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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은 학교마다의 문화적/절차적 차이가 있어서 일반화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한국의 학교와 미국의 학교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고 차이를 논하기는 문제가 있으나, 겪은 바에 따라 이야기를 해보겠다.

 

한국에 있을 때는 초기 3년인가 (벌써 가물가물하다)는 평가가 면제가 되어 결국 나는 마지막 1년에 대한 평가를 받고 두번째 평가를 받기 위한 실적요청을 할 때 즈음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실질적인 한번의 평가결과를 받은 적이 있는데, 사실 어떠한 기준으로 어떻게 순위를 매기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건 사실이다. 아마도, 평가 대상자가 실적을 내면 그걸 본부 인사에서 평가를 해서 등급을 매겨 결과를 알려주는 방식이고, 특별히 어떤면이 어떻게 해서 이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아무래도 공대 중심의 학교이다 보니 공대 교수님들과 사회과학을 하는 우리는 비교대상이 좀 아니긴 한데, 느낌상 대략 출판된 논문과 (학회 참석 등은 아예 안들어가는 듯), 연구과제 수주금액이 평가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강의 평가는 어떠한 식으로 반영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연구중심의 대학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박사과정 전에 기계연구원에 다닐때도 해당년도 동안 한 일들을 정리해서 인사과로 제출을 하면 해당 고과(ABCD)로 구분하여 결과를 받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왜 그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의 두 기관에서는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공공기관) 인센티브의 차등지급 목적이 대부분이지 실제 어떠한 것을 잘 수행했고, 어떠한 것이 부족한 지에 대해 알 수는 없고 평가를 받아들면 그걸로 끝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한국에서 평가를 설명하는 것은 미국에 와서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SU는 매년 겨울에 학과장(Chair) 평가를 받고, 매년 가을에 학장(Dean) 평가를 받는다. 즉 피평가자 입장에서는 6개월 사이클로 평가를 받는데 생각보다 자주 받는 느낌이 든다. 학과장 평가는 지난 일년동안 어땠는지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고, 학장 평가는 Progress toward tenure evaluation이라고 해서 tenure-track에 있는 교수들이 tenure를 받기 위해 잘하고 있는지를 전반적으로 평가한다. (Tenure이후에는 학장 평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학과장 평가만 있는 듯 하다).

 

Faculty는 공통적으로 Teaching, Research, and Service의 3가지 큰 틀에서 평가를 받게 되는데, 어제 진행항 평가는 내가 제출한 그동안의 정량적/정성적 성과표를 바탕으로 chair가 평가를 하여 함께 리뷰를 하는 절차인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정량적인 결과를 제외하고 정성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각 분야별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고, 어떠한 곳에 시간을 많이 썼는지를 Narrative로 써서 강조를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결과만 제출한 경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과정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술을 통한 어필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나름 평가는 큰 일인데, 처음 Chair평가를 받을 때 어느날 불쑥 들어와 "너 오늘 나랑 평가하자"라길래 순간적으로 잔뜩 쫄았으나, 한국에서 많이 일어난것 처럼 뭔가를 '까'려고 하는것보다는 지금까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특히 'junior' faculty로써 문제점은 없는지 어떤면에서 함께 발전시킬만한 부분이 있는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Chair는 내가 제출한 정량적/정성적 성과표를 바탕으로 미리 평가표를 작성한다. 각 분야별로 매우잘함 부터 매우못함 까지 5 단계 스케일로 된 평가를 하고 그 뒤에 정성적인 커멘트를 달아 평가표를 만들고 그 평가표를 나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약 30여분 난상토론 하는 형태로 진행하였다. teaching의 경우, 학생들의 강의평가는 물론, 강의 준비를 위해서 내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기술하는데, 주목할만한 부분은 '수업을 얼마나 개선하였는지?'도 하나의 주요한 평가 항목이었다. 학교의 특성 때문일수도 있으나 이 점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Research의 경우에는 당연히 출판된 논문이 주가 되고, 이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한국의 경우 publish된 것만 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논문뿐만 아니라 학회발표/활동, work-in-progress에 대한 것도 실적으로 인정해 준다. 한국에 비해서 더 다양한 면을 살펴 보는 것 같다. 마지막 Service의 경우는 학교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작성하고, 심지어 졸업식/입학식 등의 참석도 작성하고 고려한다. Chair는 이 평가결과를 보여주고 나에게 이의가 없는지 물어본 다음 자신의 커멘트를 읽어보라고 하고, 더 추가할 것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나에게는 마치 '네가 혹시 빼먹고 안쓴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 해주렴' 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리고 난 다음에 혹시 미흡한 분야가 있다면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Department에서 어떠한 도움을 줄지를 물어는 점이었다. 만일 Teaching의 평가가 부족하다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학교에 어떠한 교육관련 프로그램이 있는지, 학과에서는 어떠한 도움을 줄 지 물어보고, Research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래도 Teaching과  Research가 큰 두 가지 요소라 혹시 두 가지가 다 부족하다면 Service의 부담을 덜어주고 Teaching과 Research에 중점을 둘 수 있게 Chair 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Dean과 하는 Progress toward tenure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이 평가를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지난 일년동안 한 일을 마찬가지로 정리해서 각 Department마다 있는 Promotion and Tenure Committee에서 먼저 심사를 한다. 이 평가 위원회는 정년보장을 받은 (Tenured) 교수님들이 참여하여 Tenure-track (아직 테뉴어 심사를 받지 못한 교수들)에 있는 교수를 평가한다. 이들의 평가 결과를 서면으로 Chair에게 제출을 한다. 이 평가 결과도 마찬가지로 공유가 되는데 위에서 언급한 3가지 분야에 대해서 보다 심도깊은 평가와 발전시켜야 할 것들에 대한 피드백을 준다. Chair는 이를 보고 다시 자신의 의견을 달아 Dean에게 제출하는데 이 평가에서도 마찬가지고 이 결과를 가지고 Dean, Chair,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서 앉아서 토론을 또 한다. 그럼 Dean은 성공적인 Tenure를 받기 위해서 Dean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을 물어본다. 그러면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대략 내가 어디즈음 있는지 알게 된다. Chair 평가결과는 5단계 스케일에 표시가 된 반면, Dean과 하는 평가는 주로 정성적인 결과를 가지고 진행한다.

 

이러한 평가 사이클을 두번째 돌다보니, 한국에 비해서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렇게 자주 평가를 하고 리뷰 시간을 갖는 것은 tenure-track faculty로써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만 어쨌든) tenure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중간점검을 하는 절차인 것이고, 예를들어서 research가 tenure를 받기에 부족할 것 같으면 매년 그 정도를 평가하고 일의 경중을 조절해 주어 tenure를 받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라고 했다. 즉 나중에 6년차때 tenure를 평가를 하게 되는데 "Surprise!! (i.e., 너짤렸어!)"를 없게 하기 위함이고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절차인 것이다. 실제로 tenure system을 도입중인 많은 학교에서 년차 평가를 통해서 direction을 잡아주는걸로 알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사권을 각 school별로 가지고 있고 본부에서는 각 school별로 진행하는 평가절차를 믿고 이를 승인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게 맞는것 같은게 각 학문별로 특성이 너무 다른데 비 전공자가 전공자의 평가를 한다는 것이 사실 말이 안된다.

 

한국의 경우 물론 역사가 길고 체계가 적립된 학교의 경우는 아마도 저런 시스템을 따를 것 같지만, 사실 년차평가가 위에서 일괄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고 그 결정에 대해서 함께 앉아서 논의를 한다거나 그를 바탕으로 주어진 일에 대해서 함께 조정을 한다는지 등의 절차를 기대하기 어렵다. 수업/연구 말고도 해야할 service일들이 많기 때문에 사실 본연의 임무(수업/연구)가 소홀히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tenure 등의 주요한 인사권도 각 school보다는 본부에서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그러한 조정 (있다 하더라도)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centralization vs decentralization의 장단점은 있지만 대학교가 다양한 학문을 다루고 각 학문별로 주어진 상황이 다른데 본부에서 일괄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거나 인사를 하는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좀 더 나아가 보자면 미국의 경우 같은 교수라 하더라도 admin과 일반 교수의 선이 명확한 편이다. 그래서 행정을 담당하는 본부와 faculty senate 사이에서 서로의 견제가 작동하는 편인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편이기도 하다.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한국의 대학들은 그 경쟁력을 많이 잃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는 외부에서의 평가보다는 학생들과 교수들 (내부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구를 강조하는 많은 학교들 앞으로 중국/미국의 학교들과의 경쟁력이 있을지 돌이켜 봐야할 것 같고 (연구비의 투자나 효율성 차원에서), 연구에 약점이 있는 학교들의 경우 과연 교육의 질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살펴봐야할 것 같다. 어느 교수의 칼럼에서 교수의 삶을 살면서 사실 '교육학'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배워본적도 없이 학생들을 교육 했다는 메세지는 고민할 만한 부분이 많다. 위에서 '수업의 개선을 위해서 얼만큼 노력을 했는가?'가 눈에 띄는 평가항목으로 보였던 부분도 이같은 생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 하는 한국에서 교육의 혁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러한 평가 제도(정량+정성), tenure 시스템에 대한 고민, decentralized 된 조직의 자율성/책임성 강화 등을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 결국 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많이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연구야 알아서들 잘 하시니까. 아울러 학교에서 교수에 대한 평가이든, 기업에서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이든, 연구과제에 대한 평가이든 (이 3가지를 모두 경험해본 사람으로) 평가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결과에 대해서 리뷰하고 토론하는 절차를 사실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한국에서의 평가는 성과급을 나누어 주기 위한 등급표시제의 의미인것이지 (마치 소고기의 질을 평가하는 것처럼), 그 평가를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키는 절차가 없다는게 본질적인 차이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암암리에 밀어주기나 평가자체가 객관성을 가질 수가 없고, 평가를 이용하여 권력으로 사용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B이니까 조용이해! 이만큼만 성과급 받아!). 우리는 평가를 왜하는지 고민을 해봐야하는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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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Academic year가 시작되면 (SU의 경우 8월 마지막 주) 앞서 이야기 했던 Provost's welcome meeting에 이어 각 School 별로 전체 Faculty meeting이 진행된다. 이 교수회의에 참석을 하며 한국에서의 회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많이 받아서 이번 편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일반교수와 보직교수의 분리이다. 좀 의아하실 수 있겠지만, 교수는 기본적인 구분을 해보자면 Tenure-track 혹은 Tenured faculty와 Non tenure track faculty로 나뉜다. Tenure-track/tenured faculty는 대부분 Ph.D.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특히 AACSB 인증을 받은 학교는 AACSB 인증을 받은 학교에서 학위 받은 사람을 선호한다) 학교의 성격에 따라 연구, 교육, 서비스에 각각 정해진 비중을 두고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원으로 Tenure-track으로 보통 임용이 되어 학교에서 정하는 절차에 따라 평가를 받고 (미국의 경우 대략 6년의 시간 이후) Tenured(정년보장) 교원이 되는 교원을 의미한다. 또한 Non tenure track faculty는 Job requirement에 따라 연구나 혹은 교육에 집중된 근무를 주로 하며 정해진 계약 기간 동안 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Tenure-track/tenured faculty는 조교수(Assistant Professor),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정교수(Full Professor)로 그 직급이 올라가고, 미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부교수로 승진을 할 때 Tenure 심사와 함께 평가를 받고 Tenured(정년보장)가 되면 부교수 직급이 된다 (한국의 경우 학교마다 다르긴 하지만 듣기론 정교수 심사를 하면서 Tenure 평가를 한다고 들었다. UNIST는 그렇지 않고 별도로 심사했다). 이 Tenure-track/tenured faculty 들이 보통 학과장(Department chair)나 학장(Dean)이나 기타 필요에 따라 설립되는 기타 조직의 장이 되는 직책을 맡기도 한다. 

 

미국에서 하나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렇게 학과장이나 학장 등의 직책을 맡은 교수와 그렇지 않은 일반 교수의 일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즉 학장이나 학과장은 아무래도 담당하는 School이나 Department에서 일어나는 행정적 일들의 책임을 맡고 있고, 이를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연구나 교육에 대한 의무시수 (계약상 해야하는 연구나 교육에 대한 의무)를 줄여주는 대신 행정적인 일을 책임을 지고, 일반 교수들은 그렇지 않은 반면에 계약 상에서 명시는 연구나 교육에 대한 의무시수를 수행하게 된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것이 어느정도 분리는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연공서열이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직책을 맡고있지는 않지만 행정적인 일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기도 했다. 처음 미국대학에서 교수회의를 참여하면서 느낀 생각이 이 둘 간의 분리가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무래 직책을 맡은 교수가 행정일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고 하더라도 일반교수의 의견이 필수적이기에 위원회(Committee) 제도를 운영해서 교수들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는 일들에 대한 결정을 맡기는 모양새였다. 예를 들어, 새로운 교수를 뽑는다고 하면 일단 Department chair가 충원 요청을 Dean에게 하고 Dean은 Provost 등에게 보고하여 충원을 승인받는다 (이는 연봉 등의 자금을 집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승인이 나면 다시 Department chair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Chair는 임용을 위한 Hiring committee를 구성한다. 임용과정 간 Chair가 약간의 지원 및 참고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전반적인 절차는 전적으로 Committee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최종 선발이 끝나면 Chair에게 선발된 인원을 추천하고, Chair는 다시 Dean에게 추천하고 다시 Provost에게 승인 받는 형태를 따른다. 하나 재미있었던 점은 그 모든 결정의 권한이 Decentralize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은 Committee의견이 그대로 반영이 된다는 것이고 학장이라고 해서 그 결정과정에 영향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는 Tenure 평가 절차나 기타 다른 위원회의 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고 각 의사결정에 소위 "위에서 내려오는 의견"이 중요한 요인이었어서 이러한 절차들이 신선하게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수회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Dean이나 Chair가 보통 리딩을 하긴 하지만, 대부분 각 교수들의 의견을 듣고, 교수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나, 필요한 경우 투표에 붙이는 등의 중재의 역할을 하지 자신의 의견을 크게 피력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특정 사안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것을 해당 위원회를 중심으로 교수들이 결정을 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대학본부나 필요한 자원을 찾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오고 나서 얼마 안되었을 때 창업관련한 (UNIST에서 창업교육센터를 했던 버릇으로) 이벤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상의하러 Dean을 만난적이 있는데, 내가 아이디어를 한참을 설명하니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은데, 무엇을 도와줄까?"라고 되묻기에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정도의 금액이 필요한데 아직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어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다고 하자. Dean은 "그건 네가 걱정할께 아니야. 내가 알아볼테니 너는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시켜봐"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찌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그 아이디어에 대한 자금조달을 비롯한 수행도 보통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몫이었는데, 그런 경험을 하다가 이곳에 와서 그 말을 들으니 엄청 새롭게 느껴졌다. 

 

상황에 따라서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겠지만, 회의에서 상충되는 의사결정을 해야했을 때도 찬성의견, 반대의견을 충분히 듣게 하고, 필요하면 추가시간을 마련해서도 더이상 의견이 안나올 때 까지 듣고 투표를 하는 광경도 나에게는 상당히 낯설었다. 나이가 많은 노교수님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고, 이제 막 들어온 젊은 교수는 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기도 한다. 물론 어디나 모든 사람이 만족할만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과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때로는 빨리빨리가 익숙한 나에겐 어색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결과"만을 주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워야겠지만,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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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ST에 처음 들어갔을 때 첫 수업의 긴장감과 부담감은 아마 어떻게 표현해도 부족할 것인데 그만큼 준비를 정말 많이 했고, 한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영어로 가르치는 것은 또 어떨까? 요즘 친구들은 영어를 잘한다던데, 여기는 학생들이 똑똑하다던데, 미국에서 울산으로 오고 나서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수업을 하였다. 당시에는 새로운 과목을 열어야 했었는데 '인터넷 비즈니스'였다. 일단 학생들이 '인비'라고 줄여서 부르는 것이 재미있었고 (사실 모든 말을 줄여서 이야기하는 문화를 처음 접해서, 학교 식당 -> 학식), 생각보다 학생 수가 많아서 고민이 근심/걱정이 많았다.

 

처음 들어갔으니 그 부담감만큼 열정도 가득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만큼 엄청 힘든 수업이었다. 학기 중에 학생들이 "교수님 수업 4개 듣는 것 같아요"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게 수업을 잘 진행한 것 같았다. 나중에 강의 평가에서는 "수업이 너무 힘들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고, 돌이켜 보면 내 수업 하나만 듣는 게 아닌데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난이도 실패라고 하나 보다. 

 

나에게는 정말 의미있었던 UNIST 첫 수업

부담은 되었지만, 학생들과 그렇게 소통하는 게 참으로 좋았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기도 하고 항상 노력을 하지만, 수업은 함께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름 궁합이 잘 맞아야 역시 덜 피곤하고 오히려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UNIST의 학생들은 참 똑똑했다. 열심히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몇몇 학생들이 "교수님 수업 다 들을 거예요" 하는 말이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첫 수업은 Capstone 수업인 Strategy이었다. 사실 나 스스로 준비가 더 되었어야 했는데, 미국으로 가족을 이사하고 아이를 초등학교에 전학시키고 집 구하고 적응하고 한다고 뭔가 정신없이 지나갔고, 이미 수업을 한번 해봤던 거라 준비가 부족한 면도 분명히 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또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이 기저에는 미국 대학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데, UNIST의 경우 국가에서 장학금을 전체를 지원하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열심히 밖에 할 것이 없었지만, 미국 대학생은 대부분 full time/part time job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처음에 미국에서 누군가 이메일로 '내가 일을 해야 해서 수업을 못 갈 것 같아' 하길래. '잉? 어처구니가 없네'하는 반응이었는데 - 물론,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게 주로 하는 게 맞지만, 이런 일이 부지기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돈을 벌어 학비를 대거나, 싱글맘이거나, 나이 들어서 늦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생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첫 퀴즈가 12점 만점이었는데 평균이 2점이 살짝 넘어서.. '이것들이 ㅡ.ㅡ'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쩌랴. 내가 잘 못 가르친 탓이겠지.라고 level control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아울러 미국 애들이 토론을 잘한다고 일반적으로 한국에 알려져 있긴 하지만, 수업시간에 말 안 하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저치들의 입을 어떻게 열까 고민이다. 한 수업은 17명이고 아침 수업이라 일단 참여하는 태도부터가 다른 아이들이지만, 그다음 수업은 28명에 미국의 전형적인 백인 운동하는 애들이 반 정도 되고 이것들은 앉은 건지 누운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제일 앞자리에 있으니 아직도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수업은 그럭저럭이고 한국이나 미국이나 잘하는 친구들은 잘하고 관심 없는 애들은 딴짓한다. 그렇게 핸드폰 쓰지 말고 점수 깎는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말이다. 더 강하게 나갈지 접어둘지 manage 방법을 항상 고민한다. 최근에 기술의 발전은 좋지만 Airpods 같은 걸 귀에 꼽고 수업에 앉아 있으면 당황스럽다.

 

제일 힘든 부분은 사례인데, 한국에서 한국기업이나 미국의 주요 큰 기업들 몇 개는 익숙하긴 하지만, 미국의 전체적인 시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쓰긴 했고 주로 Amazon, Uber, ToysRus 같은 일반적인 사례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는 비즈니스 환경이라 사실 사례야 무궁무진한 편이긴 하다. 다만 그것들의 깊은 정보를 파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학교와 처해진 주변 환경이 달라서 UNIST의 경우에는 치열함을 이미 겪고 그 자리에 온 친구들 그리고 앞으로의 불확실성으로 몸부림치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곳은 훨씬 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곳의 학생들도 삶의 치열함은 있지만, 최근 미국 경기가 호황이고 이 넓지 않은 반도에서 그래도 인정받는 학교라 근처에 있는 기업들이 우리 학생들을 서로 데려가려고 하기에 취업 걱정을 하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 뭐랄까 '이건 선택의 문제야' 같은 태도.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부럽기도 하고 한국의 학생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공통적인 건 한국이던 미국이던 할 놈은 하고 안 할 놈은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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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외국에 대한 생각이나 접촉할 기회가 거의 전무 했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가끔 나오는 유명한 내한 가수들의 인터뷰 정도(?)가 교과서 외에 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문화였고, 나보다 선배들이 가끔 수기에서 언급하던 AFKN이나 영어 방송을 들은 적도 접근하는 방법도 몰랐다. 다만, 입대해서 논산 훈련소를 마칠무렵 카투사를 뽑았는데, 그때 차출되어 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아! 저 줄로 갔으면 영어를 더 잘 했을텐데'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 실제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학생 중에서 카투사 출신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제대를 하고 유럽배낭여행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국을 경험해본 기억이었고, 아직도 싱가포르를 거쳐서 British Airway를 타고 영국 히드로 공항으로가는 비행기안에서 승무원이 '음료 뭐줄까?' 라는 질문에 '코카콜라!'라고 답변했던게 아마 내 인생에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하였던게 아닌가 싶고, 영국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할때 심장이 쿵쾅거리며 버벅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던 그때 조금이나마 싼 가격으로 밥을 먹으려고 찾아다녔던 학교들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지금도 여행갈 때 오래된 학교를 찾는건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그렇게 학교에 대한 묘한 매력과 햇볕을 받으며 잔디밭에서 책을 보고 있던 교수들,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었다.

 

 

영국 배낭여행, 참으로 멋있었던 캠프릿지 캠퍼스
독일의 전통 깊은 훔볼트 대학에서 학생식당이 열리길 기다리며

 

거기에 군대 시절 일과시간을 끝내고 가장 열심히 보았던 드라마가 '카이스트'였는데 물론 드라마지만 추파춥스 캔디를 물고 로봇을 만들며 무언가 몰두하는 모습들에서 꽤나 희열을 느꼈었는데, 그 두가지의 경험이 합쳐서 이후 미국대학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변변치 않은 토플 점수에 유학원을 끼지 않고 (강남에 있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 입이 떡벌어져 그냥 스스로 진행해 보기로 한다), 스스로 틈틈이 하는 아르바이트 중간중간 홈페이지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10여군데 학교에 넣었는데, 사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군대 가기 전의 나의 학점과 커트라인을 겨우 넘기는 토플점수 (500 점 정도 였던 듯)와 형편없었던 자기소개서는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이리라. 또, 그때는 외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막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금액을 쏟아가며 비싼 전형료를 부담하고 토플 점수를 별도로 우편으로 붙여가며 지원했지만, 되었더라도 학비가 지원되지 않았을테고 장학금을 받기 어려웠을테니 미국의 주립대학을 간다하더라도 out of state tuition에다가 생활비까지 하면 감히 살아남지 못했을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도전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전부 리젝을 받은 좌절스러운, 군대 제대이후 첫 프로젝트의 쓰디쓴 패배의 잔을 들수밖에 없었고, 이후 복학하여 그 형편없는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유학에 대한 꿈은 마음 한구석 깊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그라든 줄 알았던 생각이 스물스물 다시 피어오른건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석사과정에서다. 그때 한참 드라마 Friends에 빠져있었던 시기라 1년차에 교수님께 대뜸 "미국보내주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이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럼 논문을 써라. 그럼 학회를 한번 가보자"라고 말씀을 하셨다. 논문이라고는 읽은 적도 거의 없는데 어떻게 쓰는건지 알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냥 닥치는대로 한국 논문들을 읽고 영어논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뭐가 서론이고 뭐가 방법론이고 뭐가 결과인지 당연히 알지 못한채 그냥 소설 쓰듯 뭔가 계속 썼다. 물론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덕분에 한 학기 장학금 못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논문 제출 일주일 전부터 교수님의 끊임없는 야단과 수정이 반복되는 나날이었고, 일주일을 거의 밤을 새다시피 억지로 만들고 만들어 겨울 우리랩 최초의 랩전체 Las Vegas Conference를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이다 (2003년 겨울)

 

 

 촌놈의 Las Vegas 첫 방문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Las Vegas 학회의 첫 발표

 

그 학회에 붙여서 사실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Friends의 배경이 되었던 NYC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회가 끝나고 뉴욕에 며칠만 들렀다 오겠다고 다시한번 용감하게 말씀드렸는데 그러라고 말씀해 주셨다. Friends로 세뇌가 되어서 였던지, LA와는 다른 뭔가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서 뉴욕을 참 좋아하게 되었고, 그때 인석이 형과 혜정이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수이 뉴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뉴욕에서의 첫 목적지는 바로 '감미옥' (지금은 그 위치를 이전하였음). 그 구수한 설렁탕을 잊을수가 없었고 그 첫 맛을 잊지 못해 10년뒤 유학생활 할때 자료조사차 아침 첫 버스를 타고 뉴욕에 내려올때 마다 그 집에서 시작을 했었다. 더 놀랐던 건 형이 감미옥 바로 앞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밥값보다 주차비가 더 많이 나와 '역시 뉴욕 b'하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던가 Time Square를 둘러보느라고 길거리에 대놓았던 형의 차가 견인되어 뉴욕시의 첫날밤을 견인차 보관소에서 찾느라 진땀 빼고 근사한 한끼 식사 비용을 날려 미안함을 가지게 된건 에피소드랄까..


그때 부터 아마 미국 그리고 뉴욕을 나도 모르게 꿈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첫 여행에서 뉴욕에 빠져 셔터를 연신 눌러대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맨하튼 첫 여행은 잘 마무리가 되었고, 그 10년뒤 나는 다시 JFK(뉴욕공항)로 다시 내 생활을 시작하게 될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 오랜기간 드라마로만 봤던 뉴욕을 직접 가본다는 것 외에 뉴욕은 그냥 좋았다. 드라마에서 나온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과도 같은 느낌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구나, 언젠가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mpire State Building에서
대략 10년 후에 이곳에서 박사논문 마무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New York Public Library
역시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Columbia University
선이 아름다운 브룩크린 브릿지
브룩크린 브릿지에서 바라본 Empire State Building
직접보면 반할 수 밖에 없는 뉴욕의 야경

나에게 미국의 경험을 선사해준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석사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석사과정에서 IT Business 라고 지금에 와서 보면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에 가까운 전공을 한 내가 왜 갑자기 기계연구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라. 뭐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같은 대전 연구단지에 속해 있고 입사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마지막 대규모 면접에서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왜 우리(기계연구원)가 IT Business을 전공한 나를 채용해야하는지를 설명해봐라 라는 의심많은 면접관들의 질문에 되도록 열심히 답변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결국 채용이 되었고 정신없이 나의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정부출연연을 보면 크게 연구직과 행정직으로 직군을 구분할 수 있고, 나는 연구기획 분야로 하여 연구직으로 입사를 하였다. 당시 원장님이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기 위해 '미래기술연구부'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어 나를 1번으로 발령을 내어주셨는데, 나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박사님들이 한분두분 조인을 하여 조직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는 Skunk works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자신이 공부한 분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다른 박사님들의 발표를 지켜 보면서 (사회과학 전공한 사람이 공학의 박사분들이 하는 발표를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나도모르는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 비해서 부서가 꽤 젊은 연구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롭고 좋았는데, 그때 일끝나고 시간이 나면 으레 소주 한잔씩 하던 형님들이 지금 성균관대의 김근형 교수님과 원광대의 조영삼 교수님이었다. 두 분과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당시 형님들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아마 어리지 않았을까)로 꽃을 피웠는데, 그때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박사를 하신 김근형 교수님이 나의 과거 이야기 관심사를 듣더니 유학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해주셨다. 물론 KAIST에서 박사를 하셨던 조영삼 교수님도 "그래 그래라"라며 힘들 북돋아주셨다. 

 

다 주변에 상대하는 분들이 Ph.D. 이다 보니 Peer pressure가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 속해 있다 보니 스스로도 '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굳건해 졌다. 물론 처음에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KAIST에서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경영학관련 스쿨이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어 지원이 어려웠고 나중에 기술경영학과가 생기긴 했지만, 그건 이미 내가 미국 박사과정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시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미국생활에 대한 꿈, 유학에 대한 꿈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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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Decade가 또 끝이 나는 시점이다. 어른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정말 정신없이 또 10년이 지나간 것 같다. 긴 인생을 보자면 가장 중요한 시간을 열정적 그리고 Dyanmic 하게 보낸 10년이 아닌가 싶다. 물론 누구에게나 모든 시점이 다 그러하겠지만,

 

2010년 10여년의 꿈이었던 미국대학에서의 공부가 2009년 그간 좋은기억 나쁜기억이 많았던 회사생활을 접어들고 불확실성 가득한 도전의 시점이었으나 이때만 해도 그저 마냥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다 연말에 첫째딸이 태어나면서 새로운 인생 버전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2011년 한 딸아이의 초보아빠로써 좌충우돌, 허둥지둥 했던 것 같다. 거기에다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의 어려움, 부족한 영어에 대한 아쉬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함, 경제적 타이트함 등이 점점 목을 조여왔던 것 같다. 무엇인가 여유를 찾기 보다는 모든것이 숨을 조여오는 듯 한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2012년 박사과정 3년차 아마도 압박감이 점차 커와 그때 부터인가 잠을 제대로 못잔 것 같다. 항상 소리를 지르며 잠을 잔다고 했고, 스스로도 악몽을 많이 꾸었던 것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내년에 끝내야한다는 부담감, 그러나 마음만 조급하고 결과는 나오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마음은 급하고 그런 해였던 것 같다. 그때 와이프가 많이 힘이되어 준 것 같다.

 

2013년 그래도 인생이 기회는 주는지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5월에 UNIST에서 잡 오퍼를 받은 전화를 받고 멍하니 지난 꿈같았던 그간의 날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8월에 무사히 박사디펜스를 마치고 지도 교수님 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Congratulation Dr. Gang" 하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털썩 그자리에 앉아서 많은 후배들/동기들이 축하한다고 등을 두드려 줬던 것 같다. 그 이후 초짜 선생으로의 첫 학기가 떠오르며, 아직도 그 첫 수업 끝날때 찍었던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2014년 이때부터 UNIST에서 창업교육센터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우한균 교수님과 좌충우돌 하면서 하나하나 헤쳐나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식했고, 그 무식함이 용감함으로 바뀌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배우고 읍소하면 하나하나 만들어 갔던 것 같다. 연말 즈음에 제대로 된 첫번째 논문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그래도 학자로써 명함은 내밀 수 있겠구나 안도했던 한해였던 것 같다. 

 

2015년 초 배기홍 대표님을 Eugene Noh 로부터 소개를 받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도해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클래스 101이 나왔던 우연치고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연출되어 결론적으로 봤을때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의미있는 시도였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둘째놈이 태어나 기쁨과 부담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2016년 우한균 교수님이 하시던 센터를 넘겨 받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배기홍 대표님 덕분에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고, 나 스스로도 관련하여 많은 네트워크를 쌓고 공부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이 즈음부터인가 과연 내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같고, 정말 이 분야에서 아는게 없구나 하는 자각을 하면서 미래를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인생에서 큰 전환을 하기로 하고 다행히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의 학교에서 잡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2017년 미국으로 결정하고 UNIST의 정든 삶을 정리하고 Salisbury University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지금에 와서 느낌이지만, 이 때의 도전이 얼마나 무모했던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다시 돌아온 미국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적응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첫 학기 후에 그 절망감은 거대했으며 한 일주일은 잠을 설칠정도로 괴로웠었다.

 

2018년 미국에서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드는데 가족 모두 노력을 기울였고, 쉽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하나둘 적응하기 시작했던 한 해 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간 노력들의 결과들이 2017년부터 결과로 나오기 시작해서 2018년 계속해서 논문이 출판 되었고, 수업도 점차 안정되는 느낌... 

 

2019년 한국에서 정신없었던 삶의 패턴과는 다른 삶의 형태에 적응이 되며 '조강의 4cents'팟캐스트를 2월부터 시작해서 많은 분들의 인생 이야기, 도전 이야기를 듣고 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내 스스로 한단계 발전을 위한 현재 위치를 영점조정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는 Associate Chair를 맡아서 학생들과 조금더 소통하며 미국 대학생들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을 조금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정말 임팩트 있는 일들이 많았던 지난 10년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변화 (태평양을 두번 건너는 이사)와 두 아이들의 탄생, 박사과정 학생에서, 한국교수 그리고 지금 미국교수로의 변화... 이 모든 것을 함께 이해해주고 지원해준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내 인생의 또다른 10년... 특별한 계획이 있는건 아니지만, 물론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내가 또 맞이할 또다른 그 10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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