션 체어 분이 지금은 기억을 못 하는 교수님이었는데, 처음 발표이며, 박사과정 2년 차라고 하자, "열심히 했네"하시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분들에게서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AOM은 학회가 너무 커서 사실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기보다는 네트워크의 효과가 크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Recuiting도 이 학회에서 주로 이루어지니 안 찾을 수가 없긴 하다. AOM 이후 나는 AOM(전미 학회) + EAOM(동부지역 AOM)이나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 등 지역이나 분야에 특화된 학회를 함께 참였는데, 이런 특화된 곳으로 가면 사람 수가 적어서 보다 긴밀한 관계와 논문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West Coast Research Symposium은 박사과정이 지원할 경우 교통비 일부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AOM이나 WCRS 등 각 학회에서는 Doctoral student workshop 같은 게 있는데 박사과정이 성공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서 논문의 최신 흐름이나 주요 저널들의 에디터가 나와서 어떤 부분을 조심하면 되는지, 그리고 초기 교수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고, 또한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다만, 학회 때 reception이나 networking dinner가 있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자리이긴 하나, 영어가 짧고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도 못하며 낯도 많이 가리는 나는 좌절의 연속인 자리였다. 거기서 유명 교수님을 사이에 두고 박사과정들의 치열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자체도 진 빠지는 일이거니와 정말 똑똑한 친구들이 많은데 여기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동기부여와 좌절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이 자리는 익숙지가 않다). 

특히 서로 대화를 하는데 뻘쭘이 서 있다가, 끼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몰라, 지도교수님(미국분)께 물어봤더니.

 

"아, 그건 미국 사람도 어려운 일이야. 다만 일단 그 사람들 서클 옆에서 서있다가 한 발을 내딛으면 그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 줄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중 누군가가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을 할 것이야.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아주 간단히 말씀해 주셨지만,

 

실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대화를 하고, 못하는 영어로 끼어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니 언제쯤이야 영화에서 보듯 자연스레 와인 한잔을 들고 그 대화의 무리 안에 들어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다만, 거의 말년 차가 다가오자 나도 급했던지, 내가 원하는 학교의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말을 던지는 무리수(?)를 뒀던걸 생각하면 맞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식구가 늘었지만, 함께 학회를 가기로 첫째의 첫 비행기 (앞으로도 비행기는 지겹게 탐)
라구아디어 공항에서 바라본 맨하튼
저녁 7시가 넘어서 도착했지만, 온도는 아직 105도..
너무 더웠던 San Antonio, TX
WCRS가 열렸던 University of Washington, 학교가 참 예뻤다.
UW 의 business School.
Networking Dinner가 열렸던 Seattle의 상징 Space Needle.

지도교수 선정

사실 한국, 미국을 막론하고 박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지도교수이다. 한국에 많은 언론에서 지도교수의 갑질이 뉴스에 종종 나오는 걸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지도교수의 영향력은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막강하다. 생활은 물론이고 졸업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졸업 요건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 한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석사/박사 과정에 대한 졸업 요건이 있다. 영어점수 얼마 이상, 그리고 SSCI 논문 2편 이상 등등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정해진 기준이 있다 (물론 그 기준은 학교에 따라 다르다). 석사를 한국에서 하고 미국으로 온터라 그 부분을 모르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그런 졸업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좋지만은 않은 게 다른 말로 하자면, 지도교수 마음이라는 거다. 지도교수가 생각하기에 아 이 친구의 졸업논문은 졸업할 만하다고 판단된다고 생각이 들어야 하기에 그만큼 주관적이고 그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선에서 엄청나게 동떨어진 기준은 아니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를 한 바가 있지만, 공대의 경우 펀딩 등의 문제로 지도교수를 미리 선정하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문 사회계열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RPI의 경우도 Qualifying exam이 지나면 지도교수를 서서히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1년 차 2학기, 2년 차 1학기 정도에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본인이 원하는 연구분야를 선택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받는다. 본인이 박사과정 이전에 학문분야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아는 경우는 이 접근법이 의미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접근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2년차 첫 학기가 되자 그동안 들었던 수업과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을 바탕으로 지도교수가 되실 몇 분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다. 전략하는 분과 IS(Information System), 그리고 산업생태학을 전공하는 분이었다. 많은 부분을 고민을 했는데, 일단은 경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고, 아무래도 좋은 곳에 논문을 많이 출간하신 분, 그리고 수업을 들으면서 내 핏에 맞다고 생각이 되는 분, 아울러 나의 경우는 가족과 아이가 있는 관계로 그것을 조금 이해해 주실 만한 분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생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하나둘 지도교수를 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빨리 학회 논문을 발전시키면서 다행히 몇 분의 교수님들과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는 동안 어떤 교수님이 나와 맞을지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사실 생뚱맞게 경제학과에 계시는 Kenneth L. Simons 교수님께 찾아가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했다. 이 교수님은 방법론 수업을 하셨었고, 첫 학기 때 내가 1등을 했던 수업을 가르치셨던 분이었다. 아울러 여름방학 때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학은 여름에는 계약이 안되어 있음 = 월급이 없음) 본인이 NSF를 통해서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셨는데 그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여름 인건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나는 이 분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와 대략의 연구분야를 알 수 있었고, Disruptive innovation에 대해 연구해보자는 교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맞아서 선택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분이 경제학과 교수님이시고 (경영학과에도 일부 소속하셨으나 주는 경제학과였음) 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이 분을 선택했다고 하자, 박사 코디네이터였던 교수님이 좀 마땅치 않아하셨던 것 같다. 아무래도 경영학과에도 교수가 많은데 왜 경제학과 교수를 선택했냐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까지 그분을 고민했던 것은 경제학과 교수님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Job을 잡을 때 아무래도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로 가시는 학회가 경제학회 이셨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경영학 주요 탑 저널에도 출판을 하시기도 하여서 경제학 중심은 또 아니시기도 했다. (사실 중간 즈음?)

 

그래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제일 가깝고, 그 교수님이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고, 방법론에 뛰어나셔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나중에 그 교수님을 선택했다고 와이프에게 이야기하니 "아! 그분 되게 엄격하실 것 같은데.." 하면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고, 다들 의외의 선택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지금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친절히 Open door policy로 언제든지 찾아가면 앉아서 몇 시간이든 시간을 보내주셨고 (이메일 연락은 잘 안되지만, 오피스에 주로 계셨음), 논문을 써가면 일일이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수정해 주셨다. 본인이 나중에 Jobs을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시며, 이력서, Cover letter 쓰는 것도 하나하나 봐주시기도 하셨다. 아울러 나중에 졸업 시점이 되자 일 년 더 준비를 해서 제대로 잡마켓에 나가길 원하셨는데 (사실 대부분의 교수님이 그러하다), 나는 경제적 상황도 그렇고 일 년을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그걸 이해해 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고맙기 그지없으신 분이라. 나중에 UNIST에 임용되고 난 후 미국 출장 나올 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뵜었고, 한 번은 과제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으로 초대를 드렸다. 사실 지도교수, 박사과정 학생이라고 해서 한국처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고 4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은 박승호 연구원이 돌아갈 때 저녁 한번, 그리고 내가 졸업 디펜스를 하고 박사가 된 후에 점심 한번 이렇게 두 번 식사를 하였으니 그분도 나도 어지간히 관계가 사무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한국으로 오셔서 서울에서부터 카이스트에서 강연하시고 (석사 때 지도교수님이 초대해 주심) 그리고 울산에 오셔서 UNIST에서 특강도 해주시고 내 학생/다른 교수님과도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 경주 불국사를 구경시켜 드렸는데, 불국사가 참 좋았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연락이 뜸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연락을 한번 드려야겠다 싶다. 

 

그렇게 2년 차가 마무리되고,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UNIST에서 학부생/대학원생 들과 다과를 들면서 자신의 연구자 인생을 공유해주셨다.
사진을 찾으려고 생각해 보니 교수님과 찍은 사진도 한장 제대로 없네. 이건 한국에서 출국하실때 함께

 

반응형
반응형

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참 사이가 좋았고 서로 도움이 많았던 동기들은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

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엠블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가족이 재 결합을 하니 불안하지만 뭔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첫 학기가 마무리되고 두 번째 학기는 조금 더 심화된 방법론과 본격적으로 전공분야에 관련된 논문을 세미나 형태로 읽기 시작한다. 수업은 여전히 4개 Doctoral Research Method II, Strategic Management Theory Seminar, IT and Organization Design PhD, 그리고  Seminar in Organization Theory PhD. 이렇게 네 과목을 듣게 되었다. 영어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더 이상 영어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2010년 봄학기는 전략, Information system, 조직 이론의 과목들에서 주로 매주 최근 관련된 토픽의 논문 4~5개를 읽고 교수와 함께 토론하는 수업 형식이다. RPI의 경우는 크게 재무와 경영 두 개가 있어 1년 차 2학기부터 바로 절반에 가까운 동기들이 나누어졌다. 그래서 교수 1명과 5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는 방식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법론을 제외하고 3과목을 4~5개 논문을 읽어서 summary를 하고 critique을 하는 것이다. 매주 12개 논문이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한 개의 논문을 보면 그 논문에서 틀이된 이론이 있는데 일단 이 이론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린다. (이래서 공부도 하던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에 논문 하나를 정리하는데도 버겁다. 

 

예전 블로그 글을 보니 2010년 1월 25일에 학기 시작! 이라고 쓰고 이틀 뒤에 포스팅에서 이렇게 써놨다.

"

바야흐로,
끝내주게,
힘들구만,

^_^;;

"

단지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아마 이때 힘들게 느꼈던 것은 논문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 주가 되는 이론들에 대해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니 이를 다른 책을 뒤져보고, 무슨 말인지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리뷰 페이퍼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어진 하나의 논문을 위해서 몇 배나 되는 책과 논문을 뒤져봐야 하는 상황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 가설을 읽어 보고, 나는 어떤 가설을 세울 수 있을지 경험에 비추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고 그걸 정리한 다음, 데이터와 방법론 섹션으로 넘어간다. 일단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힘든데 그래서 방법론 수업을 듣는 것이다. 그래도 수업에서 듣는 거랑 실제 논문에서 쓰는 거랑은 제법 차이가 있어서 거기서 또 많은 시간을 쓰고, 그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고 결과를 도출했는지 읽어 본다. 그리고 결론과 토론 부분을 읽는다. 전체를 읽고 다시 조금 정리를 한다. 이런 사이클을 돌다 보면 하나의 페이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틀이 넘기도 했다 (배경 지식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힘들긴 했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고, 첫 학기에는 전반적인 내용을 커버하는 반면에 두 번째 수업에서는 각 분야별로 포커스 된 논문을 읽다 보니 아! 하는 부분도 많이 있고, 그걸 비평하다 보면 이런저런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친다. 어쩌다 보면 스스로 '아! 대박'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조금 더 찾아보면 누군가가 하고 있긴 하다).

 

팁으로 읽은 논문들을 기록해 놓는 노트를 하나 마련하면 좋다. 그리고 각 논문을 도식화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논문이 인과관계를 구명하기에 도식화가 가능해진다. *경영 분야의 경우), 방법론과 측정방법 그리고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면 도움이 된다. 또한, 이를 측정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한데 데이터를 어디서 구했고 그 데이터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정리해 놓으면 도움이 된다. (물론 나도 생각은 했는데 꾸준히 하기 쉽지가 않다).

 

스스로의 상상이겠지만, 자신만의 지식이 아주 크게 성장하는 것 같고 나 스스로도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기 때문에, 참 행복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을 실제로 테스트하고 작성을 하려고 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아이디어 내는 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각 세미나 수업에서는 학기말 페이퍼를 요구하는데 실제로 자신만의 논문을 써보는 것이다. 데이터는 당장 구하기 힘드니 데이터 부분을 제외하고. 그 와중에 IT 세미나 수업에는 예전 연구소 때 설문조사했던 자료가 하나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교수와 이야기를 하였고 고 Ravichandran 교수님이 HICSS (Hawaii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ystem Sciences) 학회에 내보라고 해서 내었는데 결국 2학기가 조금 지나고 다행히 accept을 받았다. 이렇게 이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신의 텀페이퍼를 발전시켜서 자신의 논문 타픽을 정하기도 하고, 이때 대략 지도 교수님도 대략 선정을 하게 된다. 

 

커피와 함께 쌓여있는 읽어야할 논문들

2 학기가 끝나면 (1년 차가) Microeconomics와 Research Method 두 과목으로 Qualifying Exam을 치게 하는데 이게 엄청 스트레스이다. 물론 열심히 하면 된다지만, 시험 범위가 뭐 전체 이런 형식이라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에 그냥 무작정 처음부터 보고, 또 보고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박사과정의 경우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이렇게 매년 Filtering을 하는 시험 혹은 연차 페이퍼를 쓰게 한다. 그게 지식의 습득을 확인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듣기에는 박사과정이 긴 과정이기 때문에 맞지 않으면 빨리 나가서 다른 길을 모색하라는 의미에 서라는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은 바 있다. 생각해보라 고시에도 장수생들이 있는데 박사과정도 능력이 안되어 막연히 질질 끌 수는 없는 일이니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RPI에 있을 때는 Qualifying Exam으로 1차를 거르고, 2차는 field exam이라고 해서 교수님이 대략 30~40개 정도 되는 논문/책을 주고 이것을 읽고 관련된 자신만의 페이퍼를 발전시키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고통스럽다).

 

학교마다 이 절차를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어서 듣기로는 매년 50% 정도를 탈락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학교 선정을 하실 때 이런 학교의 분위기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 중에 이 Qual이 안되어 한국에 돌아가신 분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어드미션 포스팅을 할 때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만, 그 뒤에는 엄청 큰 산이 있다는 것이다. 입학한다고 다 졸업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내 개략적 생각에 입학에서 졸업까지 성공적으로 되는 경우가 60%가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험을 위해서 여름 방학 내내 아침에 일어나 도서관에 가고 와이프가 싸주는 도시락 까먹으면서 공부하고 저녁에 잠시 들어와 저녁 먹고 휴식을 취하다 다시 학교로 가서 자정이 넘게 까지 저 두 과목을 풀고 또 푸는 과정을 거쳤다. 뭐 다행히 시험은 패스했지만, 동기 중에 한 친구는 패스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다행히(?) 내치지는 않았고 방법론을 처음부터 다시 듣게 하여 결국에는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학교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아는 학교만의 분위기인데, 직장인에 가족을 데리고 목숨 걸고 오는 분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통 Qual에서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학교에 다시 지원해서 박사과정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학교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시험을 일주일 앞둔 포스팅에서 그 심정을 엿볼 수 있어서 가져와 본다.

 

"퀄이 이번 주로 다가왔다
며칠 동안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뭔가 허전한 이 기분은
인생을 살면서 기백 번은 더쳤을 시험에도 더 심해져만 간다
아마 조금은 부담감 때문일 런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머리는 멍 몸은 축 쳐져 있다
간신히 오늘 수업 준비를 끝내고 조금 널브러져 있기로 한다"

 

1년차를 마치고 Qualifying exam 치기 전에 동기들 모여서 함께 식사 (시험 전이라 얼굴들이 밝네)

정말 공부 이야기밖에 없네요.. 진짜 공부 열심히 하셨겠어요! 하시겠지만,

다음 편에는 이제 노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반응형
반응형

* 이번 편부터는 사진과 함께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자료가 많이 없어져서 이전 자료에는 사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9년 제대를 한 이후에 American dream을 꿈꾼 뒤 10년이 지난 2009년 6월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여의치 않아 쓰디쓴 소주에 묻어버리길 몇 차례). 맨해튼은 아니지만 NY주의 주도 Albany에서 약 20여분 떨어진 Troy로 가기로 한 것이다. 2003년 석사과정을 하면서 Las Vegas에서 첫 번째 논문 발표 후 뉴욕에서 느낀 그 감정을 공유 드린 바 있다. 그때 뉴저지에서 친구를 만나며 이곳에 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바로 그 꿈을 꾸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욱더 감동이 더 했던 것 같다. 

 

감동적인 순간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었다.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오퍼를 금전적인 이유로 거절을 하고나서 상실감과 그 시점에서 전셋집 주인이 과도하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던 차에 (일부분 홧김에) 집을 사버린 걸 지난 편에서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집을 사고 한 달만에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돌려 이야기를 하자면, 미국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합격증을 받게 될지 몰랐으니,

 

일단 6월 초에 합격증을 받고 이 오퍼를 받겠다는 수락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냈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관련된 비자 처리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여 한국으로 보내준다. 수락 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냄과 동시에 집과 직장에 나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일단 내 그리고 처의 부모님들은 그간의 노력을 알아서 그러셨는지 그러라고 말씀을 해주셨고, 직장에서도 아쉽지만 열심히 해보라며 흔쾌히 응원을 해주셨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한 달 전에 이사한 집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였다. 

 

와이프가 당시 일을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8월 초를 미국 이주 날자로 생각하기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단 내가 먼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고 나머지 집/집기를 정리한 후에 12월에 와이프가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그 집을 전세로 놓고 갔으면 꽤 쏠쏠했겠지만 (한국의 집값 상승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그런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어서 정리를 하기로 했고 우리가 구매했던 그 부동산을 통해서 다시 판매를 하기로 이야기를 먼저 해두었다. 여하튼 큰 정리와 이사는 당분간 와이프가 거주를 해야 하기에 와이프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미국 갈 준비를 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한번 미국으로 들어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하거나 그럴 여유는 없었고, 일단 당해 합격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출국자 모임에 참여하고 그 때 알게 된 친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어떻게 준비할지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RPI의 경우는 출국자 수가 적어서 그때 3명인가 4명인가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 석사과정으로 합격한 한 친구와 12월 와이프가 올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하고 - 이는 일단은 금전적인 이유도 컸고, 내가 미국을 전혀 몰랐기에 미국 생활을 해본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나는 일단 학교에서 보내준 학생비자 관련 서류로 가족 모두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신분을 Clear 하는데 먼저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렀던지 학교 측은 성과 이름을 바꾸어 써와서 대사관에서 서류를 다시 해오라 하여 급하게 학교로 연락해서 새로운 서류를 받아서 비자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 가서 볼 몇 권의 책들과, 당분간 사용할 국제 운전면허증, 그리고 힘겹게 받았던 F1 비자를 몇 가지 준비하는 게 다였다. 나중에 정리를 하겠지만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한데, 지인에게 인사를 전할 시간도 뭔가 영어를 더 공부할 시간도 없었기에 그저 문제없이 미국까지 갈 준비를 하는 게 다였다. 또 하나 준비한 것이 통신수단,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라 한국에서 미리 미국 전화번호를 개통할 수 있는 '힐리오'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핸드폰도 미리 준비를 하였다 (이제는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행기 티켓도 시간이 촉박해서 회사를 통해서 알게된 여행사를 통해서 편도 비행기를 발권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언제 또 오겠냐 싶은 마음에 와이프와 3박 4일 남도 한 바퀴를 돈다. 바빠 죽겠는데 준비는 안 하고 웬 남도 여행을 했냐고 하시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때라도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와야 한다. 큰 가방 두 개에 가서 당분간 입을 옷가지 외에 다른 걸 준비하지 못하고 8월 10일 ICN->ALB까지 내 인생에 새로운 첫 발을 내딧는다. 당시에 델타로 편도를 발권하였는데 그 발권 표를 받았을 때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으로 델타 제일 싼 비행기로 끊으니, ICN->NRT(일본 나리타)->EWR(뉴어크)->ALB(알바니) 일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확인한 것 중에 하나가 당시 대학원 학생회장이었던 윤성호 (지금은 Ph.D. & MD 를 모두 소유한 능력자) 박사에게 미리 연락해서 픽업을 부탁했었다. 그리고 집을 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양 집안 식구가 배웅해 주는 와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나도 함께 눈물 흘릴까 그 자리가 불편해 재빨리 공항 입국장으로 향했다. 2번의 트랫짓이 남아있기에 긴장을 한 상태로 (여기서 긴장은 뭐 놔두고 오는 거 없나?.. 이런).. 그런데 웬걸 첫 번째 나리타 공항에서부터 미국행 비행기가 연착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 EWR에서 ALB로 가는 연결 편이 문제이고,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윤성호 박사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음은 까맣게 잊은 채

 

다행히 무사히 입국심사를 끝내고 뛰어가며 연결 편 비행기를 찾았더니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찌해야 하며 긴 Customer service 줄 뒤에 서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미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당시에는 몰랐지만 미국의 악명 높은 Airline Customer Service)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구나 하며 하루 만에 가슴은 콩닥거리고 좌절의 벽을 느끼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To albany!'라고 하는 것이다. (공항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고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로 갔더니 다행히 연결편도 연착이 되어 오히려 몇 시간을 더 기다려 한밤중에 타야 했다. 그때 불안한 인터넷 연결(당시만 해도 공항에서 인터넷이 아주 불안했다)을 겨우 연결해 성호에게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다.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들어가라.라고 전했다.

 

무거운 짐을 안고 결국 그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얹었고, 어두워 밖이 잘 안 보이는 가운데 드디어 내가 앞으로 생활을 하게 될 Albany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근데 웬걸, 그 친구가 6시간이 넘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연신 그랬더니 윤 박사 왈 "알바니 공항이 인터넷이 잘 돼요.." 하며 웃는 것이다. 그렇게 꼬박 24시간을 넘겨 겨우 생활할 알바니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는 긴 여정 중 첫번째 코스 이제 정말 떠나게 되다니

 

일본 공항에서 기다릴때는 나의 혼란한 마음과 같이 비가 내림 (연착되어서 한없이 기다림)

 

EWR에서 ALB까지 데려다 주었던 프로펠러 비행기 (처음 타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 같은 경우는 합격을 하고 오퍼를 수락하고 나서 무엇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만일 내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영어와 박사과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통계 등의 준비를 더했을 것 같다. 특히 영어의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생활영어와 당장 미국에서 겪게 될 약간의 기본적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 같다. 물론 다 겪으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늦게 가족을 데리고 전혀 미국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이제 정말 외국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도착해서 2주에서 한 달 정도는 굉장히 충격이 큰데, 미국의 생활방식이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가본 적이 없다면 이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종교가 있는 경우에는 한인교회 등에서 제공하는 정착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윤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지금껏 미국 생활의 은인으로 감사해한다. (다시 한번 고맙다 윤 박사!).

 

합격하면 큰 산을 넘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꽤 스릴 있는 예고편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반응형
반응형

이번 편에서는 유학과는 조금 떨어진 그 당시 즈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나의 경우는 그때가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기였는데, 아마 일반적인 인생의 패턴을 따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것들이 때론 유학을 고민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뤄보기로 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4년 12월에 한국기계연구원에 들어갔을때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29세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구소에 들어오시는 연구원 분들은 대부분 박사를 마치기 때문에 연배가 좀 있는 편이 많은데, 아예 병역특례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원래 어릴 적 꿈이 과학자였는데, 물론 흰가운을 입고 이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소에서 일을 하니 일종의 과학자가 아니던가 - 물론 사회과학자도 과학자이긴 하지만.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주변에서도 그렇고 아주 많이 좋아해 주셨다 특히 부모님의 경우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시골에서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이 취업문턱에서 번번이 좌절을 하던 아들이 우연히 (*지난 편 참조) 석사를 하게 되고 마치자마자 연구소에 들어갔던 것도 그렇지만 연구단지 주변의 좋은 환경이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곳에서 좋은 직장을 얻은 아들이 되었으니 당연히 좋아해 주셨었다. 나도 좋긴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30년을 근무한다는 거지?'라는 생각과 '어릴 적 꿈을 이뤘는데 뭔가 허탈한데?'라는 두 가지 생각이 많았다.

 

아마 가족들은 거기서 평생을 다닐 것으로 생각했고 ('평생직장이긴 하다') 빨리 집을 사서 이제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특별할 것없는 우리네 부모님 들이었다. 그 당시 테크노밸리라고 하는 대단위 단지가 1차, 2차 이렇게 개발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석사 때 선배형이 분양받은 전셋집 (36평)을 싸게 주셔서 혼자서 그 넓은 집에서 살며 일하는 삶도 나쁘진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흡족하셨고 다음 단계를 내심 기대하시지 않으셨던가 싶다. 내 마음속도 일단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았지만, '일단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자리 잡았던 것 같다. 1년 즈음이 지나자 주변의 많은 박사님 들과 나름 자신의 한계를 느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기 시작했고, 2006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일부분 유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스펙을 잘 알기에 미래는 불투명했고, 지금 맡은 일은 망쳐가면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유학을 준비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를 하는 걸 알게 되신 부모님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러냐"며 말씀을 하시고 명절 때 집에 찾아가 피곤해하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바드를 가지 않았겠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이제 정착하고 덜 피곤하게 살았으면 하는 아들이 일 끝나고 공부하며 피곤해하는 모습이 부모님으로 그리 달갑진 않으셨을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을 한참 진행하고 그것들이 마무리 될 무렵,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현, 와이프), 그리고 전 편에서 0.5승이라고 그간의 결과로 첫번째 합격증을 받아 든 순간이 한참 만날 시점이라 나 스스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와이프는 그렇게 노력한 결과인데 가라고 했지만, 금전적 부담과 꿈 그리고 연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와이프나 처가 식구들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랜 유학을 꿈을 접는 모습이 짠해 보이셨던지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혼자와 둘은 유학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실제로 유학을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 (공대 중심이라 주로 남학생 들이었음)의 경우 아주 극심한 외로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겨울의 날씨가 어둡고 우울하고 많은 눈이 내리는 곳에 가게 된다면 더욱더 그러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때 그 친구들이 나를 참 부러워했다. "형은 외롭지는 않으시잖아요" 하면서. 그런데 결혼을 한 후 같이 오게 되면 외로움은 덜하지만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일단은 돈문제, 학교에서 생활비가 1인이 생활할 정도의 생활비가 지원된다. 그리고 한 명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발전하는 유학생의 모습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엄청 노력하지 않는 이상은 그냥 따라온 사람이 되어 그 자괴감이 크다. 아울러 영어도 잘 안되고 친구도 가족도 없이 공부에 바쁜 다른 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길이 맞을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가던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가능하면 날씨 좋은 곳으로 가라'이다. - 나중에 유학생활을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겠다.

 

그렇게 2007년 말 결혼을 하고 결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2차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나중에 와이프는 이 일을 두고 배신감에 부들부들했다며 아직도 놀린다). 이제 가족이 있고 혹시나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금전적인 부분이 더욱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생긴다. 전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차 유학 준비의 결과와 학교 선택에 주요한 요인을 제공한다.

 

   1.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S&T Policy에 펀딩 없이 합격 - GIT는 학교도 아주 좋은뿐더러 이 학교가 위치한 애틀랜타는 도시도 크고 한국 커뮤니티가 미국에서 4번째로 크고, 한국 직항편도 있고, 집 가격도 싼 편이다. 여름에 더운 것만 빼면 아주 좋은 조건

   2.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경영학과 펀딩 $20,000불 합격 - SIT는 GIT에 비해서 학교의 인지도가 떨어지나 위치가 맨해튼이 내려다 보이는 허드슨 강변에 위치해 맨하튼으로의 접근이 용이하고 월가 등의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겠다는 장점이 있으나.. 맨하튼이 내려다 보이는 곳인 만큼 집값이 살벌함

   3.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경영학과 펀딩 $17,000불 합격 - SIT를 고민하면서 결국 수락을 하지 못한 건 살벌한 집값과 생활비 때문이었는데, 이에 비해 뉴욕 주도인 Albany에서 20여분 떨어진 Troy라는 시골(?)에 위치한 학교라 렌트비 (당시 2 베드가 대략 1000불 가량)를 제외하고 약간이 생활비라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을 보태 부부가 살 수도 혹시나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음. 아울러 학교도 SIT처럼 나 역시 처음 들어 봤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 역사가 200년이 조금 안 되는 학교라 왠지 믿음이 갔지만 결국 주요한 요인은 생활이 가능하냐 여부.

 

SIT 합격을 받고 나서 와이프와 둘이 엄청나게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을 하고 논의를 한 끝에 결론은 현재 재정상태면 어렵겠다는 결과를 내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마시며 포기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전셋집 주인 (앞서 이야기한 선배네 집 아님)이 말도 안 되게 전세금을 올려 달라는 바람에 집을 사버리고 말았고, 6월이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무렵 RPI에서 합격자 통지가 왔을 때는 SIT를 고민했던 적이 있던 터라 맨해튼 바로 옆보다 $3,000 불 차이인데 시골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유학을 결정했으나 결혼을 하고 나면 생각할 것이 배로 늘어난다. 나의 나의 부모님이 허락을 하더라도 와이프와 그의 부모님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경우는 그 간의 노력을 아셨기에 아쉬움은 감추지 않으셨지만 반대를 하시진 않으셨다. 결국 결혼하고 집도 사서 이제는 평범하게 여생을 살겠구나 하는 나의 부모님의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고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야 하는 섭섭함은 나가는 날까지 감추지 못하셨다. 연구원에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주셨다. '너, 일도 못했는데 잘되었다'는 반응은 다행히 아니셨고 -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름 일을 열심히 했다 -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그만두는 거니 잘해보라며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셨다. 물론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이제 아주 작디작은 문을 하나 열고 큰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독자들도 느끼시겠지만 이미 지치는 것 같다. 만일 유학을 안 가는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쉽게 백 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가야 한다는 건, 단 한 가지 이기에 이 결정을 하고 수행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나의 경우처럼 가족에 이러한 길을 간 사람이 없어 어떤 길인지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경우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까지 했다면 안 되는 이유만을 나도 모르게 늘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지금 시점에서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잘 한 결정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유학 나오기 직전에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결정이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일단 나는 죽어라 할 테지만 결과가 지금보다 나빠질 수도 있어, 만일 그런 일이 있더라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사실 박사가 끝날 무렵 나의 모습은 이런 호기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그것을 보실 수 있으시리라.

반응형
반응형

하나의 Decade가 또 끝이 나는 시점이다. 어른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정말 정신없이 또 10년이 지나간 것 같다. 긴 인생을 보자면 가장 중요한 시간을 열정적 그리고 Dyanmic 하게 보낸 10년이 아닌가 싶다. 물론 누구에게나 모든 시점이 다 그러하겠지만,

 

2010년 10여년의 꿈이었던 미국대학에서의 공부가 2009년 그간 좋은기억 나쁜기억이 많았던 회사생활을 접어들고 불확실성 가득한 도전의 시점이었으나 이때만 해도 그저 마냥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다 연말에 첫째딸이 태어나면서 새로운 인생 버전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2011년 한 딸아이의 초보아빠로써 좌충우돌, 허둥지둥 했던 것 같다. 거기에다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의 어려움, 부족한 영어에 대한 아쉬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함, 경제적 타이트함 등이 점점 목을 조여왔던 것 같다. 무엇인가 여유를 찾기 보다는 모든것이 숨을 조여오는 듯 한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2012년 박사과정 3년차 아마도 압박감이 점차 커와 그때 부터인가 잠을 제대로 못잔 것 같다. 항상 소리를 지르며 잠을 잔다고 했고, 스스로도 악몽을 많이 꾸었던 것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내년에 끝내야한다는 부담감, 그러나 마음만 조급하고 결과는 나오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마음은 급하고 그런 해였던 것 같다. 그때 와이프가 많이 힘이되어 준 것 같다.

 

2013년 그래도 인생이 기회는 주는지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5월에 UNIST에서 잡 오퍼를 받은 전화를 받고 멍하니 지난 꿈같았던 그간의 날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8월에 무사히 박사디펜스를 마치고 지도 교수님 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Congratulation Dr. Gang" 하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털썩 그자리에 앉아서 많은 후배들/동기들이 축하한다고 등을 두드려 줬던 것 같다. 그 이후 초짜 선생으로의 첫 학기가 떠오르며, 아직도 그 첫 수업 끝날때 찍었던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2014년 이때부터 UNIST에서 창업교육센터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우한균 교수님과 좌충우돌 하면서 하나하나 헤쳐나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식했고, 그 무식함이 용감함으로 바뀌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배우고 읍소하면 하나하나 만들어 갔던 것 같다. 연말 즈음에 제대로 된 첫번째 논문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그래도 학자로써 명함은 내밀 수 있겠구나 안도했던 한해였던 것 같다. 

 

2015년 초 배기홍 대표님을 Eugene Noh 로부터 소개를 받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도해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클래스 101이 나왔던 우연치고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연출되어 결론적으로 봤을때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의미있는 시도였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둘째놈이 태어나 기쁨과 부담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2016년 우한균 교수님이 하시던 센터를 넘겨 받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배기홍 대표님 덕분에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고, 나 스스로도 관련하여 많은 네트워크를 쌓고 공부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이 즈음부터인가 과연 내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같고, 정말 이 분야에서 아는게 없구나 하는 자각을 하면서 미래를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인생에서 큰 전환을 하기로 하고 다행히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의 학교에서 잡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2017년 미국으로 결정하고 UNIST의 정든 삶을 정리하고 Salisbury University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지금에 와서 느낌이지만, 이 때의 도전이 얼마나 무모했던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다시 돌아온 미국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적응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첫 학기 후에 그 절망감은 거대했으며 한 일주일은 잠을 설칠정도로 괴로웠었다.

 

2018년 미국에서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드는데 가족 모두 노력을 기울였고, 쉽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하나둘 적응하기 시작했던 한 해 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간 노력들의 결과들이 2017년부터 결과로 나오기 시작해서 2018년 계속해서 논문이 출판 되었고, 수업도 점차 안정되는 느낌... 

 

2019년 한국에서 정신없었던 삶의 패턴과는 다른 삶의 형태에 적응이 되며 '조강의 4cents'팟캐스트를 2월부터 시작해서 많은 분들의 인생 이야기, 도전 이야기를 듣고 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내 스스로 한단계 발전을 위한 현재 위치를 영점조정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는 Associate Chair를 맡아서 학생들과 조금더 소통하며 미국 대학생들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을 조금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정말 임팩트 있는 일들이 많았던 지난 10년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변화 (태평양을 두번 건너는 이사)와 두 아이들의 탄생, 박사과정 학생에서, 한국교수 그리고 지금 미국교수로의 변화... 이 모든 것을 함께 이해해주고 지원해준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내 인생의 또다른 10년... 특별한 계획이 있는건 아니지만, 물론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내가 또 맞이할 또다른 그 10년이 기다려진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