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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한국인 교수님들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계신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유명한 한국 부모님의 열정이나 학벌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연히 미국 대학의 교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길 바라는 부모님들에게 '과연 미국 대학의 교수가 좋은가?'라는 질문은 사람에 따라 달리 설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있어서 '교수'라는 직업은 꽤나 매력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의사가 되면 가족이 좋고, 교수가 되면 자기만 좋다'라고 하는 말이 굳이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공유하는 일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미국 주립대학에서 교수가 된 지 비록 3년 차이지만, 다양한 방법 중에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하나의 사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이유에서가 아니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루트가 있겠지만 그중에 조금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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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잔 술과 함께 흥에 겨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당신은 시골에서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고 하셨고 다만, 당신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셔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셨다. 그로 인한 가난으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으셨다는 아쉬움으로 항상 그 무용담은 끝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 받았다면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으리라.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그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들으며 팝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었다. 빌보드 차트의 순위를 외우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발음대로 한글로 적으며 노래를 한두 곡 외우는 그런 학생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과 울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서 사실 미국은 뉴스에서만 간혹 보는 큰 대국 정도의 마음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영어사전 옆면에 'Yale'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는데 (*예전 영한/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던 때에는 사전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학번, 이름을 적어놓곤 했다), 발음도 어려운 저 단어가 무슨 단어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Yale 대학 이름을 처음 들어본 그만큼 미국을 접하지 못한 정말 촌놈이었던 것이다. 팝송을 좋아한 덕분이었던지 영어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험은 곧잘 쳤고, 수능시험에서 1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95년 영어시험은 꽤 쉬운 편이었음)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중앙대)에 입학을 하였고 영어를 좋아한 덕분에 1 지망 영문과, 2 지망 경영학과를 지원하였는데 그때 면접을 보면서 처음으로 '교수님'을 만났었다. 그 당시 중앙대 영문학과 학과장님이셨는데 나의 성이 '강'인 관계로 면접 첫 순서로 3명이 함께 그 교수님 방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었는데, 그 교수님 방에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책들과 방 한가운데 옛날 난로가 연통을 창문으로 뺀 채 훈훈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교수님도 아직은 이른 시간 이신지 그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따뜻한 물을 부어 녹차 티백을 우려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쏟아질 듯 가득한 책들과 난로, 녹차 티백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로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면서 질문하시는 자상한 인상이었다. 꽤나 신생 고등학교였어서 젊은 선생님들을 상대하다가 편안한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막연히 참 멋져 보였다. 그때 처음 '아 교수님은 중후하고 멋지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1 지망 영문학과는 떨어지고 2 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되는 황당한 결과를 받아 들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와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 동문도 거의 없고 (공대에 1명이 있었음) 사투리를 쓰는 정말 촌뜨기인 나는 내가 보기에 멋있는 오렌지족(94~95년도에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들과 전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경영학이라는 것의 'ㄱ'도 모르고 입학했던 나는 당연히 간신히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계기로 아주 기본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경험하고 그를 계기로 잠시 당시 한참이던 벤처붐에 창업한 선배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이후, 누구나 다 그렇듯 나의 한심한 학점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그때 경영과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 과목의 문제를 푸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처음으로 과목에서 시험 100점을 맡게 되면서 '아!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도 있네!'라는 느낌과 '나도 할 수 있네!'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스키장에서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 모은 돈과, 수협 냉장고에서 얼음을 나르는 (어업용으로 쓰는 얼음은 하나에 80kg에 달한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합해 다음 해 여름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서 처음에는 배고픔으로 인해 찾은 유럽 대학들의 학생식당을 들르며 '아!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느낌과 군대 시절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처럼 뭔가 멋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왕 하는 김에 미국 대학으로 편입을 해볼까 고민을 잠시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을 잠시 하였지만, 경험 없는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였기에 무모한 도전이었고 꽤 큰 금액을 전형료로 제출한 뒤 수많은 레젝 레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좌절, 그래서 잠시 가졌던 흥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입대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컴퓨터가 그냥 좋았고, 그 연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도 IT 연수를 신청하여 없는 살림이었지만 싸게 영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출국길에 오르게 된다.

 

인도에서 10개월의 생활은 생각만큼 생산적이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시절 쓰던 말도 안 되는 영어의 반복이었고, 같이 갔던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만 가득한 타국 생활은 전혀 흥미를 못 가졌다. 그때 같이 간 친구 중에 누군가 미드 Friends를 CD로 구워왔는데 적응 못하는 나에게 무심코 툭 던져준 그 Friends가 사실 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이 없다. 영어 공부하는 샘치고 한 번은 무자막, 그다음은 영어자막, 그다음은 한글자막으로 이렇게 한편을 세 번씩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한글자막을 켜놓고 캐릭터에 빠져 계속해서 돌려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즌을 몇 날 며칠을 지속적으로 돌려보다 보니 생활영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영어가 실제 생활에 쓰일 수 있는지를 인도 생활에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절친이 된 동기 친구/선배/후배들

취업을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경영학과 출신에 그렇다고 컴퓨터 언어를 하드코어 하게 하지 못한 나는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평생 한 과목을 빼놓고 공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생에 시험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실패...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대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만나 잠시 함께 전셋집을 구해 살았던 룸메이트 친구 녀석이 당시 ICU(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현재 KAIST)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위로해 준다며 찾아와서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너 미국 대학 가고 싶어 했잖아. 우리 학교 영어로 수업하는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말에 그날 저녁 급하게 원서를 채워 넣고 (수백 번 떨어진 원서를 써본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점수와 전형료를 손에 지워주며 가는 길에 접수해 주라 말을 건넸다. 졸지에 '내 인생에 시험이 없다'던 내가 대학원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점수가 괜찮았던지 연락이 왔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 보러 대전을 가는 날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전을 버스 타고 방문을 하게 되었다. 대전 유성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북대전 IC로 빠져나와서 연구단지 길을 지나가는데 눈이 내리며 숲 속에 쌓인 연구원들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무엇인들 안 멋있게 보였을까). 면접을 보러 도착한 구 ICU 건물은 (그 전 SKT 연구소, 현재는 IITP라고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자리하고 있음) 굉장히 아담하고 뒤에 잔디운동장과 조경이 너무도 멋있는 건물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학부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이기에 아마 교수님들이 보기에 참 형편없는 학생으로 보였으리라 다만 인도에서 배웠던 프로그래밍 경험을 그나마 인정해 주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랩 선배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올 수 있어요?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없던 나는 졸지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라"라며 토닥거려 주셨다. 좋은 건물에 인건비도 지원이 되는 나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었고, 그간 낮아졌던 자존감 덕에 막연히 연구실 내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자발적으로 퇴근하는 삶, 아마도 4~5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 그래도 내가 뭔가 살아있고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좋았다. 석사과정을 통해서 조금은 '아! 연구가 무엇이구나'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군다나 영어로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 그 과정은 엄청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석사 과정이 끝이 나고 한국기계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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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게 쓴 이유는,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의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교수님이나 학계에 있으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식으로든 미국 혹은 외국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울러 소위 SKY 출신으로써 주변에 그러한 루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Yale 대학조차도 몰랐고 영어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외국인과 대화한 경험은 배낭여행 가서 겨우 떠듬떠듬 몇 마디 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계가 되고 결국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물론, 나의 이러한 배경이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마치 모든 복학생이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힘들게 했어'라는 말과 유사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꼭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Yale 대학을 알고 있거나 대학시절에 괜찮은 토플 점수를 가지거나,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때 외국인과 많은 대화를 해봤거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는 의미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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