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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참 사이가 좋았고 서로 도움이 많았던 동기들은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

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엠블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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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에서 진보는 다양한 체제를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하고, 보수는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이나 태도로 아주 간단히 정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이 이미 경험하고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전공하는 경영학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미 오랜 기간 성장을 해온 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미 성장한 기업의 경우는 기존에 가진 것들 (이건 단순히 제품이나 기업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프로세스든 Tangible / Intangible 자원을 포함한다) 때문에 소위 '관성(Organizational Inertia)'라는 것이 생기는데 그러한 관성이나 지식이나 자원의 stickiness (이동하지 않으려는 경향)으로 인해 스타트업에 비해서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면이 있다. 

 

오늘은 재미없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2009년 8월 유학생활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사실 첫걸음부터 만만치가 않았는데, 오늘은 그 처음 좌충우돌 초기 적응기를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 영어를 배우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하나의 메시지는 이왕 마음을 먹었으면 하루라도 일찍 오시는 게 낳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가만히 보니, 어른과 아이들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호기심 이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쪽팔림'이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해도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고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더해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냄을 알 수 있었다. 어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부끄러워'한다는 점인데, 소위 '쪽 팔리'는게 제일 싫은 것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불 킥!' 같은 신조어도 나오지 않았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도, 미국 문화를 모른다는 것도 모든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늦게 배우나 보다. 

 

이 정도로 서론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첫날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윤성호 박사의 오랜 기다림과 도움 덕분에 그날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윤성호 박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윤성호 박사는 본가가 플러싱(NY주의 한인타운 지역)이고 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갖춰져 있다기보다는 집에서 정말 잠만 자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에어매트리스도 깔아주었다. 짐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어차피 바로 집을 구해서 나갈 예정이었기에) 바로 골아 떯어졌다. 당시 윤성호 박사는 Albany 다운타운이었는데 여기서 Troy까지는 차로 대략 20여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겨우 몸을 정리를 하고 내가 꿈에도 그리던 박사과정을 하는 교정을 같이 가기로 했다. 윤성호 박사도 당연히 연구실로 출근하는 길이니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착했던 윤 박사는 연신 어떻게 돌아다니시려고 그러나, 나중에 갈 때 본인 실험이 언제 끝날지 몰라 어떻게 라이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등의 말을 하였는데 더 이상 피해를 주기 싫어 내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했다.(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가자마자 학생증을 만들고 (일단 학교시설을 들어가려면 필요하기 때문에) 윤 박사와는 저녁에 만나기로 한다. 학생증을 찍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미소가 만연했다. (생각해 보라 10여 년의 꿈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좋았겠는지). HSBC에서 은행 계좌도 만든다. 은행 계좌 만드는 것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하루 만에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확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학생 Email 등의 신청을 위해 VCC에서 아이디 신청을 한다.

 

*RPI는 1824년에 설립이 되어 곧 200년이 되는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이다 (물론 경영, 미술 등의 다른 과들도 있다). 뉴욕 허드슨 강과 5 대호를 잇는 이리(Erie) 운하를 지으면서 필요한 많은 엔지니어 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2차 대전 직전 RPI는 원자력공학이 아주 강했는데 미국 국방부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었으나 당시 총장이 이를 거부하고 이 프로젝트가 MIT로 가게 되면서 MIT는 급성장을 하게 되고 RPI는 잘 모르는 그런 학교가 되어 버린 재미있는 역사가 있는 학교다. RPI는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Troy 도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캠퍼스가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역사만큼 건물이 아름답다. 

 

학교를 일단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위에서 소개한 바대로 학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아직까지는 방학이라 캠퍼를 정리하는 잔디깍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캠퍼스를 둘러보는데 어찌나 감동이 밀려 오던지, 전체적으로 한 바퀴를 둘러보고 앞으로 내가 오랜시간 보내게 될 경영대 건물도 가본다. 방학이라 스텝분들만 몇 명 있어서, 박사과정 담당 스텝할머니께 인사를 했다.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 금방 '아 이녀석 영어 잘 하는구나! (반어법이다)'라고 느끼셨을 것 같다. 그래서 쭉 둘러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경영대 프로그램이 크지 않아서 건물이 조그마하고 한국처럼 대학원 생을 위한 별도의 책상이 있다던지 공간이 있는게 아니라 박사과정 라운지에 책상 5개 정도가 끝인 건물이라 조금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다).

 

학생증 어찌나 좋았던지.. (감동의 도가니였음)
캠퍼스 중간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VCC 건물 (교회같이 보이나 컴퓨터 센터임)
투박해 보이나 전망이 끝내주는 중앙도서관 나의 최애장소
도서관 옆에 달걀을 품에 앉은 유리로된 건물은 실험공연장임 저기에 앉아서 트로이 시내를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임
이 건물역시 독특한 실내체육관과 Gym
언덕위에서 바라보는 경영대 건물, 작고 소박하니 참 정감이 가는.. 입구 바로 옆에 목련꽃이 예뻤던

캠퍼스를 한바퀴 돌자 허기가 진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체육관 옆 학생회관에서 미국에서 처음 먹는 식사를 하기로 한다. 내가 먹고 싶은걸 담으면 그걸 무게로 재서 계산을 하는 형식인데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담아 본다. 그런데! 이놈 짜기만 하고 엄청 비싸다. 물 하나랑 집었을 뿐인데 $16불이 넘게 나왔다. (그 다음부터 저기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다... 4년 동안 다섯번이 될까)

 

실망감이 가득하고 비쌌던 RPI 학생식당에서 첫 끼 (아마 졸업할때까지 가본 적이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미국 도착 첫날 아파트를 계약하다

 

이렇게 돌아봤는데도 아직 12시를 막 넘기는 시간이라 다음 숙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로 집 구하기 주변 사람들이 Troy는 겨울에 추위가 무시무시하다고 가능하면 Heat included 된 아파트를 추천하였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학교 캠퍼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Troy Gardens. 일단 와이프도 겨울에 올 예정이라 2 bed로 된 집을 찾았는데 Troy Gardens은 방이 언제 날지 모른다는 매니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또 아파트가 근처에 있냐고 물어보니 바로 위에 'Park Ridge'라는 아파트가 또 있다고 거기 가보라고 한다. 일단은 윤박사의 집이 Albany에 위치에 있어 통학도 불편하고 매번 라이드를 요청하기도 미안한 마음에 가능하면 오늘 아파트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라 거기도 가보기로 한다. 

 

두리번거리며 오피스를 찾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I'm looking for a 2-beds apartment"라고 매니저에게 말하니 여자 매니저가 마침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는데 보겠냐며 물어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Okay를 한다. 마침 또 3층 건물에 3층 코너 방이라고 하니 한국에서 층간 소음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아주 좋은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목조 건물이 많아 층간 소음이 아주아주 심각하다. 처음 집을 구하시는 분들은 참조를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보자마자 나름 깔끔한 집이라 바로 계약하기로 한다. 한국에서 들어갈 때 환전으로 조금의 여유자금을 들고 갔는데 그걸로 한 달치를 미리 Deposit을 걸고 Social Security Number도 없었던 나는 내 사정을 설명하자 학생들이 많은 캠퍼스 주변이라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던지 그렇게 하자고 하고 열쇠를 받는다. (실질적으로 도착 첫날에 바로 집을 계약하다 -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모했으나 차도 없고 정보도 없었던 나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첫날바로 계약해 버린 나의 Park Ridge 아파트 보이는 코너 3층이 그 집
오래된 집이긴 하나 3층에 정리가 깔끔히 되어 있었다 2 beds

우연한 만남 1

 

일단 제일 큰 숙제를 마쳤는데, 아까 윤 박사와 내리면서 새벽에야 들어온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키를 받아 놓긴 했는데, 문제는 Troy에서 Albany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집 계약을 하고 큰 돈을 지불한다고 (지금 기억에 한 달에 $750불 정도였던 듯) 안 되는 영어로 혹시나 사기 당하지 않을까 온 정신을 집중한데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시차적응이 안되는 몸이라 이미 피곤이 몰려왔다. 아파트에서 아까 처음 들렀던 Troy Gardens으로 내려오는 (학교 방향) 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가 또 나같이 방을 찾는 한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여기 오피스 어디 있는지 아니?"라고 묻길래 아까 방금 전에 와봤던 터라 "알려주겠다"라고 하니 차에 타라고 한다. 그 차를 타고 오피스에 도착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너는 어디서 왔고 이번 학기에 새로운 학생이냐 무슨 과정이냐 이런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물어보기에 답변을 해줬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통성명을 하고 나니 이 친구한테 부탁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당시 오피스는 방을 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매니저가 다른 학생 방을 보여준다고 30여분 뒤에 온다고 하자 나도 같이 기다려 주겠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눠봤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미국 다른 주에서 넘어왔는데, 공대 쪽에 박사과정을 왔다고 했다. 그렇게 20여분을 더 떠들고 나의 본심을 드러냈다. "저기 미안한데, 내가 친구 집에서 임시로 묶고 있는데 하필 알바니 쪽이야. 내가 어제 미국에 와서 길도 모르고 하는데 혹시 라이드 해줄 수 있겠어?"라며 물어봤더니 그 짧은 순간에 같은 박사과정으로의 동질감을 느꼈던지 "Of course!" 한다. 휴.... 그렇게 그 친구가 방을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Albany까지 데려다주며 "Good luck!"이라고 외쳐준다. 그리고 혹시 또 라이드가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그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그 호의가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윤 박사는 밤늦게 들어왔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었나 보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시차 적응을 못해 잠 못 이루다 오늘 한 일들과 집으로 돌아온 과정을 이야기하니, "형! 대단하신데요?" 하면서 웃겨 죽는다. ㅎ 내가 볼 때 나도 내 막무가내 정신이 웃겼다. 다음날 방 하나인 윤 박사에게 민폐를 줄 수 없고 나도 하루빨리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계약한 집으로 오늘 가겠다고 한번만 라이드를 해달라고 했다.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윤박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가진채 다음날 나는 앞으로 내가 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윤 박사 정말 감사해. 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너는 은인이야 :)

 

아파트의 첫날에 느끼는 '아 집에 가고 싶다'

 

윤 박사는 내가 싸온 짐을 즉흥적으로 계약한 집에 데려다주면서, "집 좋은데요?" 하고 돌아갔다. 이제 정말 혼자이다. 가서 잠은 자야 하지 않겠냐고 라면 이과 이불 몇 가지를 와이프가 싸줬는데 바닥에 잘 수는 없어서 윤 박사에게 에어매트리스를 당분간 빌려달라고 했다.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 짐을 정리를 한다. 그리고 삼일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해서 와이프가 싸준 라면을 끓여 먹기로 한다. 그래서 집 앞 RideAid에서 이것저것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다. 

첫 쇼핑으로 내가 구입한 것들... 첫 쇼핑치고 샴푸는 좋은걸 샀네. ㅎ

라면을 끓이려고 생각해보니, 그릇, 냄비, 수저 아무것도 없다. 다시 RideAid로 가서 큰 머그컵을 가지고 와서 전자레인지에 라면을 끓이려고 보니, 전자레인지가 없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어제 매니저가 이야기할 때 여기 전자렌지가 고장 나 당분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계약서를 쓰면서 했던 수많은 대화 중에서 살짝 스쳐 지나갔던 게 생각난다. 어쩌지..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앞에 집을 가보니 1 bed방이 빈방으로 문도 열린 채 있었다. 그 컵에 물을 넣고 봉지라면을 뜯고 앞에 집에 몰래 들어가 전자레인지로 라면을 돌린다 (혹시나 집에 냄새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배고픔은 이성적 생각을 이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매콤한 라면을 먹는다. 근심 걱정 덩어리 와이프는 그런 남편을 위해서 볶음 고추장을 넣어주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얼마나 맛있던지,

 

짐을 대충 풀고 라면을 먹고 나니 아직 점심도 전이다. 이제 곧 학교가 개강할 텐데 미시경제학 교수가 이미 숙제를 나어주셨다. (개강도 훨씬 전인데) 그래서 도서관을 가기로 한다. 이제 내 집도 있고 걸어서 학교를 간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모른다. 생각보다 잘 적응한 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앞으로 닥칠 일은 모른 채)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언덕 위에 자리 잡은 RPI 중앙도서관 3층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전경은 멋지기만 하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터라 아직까지 이메일 계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지 뭔가 제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생각해보니 윤박 사네에서 잘 도착했다고 와이프에게 전하긴 했지만 제대로 통화도 못하고 인터넷 사용도 아직 어렵다. 아.. 어쩌지..

 

중앙도서관에서 바라본 Troy 시내 전망이 정말 좋다. 앞으로 4년동안 저 자리에서 많이도 바라봤다.

밤늦게는 아직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 오후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온다. 새 집에서 처음으로 맞게 될 밤... 뭔가 잘 된다고 했더니, 가만히 보니 이 아파트는 화장실과 부엌의 등을 제외하고 각 방에는 전등이 없다. ㅡ.ㅡ;; 뭐 이런 일이. 화장실과 부엌 불을 켜고 나머지 책을 보고 또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둘째 날을 정리한다. - 책상 등은 하나 사야겠다는 한 채로,

 

아직 시차 적응 전이다. 새벽이 되었는데 눈이 확 떠진다. 그런 김이 아파트는 어떤지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아파트 규모가 꽤 컸는데 바로 뒤에 골프장을 겸하고 있는 Frear Park가 있다는 걸 지도로 봤는데 한번 가볼까 욕심을 내어 본다. 아직 여명이 밝지도 않고 겨우 사물만 바라볼 수 있는 정도지만 공기가 상쾌해서 맨손 스트레칭을 하면서 아파트 안쪽을 통해 반대쪽 공원을 향한다. 그런데! 저기 멀리서 시커면 큰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흠칫 놀랐는데,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보다 더 크고 뭔가 날카로운 뿔이 있는 시커먼 것이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큰 사슴이었다. 사슴이 항상 예쁘고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스름이 낀 새벽에 큰 뿔을 가진 덩치 사슴을 보니 어떠한 공포 영화 보다도 섬찟하다. '저 뿔에 찔리면 찍소리도 못하겠군'이라는 생각에 멀찍이 돌아가는데 이 놈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며 고개를 돌린다. ㅡ.ㅡ;; 무서울때 뛰고 싶지만 저 놈이 훨씬 더 빠를 것이고 놀래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놈을 계속 바라보며 멀찍히 돌아간다. 휴...

 

공원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떴고 그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고 짙은 푸르름이 너무나 좋았다. 역설적으로...

 

오늘은 아침 일찍 제대로 장을 보기로 한다. 4일째 라면과 물, 콜라, 시리얼, 우유 정도만 먹었더니 풀/과일이 먹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첫 식료품 장을 보기로 한다. 전등과 함께... 걸어서는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월마트가 있는데 거기를 가보자고 마음먹는다. 난생처음 미국 버스를 타고 Walmart로 향한다. Walmart에서 냄비, 책상 전등 등을 구매하였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풀/과일이 없다. 잉? 그래서 Walmart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Grocery'라는 단어도 몰라 "Fruit 어디 있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옆 블록에 Price Chopper에 가보라고 한다. 아! Walmart에 다 파는 게 아니구나...

 

냄비, 프라이팬, 책상 전등 등 이미 양손 무거운데 10여분을 걸어서 PriceChopper에 간다. 가서 과일과 계란을 사서 두 손 무겁게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아, 뭐 하나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정말! 집에 가고 싶다. ㅜ.ㅜ;;

 

그래도 계란 프라이와 함께 과일을 이것저것 먹으니 살 것 같다. 와이프에게 이메일이 왔을 텐데 이메일을 위해서는 학교를 "걸어서" 가야 하는데 이미 오늘의 진은 다 빠진 듯하다. 어쩌지 하며 노트북 놓을 때가 마땅치가 않아 창문틀에 얹어 놓았는데, 가만히 보니 암호가 걸리지 않은 와이파이로 뜨는 게 하나 있는데 한 칸이 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결하니 연결이 된다!, 띵! 메일이 날아온다. 아! 하면서 탄성이 나온다. 이제 학교까지 안 가도 이메일은 확인하겠다.

 

아직 미국에 온 지 일주일도 채 안 지났는데, 벌써 한 달은 된 것 같이 피곤하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루하루가 궁금하다.

 

미국에 온지 셋째날 내 방.. 웃음 밖에 안나온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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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부터는 사진과 함께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자료가 많이 없어져서 이전 자료에는 사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9년 제대를 한 이후에 American dream을 꿈꾼 뒤 10년이 지난 2009년 6월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여의치 않아 쓰디쓴 소주에 묻어버리길 몇 차례). 맨해튼은 아니지만 NY주의 주도 Albany에서 약 20여분 떨어진 Troy로 가기로 한 것이다. 2003년 석사과정을 하면서 Las Vegas에서 첫 번째 논문 발표 후 뉴욕에서 느낀 그 감정을 공유 드린 바 있다. 그때 뉴저지에서 친구를 만나며 이곳에 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바로 그 꿈을 꾸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욱더 감동이 더 했던 것 같다. 

 

감동적인 순간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었다.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오퍼를 금전적인 이유로 거절을 하고나서 상실감과 그 시점에서 전셋집 주인이 과도하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던 차에 (일부분 홧김에) 집을 사버린 걸 지난 편에서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집을 사고 한 달만에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돌려 이야기를 하자면, 미국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합격증을 받게 될지 몰랐으니,

 

일단 6월 초에 합격증을 받고 이 오퍼를 받겠다는 수락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냈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관련된 비자 처리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여 한국으로 보내준다. 수락 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냄과 동시에 집과 직장에 나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일단 내 그리고 처의 부모님들은 그간의 노력을 알아서 그러셨는지 그러라고 말씀을 해주셨고, 직장에서도 아쉽지만 열심히 해보라며 흔쾌히 응원을 해주셨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한 달 전에 이사한 집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였다. 

 

와이프가 당시 일을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8월 초를 미국 이주 날자로 생각하기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단 내가 먼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고 나머지 집/집기를 정리한 후에 12월에 와이프가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그 집을 전세로 놓고 갔으면 꽤 쏠쏠했겠지만 (한국의 집값 상승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그런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어서 정리를 하기로 했고 우리가 구매했던 그 부동산을 통해서 다시 판매를 하기로 이야기를 먼저 해두었다. 여하튼 큰 정리와 이사는 당분간 와이프가 거주를 해야 하기에 와이프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미국 갈 준비를 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한번 미국으로 들어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하거나 그럴 여유는 없었고, 일단 당해 합격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출국자 모임에 참여하고 그 때 알게 된 친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어떻게 준비할지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RPI의 경우는 출국자 수가 적어서 그때 3명인가 4명인가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 석사과정으로 합격한 한 친구와 12월 와이프가 올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하고 - 이는 일단은 금전적인 이유도 컸고, 내가 미국을 전혀 몰랐기에 미국 생활을 해본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나는 일단 학교에서 보내준 학생비자 관련 서류로 가족 모두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신분을 Clear 하는데 먼저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렀던지 학교 측은 성과 이름을 바꾸어 써와서 대사관에서 서류를 다시 해오라 하여 급하게 학교로 연락해서 새로운 서류를 받아서 비자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 가서 볼 몇 권의 책들과, 당분간 사용할 국제 운전면허증, 그리고 힘겹게 받았던 F1 비자를 몇 가지 준비하는 게 다였다. 나중에 정리를 하겠지만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한데, 지인에게 인사를 전할 시간도 뭔가 영어를 더 공부할 시간도 없었기에 그저 문제없이 미국까지 갈 준비를 하는 게 다였다. 또 하나 준비한 것이 통신수단,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라 한국에서 미리 미국 전화번호를 개통할 수 있는 '힐리오'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핸드폰도 미리 준비를 하였다 (이제는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행기 티켓도 시간이 촉박해서 회사를 통해서 알게된 여행사를 통해서 편도 비행기를 발권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언제 또 오겠냐 싶은 마음에 와이프와 3박 4일 남도 한 바퀴를 돈다. 바빠 죽겠는데 준비는 안 하고 웬 남도 여행을 했냐고 하시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때라도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와야 한다. 큰 가방 두 개에 가서 당분간 입을 옷가지 외에 다른 걸 준비하지 못하고 8월 10일 ICN->ALB까지 내 인생에 새로운 첫 발을 내딧는다. 당시에 델타로 편도를 발권하였는데 그 발권 표를 받았을 때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으로 델타 제일 싼 비행기로 끊으니, ICN->NRT(일본 나리타)->EWR(뉴어크)->ALB(알바니) 일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확인한 것 중에 하나가 당시 대학원 학생회장이었던 윤성호 (지금은 Ph.D. & MD 를 모두 소유한 능력자) 박사에게 미리 연락해서 픽업을 부탁했었다. 그리고 집을 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양 집안 식구가 배웅해 주는 와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나도 함께 눈물 흘릴까 그 자리가 불편해 재빨리 공항 입국장으로 향했다. 2번의 트랫짓이 남아있기에 긴장을 한 상태로 (여기서 긴장은 뭐 놔두고 오는 거 없나?.. 이런).. 그런데 웬걸 첫 번째 나리타 공항에서부터 미국행 비행기가 연착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 EWR에서 ALB로 가는 연결 편이 문제이고,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윤성호 박사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음은 까맣게 잊은 채

 

다행히 무사히 입국심사를 끝내고 뛰어가며 연결 편 비행기를 찾았더니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찌해야 하며 긴 Customer service 줄 뒤에 서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미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당시에는 몰랐지만 미국의 악명 높은 Airline Customer Service)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구나 하며 하루 만에 가슴은 콩닥거리고 좌절의 벽을 느끼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To albany!'라고 하는 것이다. (공항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고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로 갔더니 다행히 연결편도 연착이 되어 오히려 몇 시간을 더 기다려 한밤중에 타야 했다. 그때 불안한 인터넷 연결(당시만 해도 공항에서 인터넷이 아주 불안했다)을 겨우 연결해 성호에게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다.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들어가라.라고 전했다.

 

무거운 짐을 안고 결국 그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얹었고, 어두워 밖이 잘 안 보이는 가운데 드디어 내가 앞으로 생활을 하게 될 Albany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근데 웬걸, 그 친구가 6시간이 넘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연신 그랬더니 윤 박사 왈 "알바니 공항이 인터넷이 잘 돼요.." 하며 웃는 것이다. 그렇게 꼬박 24시간을 넘겨 겨우 생활할 알바니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는 긴 여정 중 첫번째 코스 이제 정말 떠나게 되다니

 

일본 공항에서 기다릴때는 나의 혼란한 마음과 같이 비가 내림 (연착되어서 한없이 기다림)

 

EWR에서 ALB까지 데려다 주었던 프로펠러 비행기 (처음 타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 같은 경우는 합격을 하고 오퍼를 수락하고 나서 무엇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만일 내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영어와 박사과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통계 등의 준비를 더했을 것 같다. 특히 영어의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생활영어와 당장 미국에서 겪게 될 약간의 기본적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 같다. 물론 다 겪으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늦게 가족을 데리고 전혀 미국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이제 정말 외국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도착해서 2주에서 한 달 정도는 굉장히 충격이 큰데, 미국의 생활방식이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가본 적이 없다면 이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종교가 있는 경우에는 한인교회 등에서 제공하는 정착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윤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지금껏 미국 생활의 은인으로 감사해한다. (다시 한번 고맙다 윤 박사!).

 

합격하면 큰 산을 넘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꽤 스릴 있는 예고편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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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유학과는 조금 떨어진 그 당시 즈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나의 경우는 그때가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기였는데, 아마 일반적인 인생의 패턴을 따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것들이 때론 유학을 고민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뤄보기로 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4년 12월에 한국기계연구원에 들어갔을때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29세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구소에 들어오시는 연구원 분들은 대부분 박사를 마치기 때문에 연배가 좀 있는 편이 많은데, 아예 병역특례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원래 어릴 적 꿈이 과학자였는데, 물론 흰가운을 입고 이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소에서 일을 하니 일종의 과학자가 아니던가 - 물론 사회과학자도 과학자이긴 하지만.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주변에서도 그렇고 아주 많이 좋아해 주셨다 특히 부모님의 경우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시골에서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이 취업문턱에서 번번이 좌절을 하던 아들이 우연히 (*지난 편 참조) 석사를 하게 되고 마치자마자 연구소에 들어갔던 것도 그렇지만 연구단지 주변의 좋은 환경이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곳에서 좋은 직장을 얻은 아들이 되었으니 당연히 좋아해 주셨었다. 나도 좋긴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30년을 근무한다는 거지?'라는 생각과 '어릴 적 꿈을 이뤘는데 뭔가 허탈한데?'라는 두 가지 생각이 많았다.

 

아마 가족들은 거기서 평생을 다닐 것으로 생각했고 ('평생직장이긴 하다') 빨리 집을 사서 이제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특별할 것없는 우리네 부모님 들이었다. 그 당시 테크노밸리라고 하는 대단위 단지가 1차, 2차 이렇게 개발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석사 때 선배형이 분양받은 전셋집 (36평)을 싸게 주셔서 혼자서 그 넓은 집에서 살며 일하는 삶도 나쁘진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흡족하셨고 다음 단계를 내심 기대하시지 않으셨던가 싶다. 내 마음속도 일단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았지만, '일단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자리 잡았던 것 같다. 1년 즈음이 지나자 주변의 많은 박사님 들과 나름 자신의 한계를 느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기 시작했고, 2006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일부분 유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스펙을 잘 알기에 미래는 불투명했고, 지금 맡은 일은 망쳐가면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유학을 준비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를 하는 걸 알게 되신 부모님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러냐"며 말씀을 하시고 명절 때 집에 찾아가 피곤해하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바드를 가지 않았겠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이제 정착하고 덜 피곤하게 살았으면 하는 아들이 일 끝나고 공부하며 피곤해하는 모습이 부모님으로 그리 달갑진 않으셨을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을 한참 진행하고 그것들이 마무리 될 무렵,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현, 와이프), 그리고 전 편에서 0.5승이라고 그간의 결과로 첫번째 합격증을 받아 든 순간이 한참 만날 시점이라 나 스스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와이프는 그렇게 노력한 결과인데 가라고 했지만, 금전적 부담과 꿈 그리고 연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와이프나 처가 식구들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랜 유학을 꿈을 접는 모습이 짠해 보이셨던지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혼자와 둘은 유학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실제로 유학을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 (공대 중심이라 주로 남학생 들이었음)의 경우 아주 극심한 외로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겨울의 날씨가 어둡고 우울하고 많은 눈이 내리는 곳에 가게 된다면 더욱더 그러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때 그 친구들이 나를 참 부러워했다. "형은 외롭지는 않으시잖아요" 하면서. 그런데 결혼을 한 후 같이 오게 되면 외로움은 덜하지만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일단은 돈문제, 학교에서 생활비가 1인이 생활할 정도의 생활비가 지원된다. 그리고 한 명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발전하는 유학생의 모습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엄청 노력하지 않는 이상은 그냥 따라온 사람이 되어 그 자괴감이 크다. 아울러 영어도 잘 안되고 친구도 가족도 없이 공부에 바쁜 다른 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길이 맞을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가던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가능하면 날씨 좋은 곳으로 가라'이다. - 나중에 유학생활을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겠다.

 

그렇게 2007년 말 결혼을 하고 결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2차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나중에 와이프는 이 일을 두고 배신감에 부들부들했다며 아직도 놀린다). 이제 가족이 있고 혹시나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금전적인 부분이 더욱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생긴다. 전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차 유학 준비의 결과와 학교 선택에 주요한 요인을 제공한다.

 

   1.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S&T Policy에 펀딩 없이 합격 - GIT는 학교도 아주 좋은뿐더러 이 학교가 위치한 애틀랜타는 도시도 크고 한국 커뮤니티가 미국에서 4번째로 크고, 한국 직항편도 있고, 집 가격도 싼 편이다. 여름에 더운 것만 빼면 아주 좋은 조건

   2.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경영학과 펀딩 $20,000불 합격 - SIT는 GIT에 비해서 학교의 인지도가 떨어지나 위치가 맨해튼이 내려다 보이는 허드슨 강변에 위치해 맨하튼으로의 접근이 용이하고 월가 등의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겠다는 장점이 있으나.. 맨하튼이 내려다 보이는 곳인 만큼 집값이 살벌함

   3.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경영학과 펀딩 $17,000불 합격 - SIT를 고민하면서 결국 수락을 하지 못한 건 살벌한 집값과 생활비 때문이었는데, 이에 비해 뉴욕 주도인 Albany에서 20여분 떨어진 Troy라는 시골(?)에 위치한 학교라 렌트비 (당시 2 베드가 대략 1000불 가량)를 제외하고 약간이 생활비라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을 보태 부부가 살 수도 혹시나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음. 아울러 학교도 SIT처럼 나 역시 처음 들어 봤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 역사가 200년이 조금 안 되는 학교라 왠지 믿음이 갔지만 결국 주요한 요인은 생활이 가능하냐 여부.

 

SIT 합격을 받고 나서 와이프와 둘이 엄청나게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을 하고 논의를 한 끝에 결론은 현재 재정상태면 어렵겠다는 결과를 내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마시며 포기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전셋집 주인 (앞서 이야기한 선배네 집 아님)이 말도 안 되게 전세금을 올려 달라는 바람에 집을 사버리고 말았고, 6월이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무렵 RPI에서 합격자 통지가 왔을 때는 SIT를 고민했던 적이 있던 터라 맨해튼 바로 옆보다 $3,000 불 차이인데 시골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유학을 결정했으나 결혼을 하고 나면 생각할 것이 배로 늘어난다. 나의 나의 부모님이 허락을 하더라도 와이프와 그의 부모님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경우는 그 간의 노력을 아셨기에 아쉬움은 감추지 않으셨지만 반대를 하시진 않으셨다. 결국 결혼하고 집도 사서 이제는 평범하게 여생을 살겠구나 하는 나의 부모님의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고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야 하는 섭섭함은 나가는 날까지 감추지 못하셨다. 연구원에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주셨다. '너, 일도 못했는데 잘되었다'는 반응은 다행히 아니셨고 -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름 일을 열심히 했다 -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그만두는 거니 잘해보라며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셨다. 물론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이제 아주 작디작은 문을 하나 열고 큰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독자들도 느끼시겠지만 이미 지치는 것 같다. 만일 유학을 안 가는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쉽게 백 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가야 한다는 건, 단 한 가지 이기에 이 결정을 하고 수행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나의 경우처럼 가족에 이러한 길을 간 사람이 없어 어떤 길인지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경우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까지 했다면 안 되는 이유만을 나도 모르게 늘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지금 시점에서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잘 한 결정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유학 나오기 직전에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결정이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일단 나는 죽어라 할 테지만 결과가 지금보다 나빠질 수도 있어, 만일 그런 일이 있더라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사실 박사가 끝날 무렵 나의 모습은 이런 호기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그것을 보실 수 있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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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학을 생각하면 영어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무렵까지 영어에 아예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팝을 듣는 걸 좋아했고, 영어 공부하고 단어 외우는걸 꽤나 즐겼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문법 단어만 죽어라 했었다. 실제로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랑 영어를 해본 게 군대 제대를 하고 나서이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아주 활발하거나 Youtube 채널이나 Netflix 같은 영어 콘텐츠를 접하는 게 아주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영어도 졸업이나 취업을 위해 공부한 거지 굳이 유학을 위한 건 아니었다). 요약을 하자면 인도에 갈 때까지 남들이 하는 정도의 정규 영어과정을 밟았다고 보면 된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인도에 갔을때 미드 Friends를 접하게 되는데, 당시 특별히 할 것이 많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일상생활 영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Friends가 상당히 좋은 영어공부 재료가 되었다. 프렌즈는 대략 시즌 1의 5개 정도 에피소드가 넘어가면 그 스토리에 빠져서 계속해서 볼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시즌 1 5개의 에피소드를 처음에는 자막 없이, 다음은 영어자막, 다음은 한국 자막 순으로 3번씩 돌려서 보기 시작했다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다 5개 정도 에피소드를 넘어서서는 그냥 스토리에 빠져 한글자막을 켜놓고 (당시에 듣기가 거의 안되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아침드라마 빠져보듯 보기 시작했다. 기억이 정확히는 안 나지만 당시에 시즌 5인가 6까지 CD로 구워서 들고 온 친구가 있어서 곧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시즌을 다 보게 된다. 근데 더 이상의 콘텐츠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즌1~시즌5까지 다시 한번 정주행을 하게 되고 그게 3번 째인가가 되었을 때 그들의 말이 하나둘씩 적응(들린다기보다는 적응이라는 말이 맞는 듯 목소리나 각 캐릭터의 성향을 이해하면서)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한글자막을 보다가 가끔 재미있는 대화 상황이 나오면 그 부분을 자막 없이 한번 보고, 그러다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 영어 자막을 보고 확인하는 과정을 계속하게 되었다. (일단 공부도 재미있고 봐야 한다). 그렇게 각 에피소드를 대략 5번~6번 정도를 보니 처음에 비해서 상황에 대한 이해나 듣기가 한결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건데, 재미없는 대화 상황을 무작정 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는데, 일단 콘텐츠가 재미있어야 여러 번 보거나 들을 수 있고, 단순히 스크립트를 보거나 글자를 보고 대화 상황을 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아! 그래서 이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이렇게 표현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더 와서 머리에 잘 남는다. 그 이후에도 시즌 10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굳이 화면을 보지 않고 집안일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 계속해서 틀어 놓는다. 통계는 내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각 에피소드 당 적어도 50번은 본 것 같다. (2020년 1월 1일부터 Netflix에서 빠지게 되어 아마 이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내 친구들)

 

* 프렌즈는 시즌 10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1994년 처음 방송되어 각 시즌당 18개에서 25개까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총 236의 에피소드 * 50 을 해보라.. 엄청난 시간을 들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영어공부의 한 고비가 넘어가니 조금은 듣기가 수월해졌던 것 같고 나중에 토플이나 GRE준비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물론 시험으로 제일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건 토익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니 100% 영어수업을 했던 석사과정에서 발표를 할 때 자신감과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석사과정을 하면서 영어로 수업을 하긴 했지만 그때 아주 많이 영어가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한국사람들끼리 (교수님들 그리고 학생들) 영어로 수업하는 게 꽤나 이상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능력으로 아주 고급의 지식을 다루는 건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 특히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것 느낌이다. 석사 과정이 끝날 무렵 취업을 해야 하기에 토익을 준비했는데, 대략 850~890점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900점을 넘어서고 싶었는데 정말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넘지 못해 결국은 한 달 동안 토익 학원을 수강을 했는데 그때 시험 치는 요령을 배워 바로 940점인가로 마무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점수는 한국기계연구원에 입사할 때 쓰였고, 마지막 면접 때 영어공부를 어떻게 했냐고 한 분이 물어보셨는데 Friends이야기를 했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토플(* 그전에 편입 관계로 토플을 몇 번 쳐본 적이 있음)과 GRE를 준비했는데, 많은 분들이 추천한 바와 같이 일단 GRE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경영대학 같은 경우는 MBA나 박사과정 공히 GMAT을 주로 받는데, GMAT을 쳐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GMAT은 영어+논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던 나는 GRE가 맞다고 판단해 GRE를 준비하였다. GRE는 무거운 엉덩이가 중요하다 (2006~7년 이야기라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일단 시험의 성격이나 요령, 공부 방법을 전혀 몰랐기에 학원을 다니기로 하고 이왕 다닐 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서울에 주말반 GRE 학원을 다니기로 한다. 그래서 주중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 집에 와서 영어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수업을 오전/오후에 듣고 저녁에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을 두 달 정도 계속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시험에 대한 감이 생기자 학원을 다니기를 그만하고 (GRE학원도 비용이 만만치 않고 매주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금전적으로 부담이 컸다) 홀로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 커뮤니티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어 지방에 있어도 제법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출연연구원의 기획팀의 경우, 각종 자료 요청이 많아 야근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하루의 일정을 구체화할 수 없어서 일 야근이 있던 없던 단어 공부를 계속했다. 하루의 대략 일정은 6시 30분 기상, 8시 ~ 저녁 9시 (야근이 많아 들쭉날쭉 이었는데 대략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면 평균적인 근무시간이었다) 그 이후 대략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2시 정도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이 과정이 꽤나 고통스러웠는데 GRE 시험 자체의 비용도 만만치 않아 준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분들이 가능하면 짧고 Intensive 하게 공부해서 빨리 끝내라라고 조언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GRE는 대략 암묵적 턱걸이 점수를 받고 그만하기로 하였다.

 

GRE 이후에 토플 시험을 쳤는데 아무래도 큰 산을 넘고 그 뒤의 언덕은 얕잡아 보기 일수다. 하지만 시험의 형태가 다르기에 조금 다른 준비가 필요하고 토플도 미니멈 점수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공부 방법은 GRE와 같은 시간대에 공부를 회사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하였고 GRE보다는 더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진행하였다. 예전에 편입 준비를 하면서 토플 학원에 다닌 적이 있기에 시험의 형식이 낯설지는 않아서 별도의 학원은 다니지 않고 인터넷의 자료와 토플 공부책을 구입하여 준비하였다. 

 

서울에 영어학원에서 풀타임으로 GRE나 토플 공부를 하는 학생(팀)들을 많이 보았는데, 풀타임을 공부해도 쉽지 않은 준비기간이고,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짧은 시간 내에 끝내라고 조언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건 나중에 미국에서 교수가 되든 간에 그때만큼 집중에서 영어공부를 하지 않기에 그 시간이 단순히 입학용 시험 점수를 위해 한다는 마음 가짐보다는 입학 후 닥치게 될 훨씬 더 큰 산을 넘는데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공부하면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교수가 되고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영어점수에 대해서 질문을 종종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Minimum 점수를 넘긴 했는데 조금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Admission을 받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질문이 많았다. 물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학생을 선발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대학원 유학이라는 것은 (특히, 박사과정) 교수 입장에서 자신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연구할 동료를 찾은 과정과 마찬가지로 본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원의 경우에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영어에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 지원을 하기에 영어 점수가 미니멈이 된다면 영어보다는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스펙을 만드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아울러 영어점수가 어느 정도 되면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영어는 모국어가 아닌 이상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또한, 나는 영어공부가 시험/공부용과 회화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플/GRE와 같은 영어공부는 입학 때도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 논문을 읽거나 쓰는 등의 공적인 업무에서 많이 도움이 된다. 즉, 입학시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의 경우 경영학이라 신문을 많이 보려고 하는데 이런데에서도 시험/공부용 영어공부가 도움이 많이 된다. 하지만, 아마도 많은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시험/공부용에 집중을 하고 회화용 영어공부는 조금 등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제 당신이 Admission을 받으면 미국 사회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고 회화는 생활 모든 면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아울러 나중에 미국에서 잡을 잡길 원한다면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이때 회화, 발표 능력은 아주아주 중요하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이 글을 다 읽을 때쯤 아마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어려운 일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는 게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음을 하는 바람이다. 지치고 힘이 들 때 우리가 왜 이 길을 가려고 했는지, 이 길의 끝에 어떠한 결실이 있을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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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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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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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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