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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참 사이가 좋았고 서로 도움이 많았던 동기들은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

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엠블런스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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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영어...

내가 속한 경영대 건물에는 내가 입학할 당시 총 3명의 한국인(Korean American 포함)이 있었는데, 교수님이 두 분 계셨고 그리고 학생은 유일하게 나였다. 학교도 크지 않았을 뿐더러 대학교, 대학원을 통틀어도 50명이 될까말까 였으니 한국인이 많지는 않은 학교였다 (사실 잘 모르시기도 하고) 그래서 언어적인 문제가 정말 힘들었는데, 특히나 외국인과 말한 경험도 별로 없을 뿐더러 미국 생활 자체가 처음이라 더욱더 벽이 크게 느껴졌었다. 그런 환경을 이야기 하니 룸메이트는 "형은 어학연수랑 박사과정이랑 동시에 하는거네요!" 하기도 했었다. 사실 그런 마음이었다. 박사과정을 어학연수랑 동시에 진행하다니..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적인 부분이 이해가 안되니 언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느꼈지만, 처음에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 얼마나 심장이 쿵쾅 거리던지.. 그래서 입구에서 속으로 연습하고 간다. 'Americano please...' 'Americano please...' 그렇게 점원 앞에 다가가면 또 스타벅스의 점원들은 친절하다. 웃으며 말을 건넨다. "How're you doing. Today, I love sunshine out there" 원래 시나라오는 (뭘 줄까? 라고 물으면 어, Americano please)로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날씨를 꺼내니 뭐라고 답변을 해야할지 몰라.."Yes..."하고는 머리속이 폭발해 버린다...!#$@#$^@#$^@!! 오랜시간을 머뭇거리다 "Americano please"라고 했더니 "What size"한다. 또 버벅버벅 (무슨 사이즈? 라지, 빅, 스몰.. 사이즈에 대한 온갖 영어 단어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라지"라고 하자, 점원은 "Grande is okay?"라며 묻는다. '그란데? 이거 무슨 greater 같은 의미인가?' 라는 세상에 온갖 복잡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내 머릿속은 마치 엘론 머스크가 SpaceX의 펠콘 로켓을 쏘았다가 정확한 위치로 착륙시키는 복잡한 물리적 수학적 기계적 공식과 계산들로 가득하다. 그냥 커피 한잔 시키는 것 뿐인데.. 멍한 얼굴로 그 자리를 일단 모면하고 싶어.."(주저하다).. Yes" 한다. 이제 끝났겠거니 생각했더니 이 밝은 미소가 예뻤던 점원은 그냥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You owe me XXX Dollars."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인가? 머릿속으로 다시 펠콘 로켓을 쏜다. '그러니까 You는 너고 Owe는 빌리다 인데, 나는 돈을 빌린적인 없는데? 무슨말인지?...'라고 한참을 로켓을 발사하는데 점원이 내 손에 들고 있는 현금을 가르치면서 웃는다. '아! 돈달라는 이야기구나' (*참고로 물건 등을 살 때 얼마예요. 혹은 얼마를 더 내세요 할때 저런 표현을 쓴다). 그깟 스타벅스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진짜 살떨리는 경험이다. 결국 스타벅스의 물산 사기 프로젝트는 미국에 온 지 두달만에 그래도 적절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4개월이 지나서야 Drive through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지난 편, 김연아의 연기를 보러 갔던 Lake Placid에서 함께 갔던 분과 함께 샌드위치 가게를 갔었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들고오며 "아 내가 바나나 밀크쉐이크를 시켰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줬다"며 "미국에서 산 지가 몇년이 되었는데도 내가 먹고 싶은것도 못시킨다"고 한참을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바꿔달라고 하면 바꾸어 주는데 그냥 먹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유학생활에서 뭉친 한국인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아 나는 원래 혼자 있길 좋아하고 책 읽는걸 좋아하니 미국에서 잘 살아남을 수도 있을꺼야', 혹은 '어차피 공부하러 온 거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열심히 해서 영어도 잘하고 살아남겠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미국에 처음 학회차 와서 맨하튼을 왔을때 당시 뉴저지에서 살고 있었던 혜정이와 인석 형님 부부가 주변을 구경 시켜주었는데, 맨하튼은 맨하튼대로 좋았지만, 뉴저지에 가보니 '와! 이거 영어 못해도 살겠는데?'라고 느낄 만큼 어딜가나 한국어가 통했다. 그걸 보면서, 어학연수든 유학이든 자칫 잘 못하면 시골에서 마치 서울로 학교를 간 국내유학생 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외국에서 일년동안 어학연수를 해도 별로 늘지 않았다는 영어실력을 한탄하는 친구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기본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한국인 유학생 동기들은 (한참이나 어린 나이들이었지만) 참 힘이 많이 되었다. 그들도 힘겹게 대학원과정을 하고 있기에 다들 버거웠지만 한 주에 한번 주말에 맥주한잔 기울이면서 외국인으로써의 삶이 주는 '이주의 바보들' 시리즈 이야기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또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사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이 있으면 된다. 

 

미국에 온 첫 날 공항라이드를 물론 미국의 처음을 열어주었던 윤성호 박사는 RPI에서 공학박사를 마치고 다시 Medical Doctor를 따서 현재 의사 레지던트로 열심히 살고 있고, 그날 이후로 뉴욕에 갈 때마다 연락해서 만나는 인연이 되었고, 미국에서 처음 김치찌게를 끓여줬던 박승호 연구원은 그해말 연수기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며 그간 함께 일했던 Dr. Sanderson과 나중에 내 지도교수가 된 Dr. Simons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처음부터 해서 미국에 지내는 초기에 나를 도와주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이 되어 함께 하고 있다. 9월부터 12월 말까지 룸메이트가 되어 내가 미국 생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동형군은 현재 한국에서 아주 바쁘게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잠시 거실을 빌려 살았고 첫 학기 내가 지칠때 마다 새벽에 함께 새벽공기를 마시며 차를 몰고 나가 던킨도넛에서 커피쿨라타를 사먹었던 지민군은 지금 Las Vegas에서 공연장 엔지니어로 활약하고 있다. 같은 나이로 기계과 박사과정이었던 정준규 박사는 삼성전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우리 주말모임의 홍일점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던 천재소녀 이미지 박사는 현재 하바드에서 바이오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같이 찍은 사진은 별로 없지만,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고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며 의지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참 똑똑한 친구들과 함께했었구나 하며 정말 당신들 덕분에 미국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잘 하길 빈다. 

 

박승호 연구원 한국 돌아가는 날, Dr.Sanderson, Dr.Simons와 함께
윤박사 졸업식
미국을 알게 해 준 지민군

마무리 되는 첫 학기

정말 첫 학기는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끝에 치다르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퍼를 정리하며, 한 학기 동안 살아남았다며 스스로에게 '너 고생했다'고 몇 번을 다독거렸다. 수학이나 통계에 조금더 공부해 놓을껄 부터 시작해서 나는 영어를 왜이리 못할까 하며 읽던 책을 던져버리길 수십번은 했던 것 같다. 큰 결심을 하고 돌아보지 말자며 한국에 있던 집도 돈도 다 정리해 버린 나에게 외국생활에 엄청난 공부 부담은 하루에도 에베레스트 산을 수십번 오를 만큼 감정의 기복이 컸던 것 같다. 그랬기에 함께 하는 동지들(대학원생)이 더욱더 귀하기도 했고, 다행이 한국인은 없었지만 박사과정 동기들이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나이도 제일 많았고 영어도 제일 못했기에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나도 뭔가 역할을 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받은거에 비해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감사한 녀석들.. 영어수업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수업을 열심히 들어 선생님도 잘 했다고 했고, 지난번 시험에서 1등을 했던 과목은 결국 1등으로 마무리 하였다. 물론 경영 기본서를 많이 읽어야 했던 수업은 그래도 A-를 받았고, 통계를 잘 못 했지만 겨우겨우 A를 받았다. 경제학은 아쉽게 B+로 마무리. 박사는 다 A 받는거 아니냐고 혹시 생각했다면 '아니네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첫 학기 고생했다. 나.

 

재 결합하는 가족

학기가 끝날 무렵 한국에서도 와이프가 눈물로 모든 가전을 정리하고 (중고로 정리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상을 이용해서 뭔가를 판매하려면 눈물난다. 정말 똥값이라고 보면 된다. 처음에 얼마에 샀는지는 의미가 없다), 나머지 짐들을 해외이사를 시키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에는 룸메이트와 거실에 지민군이 (잠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사를 나가야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맨하튼으로 내려가며 두 룸메이트들에게 와이프가 오니 집 정리를 잘 부탁한다고 부탁하고 차를 몰고 내려왔다. 내려온 김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맨하튼에서 보내기로 한다. 뮤지컬 라이온 킹도 보고 맨하튼도 구경하기로 한다. 8월 초에 미국으로 돌아왔으니 5개월 만에 만남이다. 

 

커다란 짐을 낑낑대며 공항 출국장에 나타난 와이프를 데리고 뉴저지 (맨하튼 호텔은 너무 비싸) 뉴왁 근처의 호텔에 체크인 했더니 그간 할말이 많았던지 혼자서 집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하루를 쉬고 다음날 맨하튼으로 넘어가 내가 좋아하는 감미옥에서 설렁탄을 먹고 뮤지컬을 즐겁게 보고, 유명한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본다. 정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난다. 다음날 Hmart에서 장을 보고 뉴욕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I-87을 타고 Albany로 향한다. 뉴저지 까지는 집도 많고 한데, 뉴욕주에 접어 들자 마자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웃으며 "여기서 부터 2시간 30분 동안 아마 집이 안보일꺼야"하니 웃음이 사라지는 것 같다. 피곤해선지, 두려움에선지 올라가는 내내 별 말이 없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이 지난 후 집에 도착한다. 다행히 룸메이트들이 집을 잘 정리해놓았다. 저녁 무렵 도착하니 우중충한 날씨게 여기저기 눈이 지저분히 녹아 있고 도시도 우중충 하고 어둡다. 집을 둘러보고 와이프는 씻으러 들어갔고 한참을 안나오기에 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가봤더니 욕실에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물이 안나와".. 하며,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는데 저녁에 맥주한잔을 마시며 그간 한국에서 혼자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고, 미국에 오는 것도 여기서 앞으로의 생활이 두려웠는데 뜨거운 물이 안나오자 왠지모를 서러움이 터진 모양이다 (*미국의 많은 가구들은 워터히터-물을 담아서 데워주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물을 오랫동안 쓰면 다시 데워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시골 도시들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어둡고 건물들도 오래되어 좀 답답한 그런 느낌이 있다. 특히나 밤에는 대부분의 건물에 불빛이 꺼져 한국 도시의 밤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 점도 일조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이제 가족으로써의 유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애정하는 감미옥 설렁탕
도서관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겨울에는 우중충 하다)
룸메이트들이 정리해 놓은 부엌 (이제 집기가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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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에서 진보는 다양한 체제를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하고, 보수는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이나 태도로 아주 간단히 정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이 이미 경험하고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전공하는 경영학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미 오랜 기간 성장을 해온 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미 성장한 기업의 경우는 기존에 가진 것들 (이건 단순히 제품이나 기업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프로세스든 Tangible / Intangible 자원을 포함한다) 때문에 소위 '관성(Organizational Inertia)'라는 것이 생기는데 그러한 관성이나 지식이나 자원의 stickiness (이동하지 않으려는 경향)으로 인해 스타트업에 비해서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면이 있다. 

 

오늘은 재미없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2009년 8월 유학생활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사실 첫걸음부터 만만치가 않았는데, 오늘은 그 처음 좌충우돌 초기 적응기를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 영어를 배우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하나의 메시지는 이왕 마음을 먹었으면 하루라도 일찍 오시는 게 낳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가만히 보니, 어른과 아이들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호기심 이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쪽팔림'이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해도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고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더해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냄을 알 수 있었다. 어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부끄러워'한다는 점인데, 소위 '쪽 팔리'는게 제일 싫은 것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불 킥!' 같은 신조어도 나오지 않았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도, 미국 문화를 모른다는 것도 모든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늦게 배우나 보다. 

 

이 정도로 서론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첫날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윤성호 박사의 오랜 기다림과 도움 덕분에 그날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윤성호 박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윤성호 박사는 본가가 플러싱(NY주의 한인타운 지역)이고 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갖춰져 있다기보다는 집에서 정말 잠만 자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에어매트리스도 깔아주었다. 짐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어차피 바로 집을 구해서 나갈 예정이었기에) 바로 골아 떯어졌다. 당시 윤성호 박사는 Albany 다운타운이었는데 여기서 Troy까지는 차로 대략 20여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겨우 몸을 정리를 하고 내가 꿈에도 그리던 박사과정을 하는 교정을 같이 가기로 했다. 윤성호 박사도 당연히 연구실로 출근하는 길이니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착했던 윤 박사는 연신 어떻게 돌아다니시려고 그러나, 나중에 갈 때 본인 실험이 언제 끝날지 몰라 어떻게 라이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등의 말을 하였는데 더 이상 피해를 주기 싫어 내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했다.(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가자마자 학생증을 만들고 (일단 학교시설을 들어가려면 필요하기 때문에) 윤 박사와는 저녁에 만나기로 한다. 학생증을 찍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미소가 만연했다. (생각해 보라 10여 년의 꿈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좋았겠는지). HSBC에서 은행 계좌도 만든다. 은행 계좌 만드는 것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하루 만에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확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학생 Email 등의 신청을 위해 VCC에서 아이디 신청을 한다.

 

*RPI는 1824년에 설립이 되어 곧 200년이 되는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이다 (물론 경영, 미술 등의 다른 과들도 있다). 뉴욕 허드슨 강과 5 대호를 잇는 이리(Erie) 운하를 지으면서 필요한 많은 엔지니어 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2차 대전 직전 RPI는 원자력공학이 아주 강했는데 미국 국방부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었으나 당시 총장이 이를 거부하고 이 프로젝트가 MIT로 가게 되면서 MIT는 급성장을 하게 되고 RPI는 잘 모르는 그런 학교가 되어 버린 재미있는 역사가 있는 학교다. RPI는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Troy 도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캠퍼스가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역사만큼 건물이 아름답다. 

 

학교를 일단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위에서 소개한 바대로 학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아직까지는 방학이라 캠퍼를 정리하는 잔디깍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캠퍼스를 둘러보는데 어찌나 감동이 밀려 오던지, 전체적으로 한 바퀴를 둘러보고 앞으로 내가 오랜시간 보내게 될 경영대 건물도 가본다. 방학이라 스텝분들만 몇 명 있어서, 박사과정 담당 스텝할머니께 인사를 했다.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 금방 '아 이녀석 영어 잘 하는구나! (반어법이다)'라고 느끼셨을 것 같다. 그래서 쭉 둘러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경영대 프로그램이 크지 않아서 건물이 조그마하고 한국처럼 대학원 생을 위한 별도의 책상이 있다던지 공간이 있는게 아니라 박사과정 라운지에 책상 5개 정도가 끝인 건물이라 조금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다).

 

학생증 어찌나 좋았던지.. (감동의 도가니였음)
캠퍼스 중간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VCC 건물 (교회같이 보이나 컴퓨터 센터임)
투박해 보이나 전망이 끝내주는 중앙도서관 나의 최애장소
도서관 옆에 달걀을 품에 앉은 유리로된 건물은 실험공연장임 저기에 앉아서 트로이 시내를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임
이 건물역시 독특한 실내체육관과 Gym
언덕위에서 바라보는 경영대 건물, 작고 소박하니 참 정감이 가는.. 입구 바로 옆에 목련꽃이 예뻤던

캠퍼스를 한바퀴 돌자 허기가 진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체육관 옆 학생회관에서 미국에서 처음 먹는 식사를 하기로 한다. 내가 먹고 싶은걸 담으면 그걸 무게로 재서 계산을 하는 형식인데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담아 본다. 그런데! 이놈 짜기만 하고 엄청 비싸다. 물 하나랑 집었을 뿐인데 $16불이 넘게 나왔다. (그 다음부터 저기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다... 4년 동안 다섯번이 될까)

 

실망감이 가득하고 비쌌던 RPI 학생식당에서 첫 끼 (아마 졸업할때까지 가본 적이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미국 도착 첫날 아파트를 계약하다

 

이렇게 돌아봤는데도 아직 12시를 막 넘기는 시간이라 다음 숙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로 집 구하기 주변 사람들이 Troy는 겨울에 추위가 무시무시하다고 가능하면 Heat included 된 아파트를 추천하였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학교 캠퍼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Troy Gardens. 일단 와이프도 겨울에 올 예정이라 2 bed로 된 집을 찾았는데 Troy Gardens은 방이 언제 날지 모른다는 매니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또 아파트가 근처에 있냐고 물어보니 바로 위에 'Park Ridge'라는 아파트가 또 있다고 거기 가보라고 한다. 일단은 윤박사의 집이 Albany에 위치에 있어 통학도 불편하고 매번 라이드를 요청하기도 미안한 마음에 가능하면 오늘 아파트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라 거기도 가보기로 한다. 

 

두리번거리며 오피스를 찾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I'm looking for a 2-beds apartment"라고 매니저에게 말하니 여자 매니저가 마침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는데 보겠냐며 물어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Okay를 한다. 마침 또 3층 건물에 3층 코너 방이라고 하니 한국에서 층간 소음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아주 좋은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목조 건물이 많아 층간 소음이 아주아주 심각하다. 처음 집을 구하시는 분들은 참조를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보자마자 나름 깔끔한 집이라 바로 계약하기로 한다. 한국에서 들어갈 때 환전으로 조금의 여유자금을 들고 갔는데 그걸로 한 달치를 미리 Deposit을 걸고 Social Security Number도 없었던 나는 내 사정을 설명하자 학생들이 많은 캠퍼스 주변이라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던지 그렇게 하자고 하고 열쇠를 받는다. (실질적으로 도착 첫날에 바로 집을 계약하다 -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모했으나 차도 없고 정보도 없었던 나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첫날바로 계약해 버린 나의 Park Ridge 아파트 보이는 코너 3층이 그 집
오래된 집이긴 하나 3층에 정리가 깔끔히 되어 있었다 2 beds

우연한 만남 1

 

일단 제일 큰 숙제를 마쳤는데, 아까 윤 박사와 내리면서 새벽에야 들어온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키를 받아 놓긴 했는데, 문제는 Troy에서 Albany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집 계약을 하고 큰 돈을 지불한다고 (지금 기억에 한 달에 $750불 정도였던 듯) 안 되는 영어로 혹시나 사기 당하지 않을까 온 정신을 집중한데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시차적응이 안되는 몸이라 이미 피곤이 몰려왔다. 아파트에서 아까 처음 들렀던 Troy Gardens으로 내려오는 (학교 방향) 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가 또 나같이 방을 찾는 한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여기 오피스 어디 있는지 아니?"라고 묻길래 아까 방금 전에 와봤던 터라 "알려주겠다"라고 하니 차에 타라고 한다. 그 차를 타고 오피스에 도착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너는 어디서 왔고 이번 학기에 새로운 학생이냐 무슨 과정이냐 이런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물어보기에 답변을 해줬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통성명을 하고 나니 이 친구한테 부탁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당시 오피스는 방을 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매니저가 다른 학생 방을 보여준다고 30여분 뒤에 온다고 하자 나도 같이 기다려 주겠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눠봤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미국 다른 주에서 넘어왔는데, 공대 쪽에 박사과정을 왔다고 했다. 그렇게 20여분을 더 떠들고 나의 본심을 드러냈다. "저기 미안한데, 내가 친구 집에서 임시로 묶고 있는데 하필 알바니 쪽이야. 내가 어제 미국에 와서 길도 모르고 하는데 혹시 라이드 해줄 수 있겠어?"라며 물어봤더니 그 짧은 순간에 같은 박사과정으로의 동질감을 느꼈던지 "Of course!" 한다. 휴.... 그렇게 그 친구가 방을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Albany까지 데려다주며 "Good luck!"이라고 외쳐준다. 그리고 혹시 또 라이드가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그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그 호의가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윤 박사는 밤늦게 들어왔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었나 보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시차 적응을 못해 잠 못 이루다 오늘 한 일들과 집으로 돌아온 과정을 이야기하니, "형! 대단하신데요?" 하면서 웃겨 죽는다. ㅎ 내가 볼 때 나도 내 막무가내 정신이 웃겼다. 다음날 방 하나인 윤 박사에게 민폐를 줄 수 없고 나도 하루빨리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계약한 집으로 오늘 가겠다고 한번만 라이드를 해달라고 했다.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윤박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가진채 다음날 나는 앞으로 내가 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윤 박사 정말 감사해. 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너는 은인이야 :)

 

아파트의 첫날에 느끼는 '아 집에 가고 싶다'

 

윤 박사는 내가 싸온 짐을 즉흥적으로 계약한 집에 데려다주면서, "집 좋은데요?" 하고 돌아갔다. 이제 정말 혼자이다. 가서 잠은 자야 하지 않겠냐고 라면 이과 이불 몇 가지를 와이프가 싸줬는데 바닥에 잘 수는 없어서 윤 박사에게 에어매트리스를 당분간 빌려달라고 했다.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 짐을 정리를 한다. 그리고 삼일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해서 와이프가 싸준 라면을 끓여 먹기로 한다. 그래서 집 앞 RideAid에서 이것저것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다. 

첫 쇼핑으로 내가 구입한 것들... 첫 쇼핑치고 샴푸는 좋은걸 샀네. ㅎ

라면을 끓이려고 생각해보니, 그릇, 냄비, 수저 아무것도 없다. 다시 RideAid로 가서 큰 머그컵을 가지고 와서 전자레인지에 라면을 끓이려고 보니, 전자레인지가 없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어제 매니저가 이야기할 때 여기 전자렌지가 고장 나 당분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계약서를 쓰면서 했던 수많은 대화 중에서 살짝 스쳐 지나갔던 게 생각난다. 어쩌지..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앞에 집을 가보니 1 bed방이 빈방으로 문도 열린 채 있었다. 그 컵에 물을 넣고 봉지라면을 뜯고 앞에 집에 몰래 들어가 전자레인지로 라면을 돌린다 (혹시나 집에 냄새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배고픔은 이성적 생각을 이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매콤한 라면을 먹는다. 근심 걱정 덩어리 와이프는 그런 남편을 위해서 볶음 고추장을 넣어주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얼마나 맛있던지,

 

짐을 대충 풀고 라면을 먹고 나니 아직 점심도 전이다. 이제 곧 학교가 개강할 텐데 미시경제학 교수가 이미 숙제를 나어주셨다. (개강도 훨씬 전인데) 그래서 도서관을 가기로 한다. 이제 내 집도 있고 걸어서 학교를 간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모른다. 생각보다 잘 적응한 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앞으로 닥칠 일은 모른 채)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언덕 위에 자리 잡은 RPI 중앙도서관 3층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전경은 멋지기만 하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터라 아직까지 이메일 계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지 뭔가 제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생각해보니 윤박 사네에서 잘 도착했다고 와이프에게 전하긴 했지만 제대로 통화도 못하고 인터넷 사용도 아직 어렵다. 아.. 어쩌지..

 

중앙도서관에서 바라본 Troy 시내 전망이 정말 좋다. 앞으로 4년동안 저 자리에서 많이도 바라봤다.

밤늦게는 아직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 오후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온다. 새 집에서 처음으로 맞게 될 밤... 뭔가 잘 된다고 했더니, 가만히 보니 이 아파트는 화장실과 부엌의 등을 제외하고 각 방에는 전등이 없다. ㅡ.ㅡ;; 뭐 이런 일이. 화장실과 부엌 불을 켜고 나머지 책을 보고 또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둘째 날을 정리한다. - 책상 등은 하나 사야겠다는 한 채로,

 

아직 시차 적응 전이다. 새벽이 되었는데 눈이 확 떠진다. 그런 김이 아파트는 어떤지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아파트 규모가 꽤 컸는데 바로 뒤에 골프장을 겸하고 있는 Frear Park가 있다는 걸 지도로 봤는데 한번 가볼까 욕심을 내어 본다. 아직 여명이 밝지도 않고 겨우 사물만 바라볼 수 있는 정도지만 공기가 상쾌해서 맨손 스트레칭을 하면서 아파트 안쪽을 통해 반대쪽 공원을 향한다. 그런데! 저기 멀리서 시커면 큰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흠칫 놀랐는데,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보다 더 크고 뭔가 날카로운 뿔이 있는 시커먼 것이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큰 사슴이었다. 사슴이 항상 예쁘고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스름이 낀 새벽에 큰 뿔을 가진 덩치 사슴을 보니 어떠한 공포 영화 보다도 섬찟하다. '저 뿔에 찔리면 찍소리도 못하겠군'이라는 생각에 멀찍이 돌아가는데 이 놈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며 고개를 돌린다. ㅡ.ㅡ;; 무서울때 뛰고 싶지만 저 놈이 훨씬 더 빠를 것이고 놀래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놈을 계속 바라보며 멀찍히 돌아간다. 휴...

 

공원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떴고 그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고 짙은 푸르름이 너무나 좋았다. 역설적으로...

 

오늘은 아침 일찍 제대로 장을 보기로 한다. 4일째 라면과 물, 콜라, 시리얼, 우유 정도만 먹었더니 풀/과일이 먹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첫 식료품 장을 보기로 한다. 전등과 함께... 걸어서는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월마트가 있는데 거기를 가보자고 마음먹는다. 난생처음 미국 버스를 타고 Walmart로 향한다. Walmart에서 냄비, 책상 전등 등을 구매하였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풀/과일이 없다. 잉? 그래서 Walmart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Grocery'라는 단어도 몰라 "Fruit 어디 있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옆 블록에 Price Chopper에 가보라고 한다. 아! Walmart에 다 파는 게 아니구나...

 

냄비, 프라이팬, 책상 전등 등 이미 양손 무거운데 10여분을 걸어서 PriceChopper에 간다. 가서 과일과 계란을 사서 두 손 무겁게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아, 뭐 하나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정말! 집에 가고 싶다. ㅜ.ㅜ;;

 

그래도 계란 프라이와 함께 과일을 이것저것 먹으니 살 것 같다. 와이프에게 이메일이 왔을 텐데 이메일을 위해서는 학교를 "걸어서" 가야 하는데 이미 오늘의 진은 다 빠진 듯하다. 어쩌지 하며 노트북 놓을 때가 마땅치가 않아 창문틀에 얹어 놓았는데, 가만히 보니 암호가 걸리지 않은 와이파이로 뜨는 게 하나 있는데 한 칸이 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결하니 연결이 된다!, 띵! 메일이 날아온다. 아! 하면서 탄성이 나온다. 이제 학교까지 안 가도 이메일은 확인하겠다.

 

아직 미국에 온 지 일주일도 채 안 지났는데, 벌써 한 달은 된 것 같이 피곤하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루하루가 궁금하다.

 

미국에 온지 셋째날 내 방.. 웃음 밖에 안나온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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