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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neyWorld in Orlando

 

올랜도 디즈니는 대략 48년 전인 1971년 10월 1일에 Walt Disney와 그의 형인 Roy Disney가 만든 잘 알려진 테마파크이다. 그 크기가 대략 25,000 acres라고 하니 요즘 잘 쓰는 평수로 환산을 해보자면 대략 3천만 평이라는 감이 안 잡히는 크기이고, 울시 크기와 비교해 보면 대략 1/6 정도의 크기이고, 한국에서 잘 알려진 Everland의 크기(245 acres)와 비교해 보면 Everland의 100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실제로 파크의 크기와 그 파크 동선 안에 있는 전체 부속 건물들을 포함할 것 같은데, 호텔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파크 간의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는 걸 보면 그 사이즈를 짐작할 수 있다.

 

올랜도 디즈니는 크게 4개의 파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Magic Kingdom, Animal Kingdom, Hollywood Studio, 와 Epcot 이다. 이번에는 고민을 하다가 Magic Kingdom, Animal Kingdom, Hollywood studio 이렇게 세 곳만 방문하기로 하고 미리 결제를 해두었다. 

 

==숙박==

전날까지 Universal Studio에서 잘 묵고 힐튼계열인 Hilton Orlando Buena Vista Place Disney Springs (https://www3.hilton.com/en/hotels/florida/hilton-orlando-buena-vista-palace-disney-springs-area-MCOBUHH/index.html)

에서 5박을 예약하였다.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는

1. Hilton Diamond 회원이라 일단 Full Breakfast가 무료라는 점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디즈니 캐릭터가 나오는 뷔페를 포함한다. 그냥 이용할 경우 인당 35불이었던 듯),

2. 디즈니와 연계된 호텔이라 60일 전에 FassPass+를 예약할 수 있고, Extended hours를 활용할 수 있는 장점, 

3. 각 파크로 셔틀을 매 30분 마다 운영하는 점,

4. 상대적으로 저렴한 힐튼포인트로 예약이 가능한 호텔이라는 점 (힐튼 포인트로 예약할 경우 4박을 예약할 때 1박을 무료로 예약할 수 있다)

5. 겨울이라 날씨가 어떨지 몰라 사용할 수 있을지 기대는 안했지만, Float Lagoon Pool - 그냥 튜브에 앉아 있으면 천천히 길을 따라 꽤 길게 흐르는 튜빙을 즐길 수 있는 점.

 

이 호텔을 좀 평가해 보자면, 일단 스텝들의 서비스는 친절했고 포함되어 있는 조식의 질이 훌륭했다. 다양하고 신선한 과일과 빵 등의 음식이 다양했고, 조식을 제공하는 뷔페 자체의 공간이 여유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복잡하다는 인상을 갖지 않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오믈렛이나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Egg station도 두 개가 있어서 크게 붐비지 않게 즐길 수 있었고, 예약할 때는 몰랐지만 Float Lagoon Pool이 Heated라 우리가 갔던 날 중에서 하루 여유가 있는 날이 있었는데 꽤 쌀쌀했는데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었고, 아마 아이들에게는 디즈니보다 그 풀에서 노는 게 더 즐겁지 않았을까. 결국 checkout 하는 마지막 날까지 (비행시간이 오후라) 수영장을 즐기고 나왔다. (별도의 샤워장은 없었음).

 

몇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일단 방은 공간이 꽤 큰 편이었는데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좀 낡은 느낌이 있고, 중간에 공간이 비어 있는 형태의 건물이라 로비/바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서 소음이 좀 있는 편이었다 (방의 문을 닫으면 거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키를 한번 가져나오지 않아 방문을 두드렸는데 옆방에 계시는 분이 나오는 웃지 못할 일이.. 오래된 건물들의 단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호텔 자체의 숙박객들이 꽤나 많아서 셔틀버스가 사실 이용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호텔에서 파크도 그렇지만 파크에서 호텔로 돌아올 때도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그냥 Uber/Lyft가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도 Uber/Lyft를 좀 이용했는데 거리에 따라서 7~10불 정도 나왔다. 한 번은 House keeping이 잘 안되어 (아무래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방을 정리해야 하므로) 컴플레인했더니, manager가 직접 방에 와서 널려져 있는 옷가지를 다 개어주고 가고 아이들이 선물로 샀던 인형들을 침대 위에 잘 정리해 주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여하튼 포인트로 묵었지만, 조금 더 쾌적한 이용을 위해서는 셔틀이 있는 좀 작은 규모의 호텔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근처 호텔에서 셔틀 서비스를 제공한다). 파크에서 돌아올 때 호텔 버스마다의 자리가 있는데 70번이 넘어간다는 말은 적어도 70개 이상의 호텔 셔틀 루트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파크 방문 준비 & 방문==

디즈니를 예약하고 좀 인상적이었던 것이 My Disney Experience라는 홈페이지/앱으로 미리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데 이것이 상당히 편리하다. 파크의 티켓을 4개월 전쯤에 미리 구매하고 (Third party를 이용해 구매) 그 티켓 코드를 미리 My Disney Experience에 입력하고 호텔 예약이 끝나면 연계된 호텔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60일전에 미리 FP(FastPass+)를 지정*할 수 있는 여행 통합 관리 시스템인데 의외로 상당히 편리함이 있다.

   1. 여행에 참여하는 인원수에 맞게 티켓을 구매하고 위 사이트에 등록을 하면 각 인원이 등록이 된다. 

   2. Resort의 경우 아마도 모든 Resort를 의미하는 건 아닐 것 같고, Disney와 연계된 호텔의 경우 FP+ 등록을 위해서 별도로 등록을 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경우는 연계된 호텔이었으나, 아닌 호텔을 등록해보지 않아서 모름)

   3.  60일전에 FP+를 지정할 수 있는 호텔 예약번호를 넣으면 Resort Hotel 정보와 FP+가 활성화된다. (60일 전 보다 훨씬 이전에 등록할 경우 '아직 시간이 안되었으니 기다려라'라는 메시지가 보임).

   4. 구매한 티켓에 따라서 미리 각 파크별로 일정을 대략 정하고 FP+를 지정할 수 있다. 

   5. Dining은 레스토랑에 상관없이 파크안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Meal Plan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알아보지 않아서 모른다.

 

* FP+의 경우는 각 파크별/일자별로 3개까지 놀이기구를 미리 지정할 수 있다. FP+가 활성화되는 60일 전이 되면 미리 각 파크 별로 3개씩의 놀이기구를 시간대별로 지정한다 (1시간 정도의 시간 간격을 준다. 그 안에 언제든지 바로 FP+ 라인을 통해서 입장하면 된다). 그리고 지정한 날자에 놀이기구를 이용하면 바로 1개의 놀이기구 FP+를 지정할 수 있다 (3개의 슬랏이 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우리의 경우는 특히 성수기였기 때문에 FP+를 사용 이후 지정이 불가능했고, 아주 인기 있는 놀이기구의 경우는 D-60일이 되자마자 FP+의 티켓이 다 차 버렸다. 대부분 인기 있는 것들은 예약이 가능했다. 당일 사용을 하고 하나를 더 예약해보려 했는데,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아마도 각 날자별로 전체 FP+를 발행하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FP+를 사용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10분 이내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같이 굉장히 쾌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미 다녀온 후라 정보가 없지만, 이렇게 방문하는 사람, 호텔, 파크티켓, 식사, FP+를 관리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정보는 Memory Maker라는 것인데, 요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행당 미리 $169불을 지불하면 그 여행기간 전체 동안 파크 여기저기에 있는 사진사들과 사진을 찍으면 자신만의 Cloud에 바로 전송이 되어 나중에 별도로 다운로드하여볼 수 있거나, 사진일 들어간 기념품 등을 구매할 수 있는 PhotoPass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꽤나 유용하고 재미있는 서비스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여행자들 전체(가족이던 연인이던) 사진을 찍으려면 셀카봉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고,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가끔 다양한 디즈니 캐릭터가 들어가는 특수효과를 넣어주기도 하였다. 사진사마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을 찍어 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단점이라고 한다면 너무 막 찍는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따라서 사진사를 잘 봐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게 중요하다. 또한 색감 자체가 조금 색 빠진 느낌이 들어서 요즘 핸드폰에서 찍히는 쨍! 한 느낌과는 조금 다른 설정의 사진이다. 사진은 찍고 난 다음 대략 10여분 정도 있으면 자신의 사진 Cloud에 업로드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업로드에 놀랐고, 나중에 그 사진들을 다 받아 볼 수 있다. 또한 놀이기구를 탈 때는 기구를 타면서 떨어질 때 찍어주는 사진을 자신의 Cloud에 올릴 수 있는데 요것이 상당히 큰 강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강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추천하는 서비스이다. 이것 역시 My Disney Experience에서 미리 등록이 가능하다.

 

아울러 마지막까지 고민했던게 MagicBand라고 불리는 놈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였는데, 이는 위의 모든 정보를 담아놓은 손목에 차는 입장권이라고 보면 된다. 굳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입장하거나, FP+를 이용하거나, Memeory Maker를 이용할 때마다 카드를 넣었다 뺐다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상당히 편리한 점이 있지만 별도의 MagicBand를 구매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기념으로 구매..

 

Disney World App은 My Disney Experience에서 정리된 정보를 그대로 핸드폰에서 manage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미리 생각은 못했지만, App을 통한 또하나 인상적인 점은 음식점에 음식을 Mobile Order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략의 동선을 파악하고 미리 레스토랑에 메뉴를 선정하고 결제를 해놓으면 미리 정보가 들어가 있다가, 자신이 해당 레스토랑에 도착했다는 버튼을 누르면 바로 주문에 들어가고, 음식이 준비가 되면 핸드폰으로 알려준다. 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Mobile Order로 미리 음식을 준비했다가 제시간에 찾지 못하거나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구성을 한 것 같다. 따라서 주문을 하기 위해 긴 줄을 설 필요가 없기에 아주 유용한 기능이라고 생가기 들었다. 

 

실제 파크 이용은 아마도 구글링을 하면 많은 후기와 사진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몇 장의 사진으로 대체하도록 하겠다. Hollywood Studio 에서는 스타워즈, Animal Kingdom에서는 아바타, 그리고 매직킹덤은 뭐.. 정말 디즈니 101이니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그래도 꽤나 인상적이고 잘 구성을 해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애니멀 킹덤의 Avatar

 

생각보다 시각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놓아서 Disney 구성원들의 고민이 느껴졌음
비가와서 오랜기간 갖혀 있었음. ㅜ.ㅜ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2019년 12월 24일의 매직킹덤

9. Disney

 

이번 여행기를 통해 총 9 가지의 (테크)기업 그리고 스타트업의 서비스/제품을 소개하였는데,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이 든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Disney 였다. 내려오는 비행기에서 그리고 틈틈이 잠들기 전 Audible를 통해 올해 Times에서 선정한 올해의 Businessmen인 Bob Iger의 이야기를 들으며 Disney가 커온 역사와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최근 Disney+의 론칭으로 이제 소위 Digitialization을 꽤 하는 기업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디즈니는 생각보다 아주 적극적으로 관람객들의 보다 나은 경험을 위해서 Web/App의 연동이나 미리 자신의 여행을 관리하게 하고 PhotoPass/음식 Mobile Order처럼 새로운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접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 내가 Disney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하는 여행이었다.

 

최근 Disney+를 런칭하면서 부터 Disney+를 사용하고 있는데 Netflix를 사용하다가 써본 Disney+는 상당히 실망이 컸었다. UI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플랫폼의 개선할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해 실제 테마파크는 꽤나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잘 접목하고 있었다. 다만, 몇 가지는 왜 저렇게 해놨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입장할 때 Magic Band나 입장권을 이용하여 동그란 단말기에 대면 입장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게 각 라인마다 2대씩 앞뒤로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그렇게 한 이유는 입장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입력하거나 확인을 하게 하는데 기다림을 줄이게 하기 위함일 텐데, 입장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입력하는 것이 에러도 제법 있고, 사용법도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여 앞뒤로 설치해봤자 안내원이 한 명(혹은 가족)을 처리하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두 번째 스캐너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아마 개선이 되겠지?).

 

그래도 1971년부터 대략 50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운영을 하면서 많은 인원이 효율적으로 파크를 이용하게 하는 노하우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속적인 신기술 접목을 통해서 그 경험치를 극대화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튼튼한 캐릭터(콘텐츠)를 바탕으로 조금은 업데이트가 느리긴 하지만 그 콘텐츠(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놀이기구들, 그리고 놀이기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파크 이곳저곳에서 신기술을 접목한 파크 이용을 극대화하는 디즈니 앞으로 또 어떠한 변화를 줄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으로 (테크)기업 그리고 스타트업의 서비스/제품과 함께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디즈니 여행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질문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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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외국에 대한 생각이나 접촉할 기회가 거의 전무 했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가끔 나오는 유명한 내한 가수들의 인터뷰 정도(?)가 교과서 외에 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문화였고, 나보다 선배들이 가끔 수기에서 언급하던 AFKN이나 영어 방송을 들은 적도 접근하는 방법도 몰랐다. 다만, 입대해서 논산 훈련소를 마칠무렵 카투사를 뽑았는데, 그때 차출되어 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아! 저 줄로 갔으면 영어를 더 잘 했을텐데'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 실제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학생 중에서 카투사 출신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제대를 하고 유럽배낭여행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국을 경험해본 기억이었고, 아직도 싱가포르를 거쳐서 British Airway를 타고 영국 히드로 공항으로가는 비행기안에서 승무원이 '음료 뭐줄까?' 라는 질문에 '코카콜라!'라고 답변했던게 아마 내 인생에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하였던게 아닌가 싶고, 영국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할때 심장이 쿵쾅거리며 버벅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던 그때 조금이나마 싼 가격으로 밥을 먹으려고 찾아다녔던 학교들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지금도 여행갈 때 오래된 학교를 찾는건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그렇게 학교에 대한 묘한 매력과 햇볕을 받으며 잔디밭에서 책을 보고 있던 교수들,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었다.

 

 

영국 배낭여행, 참으로 멋있었던 캠프릿지 캠퍼스
독일의 전통 깊은 훔볼트 대학에서 학생식당이 열리길 기다리며

 

거기에 군대 시절 일과시간을 끝내고 가장 열심히 보았던 드라마가 '카이스트'였는데 물론 드라마지만 추파춥스 캔디를 물고 로봇을 만들며 무언가 몰두하는 모습들에서 꽤나 희열을 느꼈었는데, 그 두가지의 경험이 합쳐서 이후 미국대학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변변치 않은 토플 점수에 유학원을 끼지 않고 (강남에 있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 입이 떡벌어져 그냥 스스로 진행해 보기로 한다), 스스로 틈틈이 하는 아르바이트 중간중간 홈페이지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10여군데 학교에 넣었는데, 사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군대 가기 전의 나의 학점과 커트라인을 겨우 넘기는 토플점수 (500 점 정도 였던 듯)와 형편없었던 자기소개서는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이리라. 또, 그때는 외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막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금액을 쏟아가며 비싼 전형료를 부담하고 토플 점수를 별도로 우편으로 붙여가며 지원했지만, 되었더라도 학비가 지원되지 않았을테고 장학금을 받기 어려웠을테니 미국의 주립대학을 간다하더라도 out of state tuition에다가 생활비까지 하면 감히 살아남지 못했을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도전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전부 리젝을 받은 좌절스러운, 군대 제대이후 첫 프로젝트의 쓰디쓴 패배의 잔을 들수밖에 없었고, 이후 복학하여 그 형편없는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유학에 대한 꿈은 마음 한구석 깊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그라든 줄 알았던 생각이 스물스물 다시 피어오른건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석사과정에서다. 그때 한참 드라마 Friends에 빠져있었던 시기라 1년차에 교수님께 대뜸 "미국보내주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이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럼 논문을 써라. 그럼 학회를 한번 가보자"라고 말씀을 하셨다. 논문이라고는 읽은 적도 거의 없는데 어떻게 쓰는건지 알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냥 닥치는대로 한국 논문들을 읽고 영어논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뭐가 서론이고 뭐가 방법론이고 뭐가 결과인지 당연히 알지 못한채 그냥 소설 쓰듯 뭔가 계속 썼다. 물론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덕분에 한 학기 장학금 못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논문 제출 일주일 전부터 교수님의 끊임없는 야단과 수정이 반복되는 나날이었고, 일주일을 거의 밤을 새다시피 억지로 만들고 만들어 겨울 우리랩 최초의 랩전체 Las Vegas Conference를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이다 (2003년 겨울)

 

 

 촌놈의 Las Vegas 첫 방문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Las Vegas 학회의 첫 발표

 

그 학회에 붙여서 사실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Friends의 배경이 되었던 NYC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회가 끝나고 뉴욕에 며칠만 들렀다 오겠다고 다시한번 용감하게 말씀드렸는데 그러라고 말씀해 주셨다. Friends로 세뇌가 되어서 였던지, LA와는 다른 뭔가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서 뉴욕을 참 좋아하게 되었고, 그때 인석이 형과 혜정이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수이 뉴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뉴욕에서의 첫 목적지는 바로 '감미옥' (지금은 그 위치를 이전하였음). 그 구수한 설렁탕을 잊을수가 없었고 그 첫 맛을 잊지 못해 10년뒤 유학생활 할때 자료조사차 아침 첫 버스를 타고 뉴욕에 내려올때 마다 그 집에서 시작을 했었다. 더 놀랐던 건 형이 감미옥 바로 앞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밥값보다 주차비가 더 많이 나와 '역시 뉴욕 b'하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던가 Time Square를 둘러보느라고 길거리에 대놓았던 형의 차가 견인되어 뉴욕시의 첫날밤을 견인차 보관소에서 찾느라 진땀 빼고 근사한 한끼 식사 비용을 날려 미안함을 가지게 된건 에피소드랄까..


그때 부터 아마 미국 그리고 뉴욕을 나도 모르게 꿈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첫 여행에서 뉴욕에 빠져 셔터를 연신 눌러대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맨하튼 첫 여행은 잘 마무리가 되었고, 그 10년뒤 나는 다시 JFK(뉴욕공항)로 다시 내 생활을 시작하게 될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 오랜기간 드라마로만 봤던 뉴욕을 직접 가본다는 것 외에 뉴욕은 그냥 좋았다. 드라마에서 나온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과도 같은 느낌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구나, 언젠가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mpire State Building에서
대략 10년 후에 이곳에서 박사논문 마무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New York Public Library
역시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Columbia University
선이 아름다운 브룩크린 브릿지
브룩크린 브릿지에서 바라본 Empire State Building
직접보면 반할 수 밖에 없는 뉴욕의 야경

나에게 미국의 경험을 선사해준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석사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석사과정에서 IT Business 라고 지금에 와서 보면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에 가까운 전공을 한 내가 왜 갑자기 기계연구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라. 뭐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같은 대전 연구단지에 속해 있고 입사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마지막 대규모 면접에서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왜 우리(기계연구원)가 IT Business을 전공한 나를 채용해야하는지를 설명해봐라 라는 의심많은 면접관들의 질문에 되도록 열심히 답변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결국 채용이 되었고 정신없이 나의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정부출연연을 보면 크게 연구직과 행정직으로 직군을 구분할 수 있고, 나는 연구기획 분야로 하여 연구직으로 입사를 하였다. 당시 원장님이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기 위해 '미래기술연구부'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어 나를 1번으로 발령을 내어주셨는데, 나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박사님들이 한분두분 조인을 하여 조직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는 Skunk works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자신이 공부한 분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다른 박사님들의 발표를 지켜 보면서 (사회과학 전공한 사람이 공학의 박사분들이 하는 발표를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나도모르는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 비해서 부서가 꽤 젊은 연구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롭고 좋았는데, 그때 일끝나고 시간이 나면 으레 소주 한잔씩 하던 형님들이 지금 성균관대의 김근형 교수님과 원광대의 조영삼 교수님이었다. 두 분과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당시 형님들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아마 어리지 않았을까)로 꽃을 피웠는데, 그때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박사를 하신 김근형 교수님이 나의 과거 이야기 관심사를 듣더니 유학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해주셨다. 물론 KAIST에서 박사를 하셨던 조영삼 교수님도 "그래 그래라"라며 힘들 북돋아주셨다. 

 

다 주변에 상대하는 분들이 Ph.D. 이다 보니 Peer pressure가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 속해 있다 보니 스스로도 '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굳건해 졌다. 물론 처음에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KAIST에서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경영학관련 스쿨이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어 지원이 어려웠고 나중에 기술경영학과가 생기긴 했지만, 그건 이미 내가 미국 박사과정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시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미국생활에 대한 꿈, 유학에 대한 꿈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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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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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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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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