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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가족이 재 결합을 하니 불안하지만 뭔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첫 학기가 마무리되고 두 번째 학기는 조금 더 심화된 방법론과 본격적으로 전공분야에 관련된 논문을 세미나 형태로 읽기 시작한다. 수업은 여전히 4개 Doctoral Research Method II, Strategic Management Theory Seminar, IT and Organization Design PhD, 그리고  Seminar in Organization Theory PhD. 이렇게 네 과목을 듣게 되었다. 영어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더 이상 영어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2010년 봄학기는 전략, Information system, 조직 이론의 과목들에서 주로 매주 최근 관련된 토픽의 논문 4~5개를 읽고 교수와 함께 토론하는 수업 형식이다. RPI의 경우는 크게 재무와 경영 두 개가 있어 1년 차 2학기부터 바로 절반에 가까운 동기들이 나누어졌다. 그래서 교수 1명과 5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는 방식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방법론을 제외하고 3과목을 4~5개 논문을 읽어서 summary를 하고 critique을 하는 것이다. 매주 12개 논문이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한 개의 논문을 보면 그 논문에서 틀이된 이론이 있는데 일단 이 이론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린다. (이래서 공부도 하던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에 논문 하나를 정리하는데도 버겁다. 

 

예전 블로그 글을 보니 2010년 1월 25일에 학기 시작! 이라고 쓰고 이틀 뒤에 포스팅에서 이렇게 써놨다.

"

바야흐로,
끝내주게,
힘들구만,

^_^;;

"

단지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아마 이때 힘들게 느꼈던 것은 논문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 주가 되는 이론들에 대해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니 이를 다른 책을 뒤져보고, 무슨 말인지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리뷰 페이퍼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어진 하나의 논문을 위해서 몇 배나 되는 책과 논문을 뒤져봐야 하는 상황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 가설을 읽어 보고, 나는 어떤 가설을 세울 수 있을지 경험에 비추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고 그걸 정리한 다음, 데이터와 방법론 섹션으로 넘어간다. 일단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힘든데 그래서 방법론 수업을 듣는 것이다. 그래도 수업에서 듣는 거랑 실제 논문에서 쓰는 거랑은 제법 차이가 있어서 거기서 또 많은 시간을 쓰고, 그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고 결과를 도출했는지 읽어 본다. 그리고 결론과 토론 부분을 읽는다. 전체를 읽고 다시 조금 정리를 한다. 이런 사이클을 돌다 보면 하나의 페이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틀이 넘기도 했다 (배경 지식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힘들긴 했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고, 첫 학기에는 전반적인 내용을 커버하는 반면에 두 번째 수업에서는 각 분야별로 포커스 된 논문을 읽다 보니 아! 하는 부분도 많이 있고, 그걸 비평하다 보면 이런저런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친다. 어쩌다 보면 스스로 '아! 대박'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조금 더 찾아보면 누군가가 하고 있긴 하다).

 

팁으로 읽은 논문들을 기록해 놓는 노트를 하나 마련하면 좋다. 그리고 각 논문을 도식화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논문이 인과관계를 구명하기에 도식화가 가능해진다. *경영 분야의 경우), 방법론과 측정방법 그리고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면 도움이 된다. 또한, 이를 측정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한데 데이터를 어디서 구했고 그 데이터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정리해 놓으면 도움이 된다. (물론 나도 생각은 했는데 꾸준히 하기 쉽지가 않다).

 

스스로의 상상이겠지만, 자신만의 지식이 아주 크게 성장하는 것 같고 나 스스로도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기 때문에, 참 행복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을 실제로 테스트하고 작성을 하려고 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아이디어 내는 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각 세미나 수업에서는 학기말 페이퍼를 요구하는데 실제로 자신만의 논문을 써보는 것이다. 데이터는 당장 구하기 힘드니 데이터 부분을 제외하고. 그 와중에 IT 세미나 수업에는 예전 연구소 때 설문조사했던 자료가 하나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교수와 이야기를 하였고 고 Ravichandran 교수님이 HICSS (Hawaii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ystem Sciences) 학회에 내보라고 해서 내었는데 결국 2학기가 조금 지나고 다행히 accept을 받았다. 이렇게 이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신의 텀페이퍼를 발전시켜서 자신의 논문 타픽을 정하기도 하고, 이때 대략 지도 교수님도 대략 선정을 하게 된다. 

 

커피와 함께 쌓여있는 읽어야할 논문들

2 학기가 끝나면 (1년 차가) Microeconomics와 Research Method 두 과목으로 Qualifying Exam을 치게 하는데 이게 엄청 스트레스이다. 물론 열심히 하면 된다지만, 시험 범위가 뭐 전체 이런 형식이라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에 그냥 무작정 처음부터 보고, 또 보고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박사과정의 경우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이렇게 매년 Filtering을 하는 시험 혹은 연차 페이퍼를 쓰게 한다. 그게 지식의 습득을 확인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듣기에는 박사과정이 긴 과정이기 때문에 맞지 않으면 빨리 나가서 다른 길을 모색하라는 의미에 서라는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은 바 있다. 생각해보라 고시에도 장수생들이 있는데 박사과정도 능력이 안되어 막연히 질질 끌 수는 없는 일이니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RPI에 있을 때는 Qualifying Exam으로 1차를 거르고, 2차는 field exam이라고 해서 교수님이 대략 30~40개 정도 되는 논문/책을 주고 이것을 읽고 관련된 자신만의 페이퍼를 발전시키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고통스럽다).

 

학교마다 이 절차를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어서 듣기로는 매년 50% 정도를 탈락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학교 선정을 하실 때 이런 학교의 분위기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 중에 이 Qual이 안되어 한국에 돌아가신 분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어드미션 포스팅을 할 때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만, 그 뒤에는 엄청 큰 산이 있다는 것이다. 입학한다고 다 졸업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내 개략적 생각에 입학에서 졸업까지 성공적으로 되는 경우가 60%가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험을 위해서 여름 방학 내내 아침에 일어나 도서관에 가고 와이프가 싸주는 도시락 까먹으면서 공부하고 저녁에 잠시 들어와 저녁 먹고 휴식을 취하다 다시 학교로 가서 자정이 넘게 까지 저 두 과목을 풀고 또 푸는 과정을 거쳤다. 뭐 다행히 시험은 패스했지만, 동기 중에 한 친구는 패스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다행히(?) 내치지는 않았고 방법론을 처음부터 다시 듣게 하여 결국에는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학교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아는 학교만의 분위기인데, 직장인에 가족을 데리고 목숨 걸고 오는 분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통 Qual에서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학교에 다시 지원해서 박사과정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학교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시험을 일주일 앞둔 포스팅에서 그 심정을 엿볼 수 있어서 가져와 본다.

 

"퀄이 이번 주로 다가왔다
며칠 동안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뭔가 허전한 이 기분은
인생을 살면서 기백 번은 더쳤을 시험에도 더 심해져만 간다
아마 조금은 부담감 때문일 런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머리는 멍 몸은 축 쳐져 있다
간신히 오늘 수업 준비를 끝내고 조금 널브러져 있기로 한다"

 

1년차를 마치고 Qualifying exam 치기 전에 동기들 모여서 함께 식사 (시험 전이라 얼굴들이 밝네)

정말 공부 이야기밖에 없네요.. 진짜 공부 열심히 하셨겠어요! 하시겠지만,

다음 편에는 이제 노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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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외국에 대한 생각이나 접촉할 기회가 거의 전무 했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가끔 나오는 유명한 내한 가수들의 인터뷰 정도(?)가 교과서 외에 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문화였고, 나보다 선배들이 가끔 수기에서 언급하던 AFKN이나 영어 방송을 들은 적도 접근하는 방법도 몰랐다. 다만, 입대해서 논산 훈련소를 마칠무렵 카투사를 뽑았는데, 그때 차출되어 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아! 저 줄로 갔으면 영어를 더 잘 했을텐데'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 실제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학생 중에서 카투사 출신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제대를 하고 유럽배낭여행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국을 경험해본 기억이었고, 아직도 싱가포르를 거쳐서 British Airway를 타고 영국 히드로 공항으로가는 비행기안에서 승무원이 '음료 뭐줄까?' 라는 질문에 '코카콜라!'라고 답변했던게 아마 내 인생에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하였던게 아닌가 싶고, 영국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할때 심장이 쿵쾅거리며 버벅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던 그때 조금이나마 싼 가격으로 밥을 먹으려고 찾아다녔던 학교들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지금도 여행갈 때 오래된 학교를 찾는건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그렇게 학교에 대한 묘한 매력과 햇볕을 받으며 잔디밭에서 책을 보고 있던 교수들,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었다.

 

 

영국 배낭여행, 참으로 멋있었던 캠프릿지 캠퍼스
독일의 전통 깊은 훔볼트 대학에서 학생식당이 열리길 기다리며

 

거기에 군대 시절 일과시간을 끝내고 가장 열심히 보았던 드라마가 '카이스트'였는데 물론 드라마지만 추파춥스 캔디를 물고 로봇을 만들며 무언가 몰두하는 모습들에서 꽤나 희열을 느꼈었는데, 그 두가지의 경험이 합쳐서 이후 미국대학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변변치 않은 토플 점수에 유학원을 끼지 않고 (강남에 있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 입이 떡벌어져 그냥 스스로 진행해 보기로 한다), 스스로 틈틈이 하는 아르바이트 중간중간 홈페이지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10여군데 학교에 넣었는데, 사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군대 가기 전의 나의 학점과 커트라인을 겨우 넘기는 토플점수 (500 점 정도 였던 듯)와 형편없었던 자기소개서는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이리라. 또, 그때는 외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막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금액을 쏟아가며 비싼 전형료를 부담하고 토플 점수를 별도로 우편으로 붙여가며 지원했지만, 되었더라도 학비가 지원되지 않았을테고 장학금을 받기 어려웠을테니 미국의 주립대학을 간다하더라도 out of state tuition에다가 생활비까지 하면 감히 살아남지 못했을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도전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전부 리젝을 받은 좌절스러운, 군대 제대이후 첫 프로젝트의 쓰디쓴 패배의 잔을 들수밖에 없었고, 이후 복학하여 그 형편없는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유학에 대한 꿈은 마음 한구석 깊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그라든 줄 알았던 생각이 스물스물 다시 피어오른건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석사과정에서다. 그때 한참 드라마 Friends에 빠져있었던 시기라 1년차에 교수님께 대뜸 "미국보내주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이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럼 논문을 써라. 그럼 학회를 한번 가보자"라고 말씀을 하셨다. 논문이라고는 읽은 적도 거의 없는데 어떻게 쓰는건지 알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냥 닥치는대로 한국 논문들을 읽고 영어논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뭐가 서론이고 뭐가 방법론이고 뭐가 결과인지 당연히 알지 못한채 그냥 소설 쓰듯 뭔가 계속 썼다. 물론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덕분에 한 학기 장학금 못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논문 제출 일주일 전부터 교수님의 끊임없는 야단과 수정이 반복되는 나날이었고, 일주일을 거의 밤을 새다시피 억지로 만들고 만들어 겨울 우리랩 최초의 랩전체 Las Vegas Conference를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이다 (2003년 겨울)

 

 

 촌놈의 Las Vegas 첫 방문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Las Vegas 학회의 첫 발표

 

그 학회에 붙여서 사실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Friends의 배경이 되었던 NYC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회가 끝나고 뉴욕에 며칠만 들렀다 오겠다고 다시한번 용감하게 말씀드렸는데 그러라고 말씀해 주셨다. Friends로 세뇌가 되어서 였던지, LA와는 다른 뭔가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서 뉴욕을 참 좋아하게 되었고, 그때 인석이 형과 혜정이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수이 뉴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뉴욕에서의 첫 목적지는 바로 '감미옥' (지금은 그 위치를 이전하였음). 그 구수한 설렁탕을 잊을수가 없었고 그 첫 맛을 잊지 못해 10년뒤 유학생활 할때 자료조사차 아침 첫 버스를 타고 뉴욕에 내려올때 마다 그 집에서 시작을 했었다. 더 놀랐던 건 형이 감미옥 바로 앞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밥값보다 주차비가 더 많이 나와 '역시 뉴욕 b'하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던가 Time Square를 둘러보느라고 길거리에 대놓았던 형의 차가 견인되어 뉴욕시의 첫날밤을 견인차 보관소에서 찾느라 진땀 빼고 근사한 한끼 식사 비용을 날려 미안함을 가지게 된건 에피소드랄까..


그때 부터 아마 미국 그리고 뉴욕을 나도 모르게 꿈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첫 여행에서 뉴욕에 빠져 셔터를 연신 눌러대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맨하튼 첫 여행은 잘 마무리가 되었고, 그 10년뒤 나는 다시 JFK(뉴욕공항)로 다시 내 생활을 시작하게 될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 오랜기간 드라마로만 봤던 뉴욕을 직접 가본다는 것 외에 뉴욕은 그냥 좋았다. 드라마에서 나온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과도 같은 느낌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구나, 언젠가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mpire State Building에서
대략 10년 후에 이곳에서 박사논문 마무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New York Public Library
역시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Columbia University
선이 아름다운 브룩크린 브릿지
브룩크린 브릿지에서 바라본 Empire State Building
직접보면 반할 수 밖에 없는 뉴욕의 야경

나에게 미국의 경험을 선사해준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석사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석사과정에서 IT Business 라고 지금에 와서 보면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에 가까운 전공을 한 내가 왜 갑자기 기계연구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라. 뭐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같은 대전 연구단지에 속해 있고 입사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마지막 대규모 면접에서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왜 우리(기계연구원)가 IT Business을 전공한 나를 채용해야하는지를 설명해봐라 라는 의심많은 면접관들의 질문에 되도록 열심히 답변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결국 채용이 되었고 정신없이 나의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정부출연연을 보면 크게 연구직과 행정직으로 직군을 구분할 수 있고, 나는 연구기획 분야로 하여 연구직으로 입사를 하였다. 당시 원장님이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기 위해 '미래기술연구부'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어 나를 1번으로 발령을 내어주셨는데, 나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박사님들이 한분두분 조인을 하여 조직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찾는 Skunk works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자신이 공부한 분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다른 박사님들의 발표를 지켜 보면서 (사회과학 전공한 사람이 공학의 박사분들이 하는 발표를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나도모르는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 비해서 부서가 꽤 젊은 연구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롭고 좋았는데, 그때 일끝나고 시간이 나면 으레 소주 한잔씩 하던 형님들이 지금 성균관대의 김근형 교수님과 원광대의 조영삼 교수님이었다. 두 분과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당시 형님들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아마 어리지 않았을까)로 꽃을 피웠는데, 그때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박사를 하신 김근형 교수님이 나의 과거 이야기 관심사를 듣더니 유학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해주셨다. 물론 KAIST에서 박사를 하셨던 조영삼 교수님도 "그래 그래라"라며 힘들 북돋아주셨다. 

 

다 주변에 상대하는 분들이 Ph.D. 이다 보니 Peer pressure가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 속해 있다 보니 스스로도 '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굳건해 졌다. 물론 처음에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KAIST에서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경영학관련 스쿨이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어 지원이 어려웠고 나중에 기술경영학과가 생기긴 했지만, 그건 이미 내가 미국 박사과정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시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미국생활에 대한 꿈, 유학에 대한 꿈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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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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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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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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