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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영어...

내가 속한 경영대 건물에는 내가 입학할 당시 총 3명의 한국인(Korean American 포함)이 있었는데, 교수님이 두 분 계셨고 그리고 학생은 유일하게 나였다. 학교도 크지 않았을 뿐더러 대학교, 대학원을 통틀어도 50명이 될까말까 였으니 한국인이 많지는 않은 학교였다 (사실 잘 모르시기도 하고) 그래서 언어적인 문제가 정말 힘들었는데, 특히나 외국인과 말한 경험도 별로 없을 뿐더러 미국 생활 자체가 처음이라 더욱더 벽이 크게 느껴졌었다. 그런 환경을 이야기 하니 룸메이트는 "형은 어학연수랑 박사과정이랑 동시에 하는거네요!" 하기도 했었다. 사실 그런 마음이었다. 박사과정을 어학연수랑 동시에 진행하다니..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적인 부분이 이해가 안되니 언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느꼈지만, 처음에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 얼마나 심장이 쿵쾅 거리던지.. 그래서 입구에서 속으로 연습하고 간다. 'Americano please...' 'Americano please...' 그렇게 점원 앞에 다가가면 또 스타벅스의 점원들은 친절하다. 웃으며 말을 건넨다. "How're you doing. Today, I love sunshine out there" 원래 시나라오는 (뭘 줄까? 라고 물으면 어, Americano please)로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날씨를 꺼내니 뭐라고 답변을 해야할지 몰라.."Yes..."하고는 머리속이 폭발해 버린다...!#$@#$^@#$^@!! 오랜시간을 머뭇거리다 "Americano please"라고 했더니 "What size"한다. 또 버벅버벅 (무슨 사이즈? 라지, 빅, 스몰.. 사이즈에 대한 온갖 영어 단어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라지"라고 하자, 점원은 "Grande is okay?"라며 묻는다. '그란데? 이거 무슨 greater 같은 의미인가?' 라는 세상에 온갖 복잡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내 머릿속은 마치 엘론 머스크가 SpaceX의 펠콘 로켓을 쏘았다가 정확한 위치로 착륙시키는 복잡한 물리적 수학적 기계적 공식과 계산들로 가득하다. 그냥 커피 한잔 시키는 것 뿐인데.. 멍한 얼굴로 그 자리를 일단 모면하고 싶어.."(주저하다).. Yes" 한다. 이제 끝났겠거니 생각했더니 이 밝은 미소가 예뻤던 점원은 그냥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You owe me XXX Dollars."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인가? 머릿속으로 다시 펠콘 로켓을 쏜다. '그러니까 You는 너고 Owe는 빌리다 인데, 나는 돈을 빌린적인 없는데? 무슨말인지?...'라고 한참을 로켓을 발사하는데 점원이 내 손에 들고 있는 현금을 가르치면서 웃는다. '아! 돈달라는 이야기구나' (*참고로 물건 등을 살 때 얼마예요. 혹은 얼마를 더 내세요 할때 저런 표현을 쓴다). 그깟 스타벅스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진짜 살떨리는 경험이다. 결국 스타벅스의 물산 사기 프로젝트는 미국에 온 지 두달만에 그래도 적절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4개월이 지나서야 Drive through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지난 편, 김연아의 연기를 보러 갔던 Lake Placid에서 함께 갔던 분과 함께 샌드위치 가게를 갔었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들고오며 "아 내가 바나나 밀크쉐이크를 시켰는데, 바닐라 밀크쉐이크를 줬다"며 "미국에서 산 지가 몇년이 되었는데도 내가 먹고 싶은것도 못시킨다"고 한참을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바꿔달라고 하면 바꾸어 주는데 그냥 먹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유학생활에서 뭉친 한국인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아 나는 원래 혼자 있길 좋아하고 책 읽는걸 좋아하니 미국에서 잘 살아남을 수도 있을꺼야', 혹은 '어차피 공부하러 온 거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열심히 해서 영어도 잘하고 살아남겠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미국에 처음 학회차 와서 맨하튼을 왔을때 당시 뉴저지에서 살고 있었던 혜정이와 인석 형님 부부가 주변을 구경 시켜주었는데, 맨하튼은 맨하튼대로 좋았지만, 뉴저지에 가보니 '와! 이거 영어 못해도 살겠는데?'라고 느낄 만큼 어딜가나 한국어가 통했다. 그걸 보면서, 어학연수든 유학이든 자칫 잘 못하면 시골에서 마치 서울로 학교를 간 국내유학생 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외국에서 일년동안 어학연수를 해도 별로 늘지 않았다는 영어실력을 한탄하는 친구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기본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한국인 유학생 동기들은 (한참이나 어린 나이들이었지만) 참 힘이 많이 되었다. 그들도 힘겹게 대학원과정을 하고 있기에 다들 버거웠지만 한 주에 한번 주말에 맥주한잔 기울이면서 외국인으로써의 삶이 주는 '이주의 바보들' 시리즈 이야기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또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사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이 있으면 된다. 

 

미국에 온 첫 날 공항라이드를 물론 미국의 처음을 열어주었던 윤성호 박사는 RPI에서 공학박사를 마치고 다시 Medical Doctor를 따서 현재 의사 레지던트로 열심히 살고 있고, 그날 이후로 뉴욕에 갈 때마다 연락해서 만나는 인연이 되었고, 미국에서 처음 김치찌게를 끓여줬던 박승호 연구원은 그해말 연수기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며 그간 함께 일했던 Dr. Sanderson과 나중에 내 지도교수가 된 Dr. Simons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처음부터 해서 미국에 지내는 초기에 나를 도와주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이 되어 함께 하고 있다. 9월부터 12월 말까지 룸메이트가 되어 내가 미국 생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동형군은 현재 한국에서 아주 바쁘게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잠시 거실을 빌려 살았고 첫 학기 내가 지칠때 마다 새벽에 함께 새벽공기를 마시며 차를 몰고 나가 던킨도넛에서 커피쿨라타를 사먹었던 지민군은 지금 Las Vegas에서 공연장 엔지니어로 활약하고 있다. 같은 나이로 기계과 박사과정이었던 정준규 박사는 삼성전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우리 주말모임의 홍일점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던 천재소녀 이미지 박사는 현재 하바드에서 바이오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같이 찍은 사진은 별로 없지만,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고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며 의지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참 똑똑한 친구들과 함께했었구나 하며 정말 당신들 덕분에 미국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잘 하길 빈다. 

 

박승호 연구원 한국 돌아가는 날, Dr.Sanderson, Dr.Simons와 함께
윤박사 졸업식
미국을 알게 해 준 지민군

마무리 되는 첫 학기

정말 첫 학기는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끝에 치다르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퍼를 정리하며, 한 학기 동안 살아남았다며 스스로에게 '너 고생했다'고 몇 번을 다독거렸다. 수학이나 통계에 조금더 공부해 놓을껄 부터 시작해서 나는 영어를 왜이리 못할까 하며 읽던 책을 던져버리길 수십번은 했던 것 같다. 큰 결심을 하고 돌아보지 말자며 한국에 있던 집도 돈도 다 정리해 버린 나에게 외국생활에 엄청난 공부 부담은 하루에도 에베레스트 산을 수십번 오를 만큼 감정의 기복이 컸던 것 같다. 그랬기에 함께 하는 동지들(대학원생)이 더욱더 귀하기도 했고, 다행이 한국인은 없었지만 박사과정 동기들이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나이도 제일 많았고 영어도 제일 못했기에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나도 뭔가 역할을 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받은거에 비해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감사한 녀석들.. 영어수업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수업을 열심히 들어 선생님도 잘 했다고 했고, 지난번 시험에서 1등을 했던 과목은 결국 1등으로 마무리 하였다. 물론 경영 기본서를 많이 읽어야 했던 수업은 그래도 A-를 받았고, 통계를 잘 못 했지만 겨우겨우 A를 받았다. 경제학은 아쉽게 B+로 마무리. 박사는 다 A 받는거 아니냐고 혹시 생각했다면 '아니네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첫 학기 고생했다. 나.

 

재 결합하는 가족

학기가 끝날 무렵 한국에서도 와이프가 눈물로 모든 가전을 정리하고 (중고로 정리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상을 이용해서 뭔가를 판매하려면 눈물난다. 정말 똥값이라고 보면 된다. 처음에 얼마에 샀는지는 의미가 없다), 나머지 짐들을 해외이사를 시키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에는 룸메이트와 거실에 지민군이 (잠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사를 나가야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맨하튼으로 내려가며 두 룸메이트들에게 와이프가 오니 집 정리를 잘 부탁한다고 부탁하고 차를 몰고 내려왔다. 내려온 김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맨하튼에서 보내기로 한다. 뮤지컬 라이온 킹도 보고 맨하튼도 구경하기로 한다. 8월 초에 미국으로 돌아왔으니 5개월 만에 만남이다. 

 

커다란 짐을 낑낑대며 공항 출국장에 나타난 와이프를 데리고 뉴저지 (맨하튼 호텔은 너무 비싸) 뉴왁 근처의 호텔에 체크인 했더니 그간 할말이 많았던지 혼자서 집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하루를 쉬고 다음날 맨하튼으로 넘어가 내가 좋아하는 감미옥에서 설렁탄을 먹고 뮤지컬을 즐겁게 보고, 유명한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본다. 정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난다. 다음날 Hmart에서 장을 보고 뉴욕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I-87을 타고 Albany로 향한다. 뉴저지 까지는 집도 많고 한데, 뉴욕주에 접어 들자 마자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웃으며 "여기서 부터 2시간 30분 동안 아마 집이 안보일꺼야"하니 웃음이 사라지는 것 같다. 피곤해선지, 두려움에선지 올라가는 내내 별 말이 없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이 지난 후 집에 도착한다. 다행히 룸메이트들이 집을 잘 정리해놓았다. 저녁 무렵 도착하니 우중충한 날씨게 여기저기 눈이 지저분히 녹아 있고 도시도 우중충 하고 어둡다. 집을 둘러보고 와이프는 씻으러 들어갔고 한참을 안나오기에 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가봤더니 욕실에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물이 안나와".. 하며,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는데 저녁에 맥주한잔을 마시며 그간 한국에서 혼자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고, 미국에 오는 것도 여기서 앞으로의 생활이 두려웠는데 뜨거운 물이 안나오자 왠지모를 서러움이 터진 모양이다 (*미국의 많은 가구들은 워터히터-물을 담아서 데워주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물을 오랫동안 쓰면 다시 데워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시골 도시들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어둡고 건물들도 오래되어 좀 답답한 그런 느낌이 있다. 특히나 밤에는 대부분의 건물에 불빛이 꺼져 한국 도시의 밤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 점도 일조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이제 가족으로써의 유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애정하는 감미옥 설렁탕
도서관에서 바라보는 트로이 시내 (겨울에는 우중충 하다)
룸메이트들이 정리해 놓은 부엌 (이제 집기가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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