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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독자분들이 '웬 호들갑'이냐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외국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젊은 나이도 아닌데 (33살에 미국으로 오게 됨) 혼자가 아니라 와이프가 올 때까지 준비해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나에게는 참 많았다. 이제 겨우 집을 마련하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고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적응이 되었다 (곧 학생증으로 버스를 공짜로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온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밥 한 끼 제대로 차려먹지 못했다. (계속해서 라면만 먹고 있었다). 아! 일단 밥솥과 쌀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검색해보니 Hmart에서 전기밥솥과 쌀을 배송해주는 걸 알게 되어 재빨리 주문을 완료하였다. 한국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밥솥도 있고 가격도 다양하지만 일단 미국에서 한국기업의 밥솥은 비싸서, 선뜻 결제를 하지 못하다가 이러다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주문 쌀과 함께 완료한다. 며칠 후, 드디어 밥솥과 쌀이 배송이 되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마주하듯이 학교를 마치고 오자 집 앞에 큰 박스가 떡하니 놓여 있다. (나는 입맛이 완전 한국식이다. 그래서 부모님도 미국에 간다니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어떻게 먹고사느냐?"였다). 몸을 휘날려 박스를 뜯고 쌀을 씻어 처음 밥을 짓는다. 반찬이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와이프가 싸준 볶음 고추장과 계란 프라이를 하나 하여 정말 개눈 감추듯 두 그릇을 비워버린다. 생각해보라, 해외 출장을 가도 하루에 한 끼는 쌀과 고춧가루가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 거의 10일 동안 쌀을 먹지 못하였다니.. (실제로 첫 10일 만에 몸무게가 7 Kg 정도 빠졌었다). 이제 겨우 사람다운 삶을 살겠구나.

 

내 인생에 이보다 기다린 택배 박스가 없었다. (박스 뒤로 당시 나의 모든 살림이 보인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왜 이거 딸랑 두 개만 샀을까 싶다. 반찬도 사지..(밥솥이 300불이 넘어서 선뜻 살 수가 없었음) 
(급속) 밥이 되는 10여 분이 마치 10일 같이 느껴지는

 

이렇게 급하게 밥을 지어먹고 해결하긴 했지만,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밥을 먹자 곧 김치를 먹고 싶다.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주변에 한국사람 (한국 유학생 포함)과 가게는 물론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런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또 다른 인연을 만난다.

 

우연한 만남 2 ,한국사람이다!, 그리고 김치다!.

지난 편에서 집을 계약하고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를 만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인생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게 항상 어떠한 길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김치를 그리워하며 학교를 갔더니 박사과정 담당 스텝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여기 한국 방문 연구원이 왔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수님이 안식년을 오셨나?' , '이 곳 시골까지 오셨네'라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 할머니가 생각보다 젊은(?) 학생같이 보이는 한 한국사람을 데리고 나온다. 

 

나: "어..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어디 교수님이신가요?" 하며 너무 젊어보여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인사를 청했다.

P: "안녕하세요. 네 저 교수는 아니구요. 지금 석사과정에 있는데 방문 연구원으로 왔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박승호 연구원을 만났다. 당시 박 연구원은 석사과정에 있었는데 학교에서 방문 연구하는 기회를 줘서 기술경영/혁신 쪽에 관심이 있어 Dr. Susan Sanderson 교수를 컨택해서 미국에 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첫 생각이 한국사람이다. 정말 반갑다' 그렇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 되는 게 맞다. 그렇게 잠시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박 연구원이 "형, 그럼 오늘 저녁에 밥 먹으러 오실래요?" 하면서 "제가 김치찌개 끓여드릴게요"하는 것이다. 0.5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김치찌개'라는 말에 무너져 버렸다. "근데 제가 차가 없는데 어떻게 갈까요?" 했더니 직접 라이드를 하러 오겠단다. 김치찌개도 감지덕지인데 라이드까지! 마음속에서 감동의 도가니다. 

 

알고 보니 박 연구원은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다른 한국분과 연락이 되었는데 그 박사과정 분이 한국에 잠시 방문하는 관계로 Sublet(렌트한 방을 다시 렌트함)을 받아서 다른 한국분과 함께 아파트를 쓰고 있었다. 동기가 될 대학원생을 한국에서 잠시 만났지만 미국에서 이미 대학원을 다니는 분들을 만난다는 마음에 너무나 궁금한 것도 많고 하여 나에게는 기쁨이 배가 되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 좋았던 박 연구원은 능숙한 솜씨로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동공에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김치다!'.

 

그렇게 둘은 갓지은 밥과 김치찌개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반찬 몇 가지를 꺼내어 마치 최후의 만찬 같은 최초의 만찬을 가졌다. 1인당 수 십만 원 하는 Fine dining의 밥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왜 왔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비슷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곧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형 자주 봬요' 하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날 밤은 아마 내 생애 손꼽을 만큼 행복한 얼굴로 잠에 들지 않았을까.

 

룸메이트가 오다.

박 연구원을 알게되어 진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일단 누군가 물어볼 사람이 있어 좋았고, 필요하면 장 보러 가자며 차로 데려다 주니 기동력이 생겨 더 좋았다. 그즈음 출국 모임에서 만나 함께 지내기로 했던 룸메이트가 Texas에서 차를 끌고 Troy로 오고 있었다. 이 친구는 당시 Texas Austin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기계과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여 와이프가 올 때까지 잠시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어차피 나 역시 돈을 아껴야 하고 미국을 좀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꼬박 이틀을 운전하여 나타난 룸메이트를 뒤가 안보일만큼 한 차 가득 살림살이를 싣고 도착했다. 그러면서 집을 둘러보더니 "형! 필요한게 많을 것 같은데요" 한다. 그날부터 바로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중고 가구를 구매하고, 부엌에 필요한 집기들도 사기 시작한다. 마침 한 한국분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어 가진 가구를 내어놓기에 U-Haul (트럭)을 빌려 그 집의 모든 가구를 가져온다. 그러면서 방안이 하나둘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이제 제법 사람 사는 것 같군.

 

전..

그리고

후, 이제 뭔가 사람사는 것 같고 안정되어 보인다.
중고로 산 가구들, 의자는 샀는데 책상은 아직 없다.
곧 어디서 책상도 구해와 이제 뭔가 사람사는 것 같다.

미국 생활을 해본 룸메이트가 생기자 살림도 하나둘 늘어나고 이것저것 조언을 많이 해준다. 나는 그냥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사다보니 어느새 제법 사람이 살만한 집을 꾸밀 수 있었고, 그때 즈음부터 학교에서도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다. 학교 오리엔테이션은 많이들 별 신경을 안 쓰는 분들도 많을 테지만 외국생활이 전무할 경우는 시간을 쓰실 것을 추천드린다. 아울러 박사과정의 경우 Teaching Assistantship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즈음에 스피킹 시험을 치게 된다. RPI 경영학과의 경우는 TA를 제공하지 않는데 일괄적으로 스피킹 시험을 치게 했고, 점수를 받아 들자 또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 이게 내 영어실력이구나. 그 창피한 점수로 인해서 첫 일 년 동안 영어수업을 들어야 했다. RPI는 학교가 크지 않아 외부에 제공하는 ESL 프로그램이 없고 TA를 지원하기 위한 수업을 몇 개 개설하여 제공하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이때 들었던 수업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제 기다리던 첫 "영어"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뭔가 적응된 내 모습
박사과정 라운지에서 바라본 전경

 

나 같은 경우는 워낙 배경지식이 없어 하나하나 해나가는데 급급해 제대로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건데 이 기간에 중요한 것이 Primary care를 받을 수 있는 Family Doctor를 선정하면 좋다. 한국은 이 Family Doctor 제도가 익숙지 않은데 미국의 경우는 Family Doctor를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의료보험에 따라서 부담해야 하는 Co-pay가 만만치 않긴 하다). 특히, 결혼을 해서 가족이 오는 경우와 출산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 부분을 알아두면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된다. 동네에 따라서 Family Doctor가 새로운 환자를 받지 않은 경우도 많고, 아주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Urgent care나 Emergency room를 이용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둘 중에 차이는 Urgent care는 즉시 목숨에 영향이 없는 경우, Emergency room의 경우는 목숨에 영향이 갈 정도로 구분하면 편하리라 생각한다. 본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 한국에서 미리 검진을 받아 오면 좋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자마자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을 미리 해놓는 편이 좋다. 이것도 학교마다 다르지만, 학교에서 의료보험을 들게 하는데 보통 학생들이 드는 의료보험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 나의 경우는 큰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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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학을 생각하면 영어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무렵까지 영어에 아예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팝을 듣는 걸 좋아했고, 영어 공부하고 단어 외우는걸 꽤나 즐겼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문법 단어만 죽어라 했었다. 실제로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랑 영어를 해본 게 군대 제대를 하고 나서이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아주 활발하거나 Youtube 채널이나 Netflix 같은 영어 콘텐츠를 접하는 게 아주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영어도 졸업이나 취업을 위해 공부한 거지 굳이 유학을 위한 건 아니었다). 요약을 하자면 인도에 갈 때까지 남들이 하는 정도의 정규 영어과정을 밟았다고 보면 된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인도에 갔을때 미드 Friends를 접하게 되는데, 당시 특별히 할 것이 많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일상생활 영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Friends가 상당히 좋은 영어공부 재료가 되었다. 프렌즈는 대략 시즌 1의 5개 정도 에피소드가 넘어가면 그 스토리에 빠져서 계속해서 볼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시즌 1 5개의 에피소드를 처음에는 자막 없이, 다음은 영어자막, 다음은 한국 자막 순으로 3번씩 돌려서 보기 시작했다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다 5개 정도 에피소드를 넘어서서는 그냥 스토리에 빠져 한글자막을 켜놓고 (당시에 듣기가 거의 안되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아침드라마 빠져보듯 보기 시작했다. 기억이 정확히는 안 나지만 당시에 시즌 5인가 6까지 CD로 구워서 들고 온 친구가 있어서 곧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시즌을 다 보게 된다. 근데 더 이상의 콘텐츠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즌1~시즌5까지 다시 한번 정주행을 하게 되고 그게 3번 째인가가 되었을 때 그들의 말이 하나둘씩 적응(들린다기보다는 적응이라는 말이 맞는 듯 목소리나 각 캐릭터의 성향을 이해하면서)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한글자막을 보다가 가끔 재미있는 대화 상황이 나오면 그 부분을 자막 없이 한번 보고, 그러다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 영어 자막을 보고 확인하는 과정을 계속하게 되었다. (일단 공부도 재미있고 봐야 한다). 그렇게 각 에피소드를 대략 5번~6번 정도를 보니 처음에 비해서 상황에 대한 이해나 듣기가 한결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건데, 재미없는 대화 상황을 무작정 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는데, 일단 콘텐츠가 재미있어야 여러 번 보거나 들을 수 있고, 단순히 스크립트를 보거나 글자를 보고 대화 상황을 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아! 그래서 이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이렇게 표현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더 와서 머리에 잘 남는다. 그 이후에도 시즌 10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굳이 화면을 보지 않고 집안일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 계속해서 틀어 놓는다. 통계는 내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각 에피소드 당 적어도 50번은 본 것 같다. (2020년 1월 1일부터 Netflix에서 빠지게 되어 아마 이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내 친구들)

 

* 프렌즈는 시즌 10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1994년 처음 방송되어 각 시즌당 18개에서 25개까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총 236의 에피소드 * 50 을 해보라.. 엄청난 시간을 들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영어공부의 한 고비가 넘어가니 조금은 듣기가 수월해졌던 것 같고 나중에 토플이나 GRE준비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물론 시험으로 제일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건 토익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니 100% 영어수업을 했던 석사과정에서 발표를 할 때 자신감과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석사과정을 하면서 영어로 수업을 하긴 했지만 그때 아주 많이 영어가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한국사람들끼리 (교수님들 그리고 학생들) 영어로 수업하는 게 꽤나 이상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능력으로 아주 고급의 지식을 다루는 건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 특히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것 느낌이다. 석사 과정이 끝날 무렵 취업을 해야 하기에 토익을 준비했는데, 대략 850~890점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900점을 넘어서고 싶었는데 정말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넘지 못해 결국은 한 달 동안 토익 학원을 수강을 했는데 그때 시험 치는 요령을 배워 바로 940점인가로 마무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점수는 한국기계연구원에 입사할 때 쓰였고, 마지막 면접 때 영어공부를 어떻게 했냐고 한 분이 물어보셨는데 Friends이야기를 했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토플(* 그전에 편입 관계로 토플을 몇 번 쳐본 적이 있음)과 GRE를 준비했는데, 많은 분들이 추천한 바와 같이 일단 GRE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경영대학 같은 경우는 MBA나 박사과정 공히 GMAT을 주로 받는데, GMAT을 쳐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GMAT은 영어+논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던 나는 GRE가 맞다고 판단해 GRE를 준비하였다. GRE는 무거운 엉덩이가 중요하다 (2006~7년 이야기라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일단 시험의 성격이나 요령, 공부 방법을 전혀 몰랐기에 학원을 다니기로 하고 이왕 다닐 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서울에 주말반 GRE 학원을 다니기로 한다. 그래서 주중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 집에 와서 영어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수업을 오전/오후에 듣고 저녁에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을 두 달 정도 계속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시험에 대한 감이 생기자 학원을 다니기를 그만하고 (GRE학원도 비용이 만만치 않고 매주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금전적으로 부담이 컸다) 홀로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 커뮤니티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어 지방에 있어도 제법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출연연구원의 기획팀의 경우, 각종 자료 요청이 많아 야근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하루의 일정을 구체화할 수 없어서 일 야근이 있던 없던 단어 공부를 계속했다. 하루의 대략 일정은 6시 30분 기상, 8시 ~ 저녁 9시 (야근이 많아 들쭉날쭉 이었는데 대략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면 평균적인 근무시간이었다) 그 이후 대략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2시 정도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이 과정이 꽤나 고통스러웠는데 GRE 시험 자체의 비용도 만만치 않아 준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분들이 가능하면 짧고 Intensive 하게 공부해서 빨리 끝내라라고 조언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GRE는 대략 암묵적 턱걸이 점수를 받고 그만하기로 하였다.

 

GRE 이후에 토플 시험을 쳤는데 아무래도 큰 산을 넘고 그 뒤의 언덕은 얕잡아 보기 일수다. 하지만 시험의 형태가 다르기에 조금 다른 준비가 필요하고 토플도 미니멈 점수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공부 방법은 GRE와 같은 시간대에 공부를 회사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하였고 GRE보다는 더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진행하였다. 예전에 편입 준비를 하면서 토플 학원에 다닌 적이 있기에 시험의 형식이 낯설지는 않아서 별도의 학원은 다니지 않고 인터넷의 자료와 토플 공부책을 구입하여 준비하였다. 

 

서울에 영어학원에서 풀타임으로 GRE나 토플 공부를 하는 학생(팀)들을 많이 보았는데, 풀타임을 공부해도 쉽지 않은 준비기간이고,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짧은 시간 내에 끝내라고 조언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건 나중에 미국에서 교수가 되든 간에 그때만큼 집중에서 영어공부를 하지 않기에 그 시간이 단순히 입학용 시험 점수를 위해 한다는 마음 가짐보다는 입학 후 닥치게 될 훨씬 더 큰 산을 넘는데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공부하면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교수가 되고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영어점수에 대해서 질문을 종종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Minimum 점수를 넘긴 했는데 조금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Admission을 받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질문이 많았다. 물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학생을 선발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대학원 유학이라는 것은 (특히, 박사과정) 교수 입장에서 자신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연구할 동료를 찾은 과정과 마찬가지로 본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원의 경우에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영어에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 지원을 하기에 영어 점수가 미니멈이 된다면 영어보다는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스펙을 만드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아울러 영어점수가 어느 정도 되면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영어는 모국어가 아닌 이상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또한, 나는 영어공부가 시험/공부용과 회화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플/GRE와 같은 영어공부는 입학 때도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 논문을 읽거나 쓰는 등의 공적인 업무에서 많이 도움이 된다. 즉, 입학시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의 경우 경영학이라 신문을 많이 보려고 하는데 이런데에서도 시험/공부용 영어공부가 도움이 많이 된다. 하지만, 아마도 많은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시험/공부용에 집중을 하고 회화용 영어공부는 조금 등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제 당신이 Admission을 받으면 미국 사회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고 회화는 생활 모든 면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아울러 나중에 미국에서 잡을 잡길 원한다면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이때 회화, 발표 능력은 아주아주 중요하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이 글을 다 읽을 때쯤 아마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어려운 일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는 게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음을 하는 바람이다. 지치고 힘이 들 때 우리가 왜 이 길을 가려고 했는지, 이 길의 끝에 어떠한 결실이 있을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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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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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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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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