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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시간은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게 마련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의 그 불확실성에 마음을 졸였었는데, 그 결과는 나에게는 영광스러운 결과였다. 처음 미국, 적응, 영어, 공부, 가족, 이런 단어들로 가득한 삶에서 이제 선생이 추가되었다. 

 

박사과정 말년차 즈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족분이 계신데, 그분들과 식사하는 과정에서 "교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말을 곱씹으며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20대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손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무척이나 방황이 심했는데, 나의 그 나이 때 친구들을 이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명감 같은 거창한 단어는 아니지만 꽤나 긴장을 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은 한명의 연구자를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는 하나 교육자를 훈련시키는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학교마다 좋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거의 95%가 연구자로의 훈련이지 교육자로의 훈련은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좋은 연구자와 좋은 교육자는 꼭 등치가 되는 건 아니다. 선생으로의 평가는 내 수업을 듣거나 나와 함께 인연을 가진 학생들의 몫이겠지만, 그래도 그들과 교류하는 걸 꽤나 즐겼던 것 같다. 아마도 시골 촌뜨기에서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기까지 그 과정에서 참 많은 고민도 했었고 도움도 받았는데 그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영광스럽게 UNIST의 교수가 되고 부모님이 일단은 참 좋아하셨다. 그럴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마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그 즐거움에 친구들에게 꽤나 많은 밥과 술을 사셔야 했을 것 같다. 내가 대단한 효자는 아니지만, 부모님께 좋은 선물 하나를 드린 것 같아서 나 역시 마음이 나쁘진 않았다. 

 

UNIST는 나에게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 나보다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학생들은 싫어했겠지만, 산으로 둘러 쌓인 크지 않은 캠퍼스, 그리고 이런저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볼 수 있는 자유도가 있었다. 물론 처우도 좋았고. 다만 연구중심대학과 티칭 중심대학의 비교를 한 바 있지만, 연구중심대학, 그리고 신생대학으로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내외부의 부담감이 있는 학교였고, 대부분 공대에 사회과학을 하는 과가 껴있는 형상이라, 평가 등 모든 것이 집중화되어 있는 상황은 있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왜 다시 미국으로 가셨나요? 라고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모든 것을 세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는 박사과정 없는 돈에 앞으로 불확실한 내 신세도 참으로 답답했지만, 그래도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함께 밥을 먹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캠퍼스를 천천히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그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한국으로 지원할 것인지, 미국으로 지원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한국의 상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교수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조그만 톱니바퀴 삶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40대 초반에 들어서고 있었기에 무엇인가 결정을 하려면 지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 이면에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이 많은 경우에 박사를 끝내고 미국 대학에서 경험을 가지고 한국 대학으로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면이 달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반대로 박사를 마치고 한국 대학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 대학으로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고 사실 너무도 힘들다는 사실을 몰랐다. (Ignorance is bliss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사실 미국에 이미 많은 후보자들이 있는데 굳이 저 멀리 아시아의 조그만 한 나라에서 사람을 뽑을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한 거지,

 

처음 박사과정을 할 때는 몰랐지만, 다시 준비를 하면서 알게된 것이 참 많은 옵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본, 프랑스, 중국, 미국 이렇게 지원을 하였다. 각 나라들도 국제화에 발맞추어 다양한 International 학자들을 뽑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각 학교 혹은 나라도 궁금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프랑스와 중국이었는데, 지금도 쉽게 이 나라의 학교들이 교수자원 충원에 열심히 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나라에 지원을 하였는데, 다들 캠퍼스 내에서는 영어를 쓰고 있는 나라였다. 

 

지난 실패이후로 정확한 시기를 알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를 하고, AOM을 통해서 각 학교의 Job posting을 확인하고 지원을 하였다. 많은 학교를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준비와 시기가 맞으면 성공확률이 높다. 거의 대부분 학교에서 Skype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재미있게도 각 나라에서 캠퍼스 비짓을 요청받았다. 미리 공부는 했지만, 역시 직접 가서 보면 그 장단점이 명확히 보인다.

 

1. 일본 : 한국에서는 EBS에서 '기적의 학교'로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Akita International University 였다. Akita는 일본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삼나무가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EBS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삼나무로 지어진 도서관을 보여주었는데 이 도서관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일본어라고는 이찌, 니,  정도만 아는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지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을 보여주었고, 노교수와 젊은 교수 간의 명확한 상하가 특징적이었다. (한국이랑 비슷하다). 내 기억으로 한분이 태국 출신이었고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학교 투어를 할 때 스텝에게 도서관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했고 거기서 한 30분만 앉아 있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보여주며 도서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학교는 교육중심의 학교라 연구발표를 짧게 하고 모의수업을 실제 학생과 함께 진행하는 것을 뒤에서 참관하는 스타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이 부분이 특징적이었음), 끝나고 학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끝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캠퍼스 하우징의 1인실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삼나무로 건물이 지어져 향이 너무나 좋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좋았겠지만, 조금 우중충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키타의 유명한 삼나무
내 생애 손꼽을 만큼 예뻤던 도서관, 들어가면 삼나무 향이 온몸을 감싼다.
30여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2. 중국 : University of Nottingham Ningbo. 원래 영국학교였는데 지방정부에서 유치를 해서 적극적으로 학교를 확장하고 있었다. 청주에서 직항 편이 있어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으로 Ningbo에 닿을 수 있었는데, 학교가 신과 구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학교에서 잡아준 호텔 프런트 직원이 영어가 잘 안되어, 캠퍼스를 제외하고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중국어를 전혀 못함. 인터뷰가 끝나고 학교에서 호텔로 걸어오면서 주변 환경을 살펴봤는데, 길거리에 있는 간판을 Starbucks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연구중심의 학교라 연구 중심으로 발표를 했고, 교육경험은 나중에 별도로 질의응답을 하였다. 연구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셨고, 그 이후 학과장님과 별도로 또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UNIST에서 창업교육센터를 맡았었기에 그 학교에서 지금 짓고 있는 창업센터의 청사진을 보여주며 이곳이 완공되면 운영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솔깃한 제안이었다. 저녁에는 그날 그 자리에 면접을 온 사람을 한꺼번에 불러 같이 식사를 했는데 다 한국인이었고, 아무래도 경쟁(?)하는 위치가 뭔가 어색함도 있었다.

 

날씨가 우중충 하긴 했지만, 중국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캠퍼스

3. 프랑스 : NEOMA Business School. 프랑스는 최근 열심히 교원을 충원하여 학교 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데, 굉장히 많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충원하고 있다. 이때가 테러사건 직후이긴 했는데 여전히 엄청난 관광객이 비행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학교는 캠퍼스가 여러곳이 있었는데, 파리에 대부분의 행정 업무가 집중되어 있고, 각 캠퍼스는 교육을 담당하는 듯했다. 그래서 면접도 파리에서 하루하고 다음날 내가 담당할 캠퍼스로 이동하여 연구발표와 교수님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예전 배낭여행 때 파리는 인상이 참 좋았었는데 그곳을 거의 15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라 느낌이 새로웠다. Skype 인터뷰를 끝내고 Campus visit invitation을 받았을 때 이곳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어 친절한 한국인 교수님과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묻기도 하였다. 날씨가 좋아서 그랬던지 활발한 캠퍼스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유럽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유럽 전문가가 되는 것도 꽤나 매력적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15년만에 돌아온 프랑스 파리
파리 캠퍼스에서 HR office와의 미팅, 연봉/지원 등을 논의 하였다.
랭스(Reims)로 이동
잠못이루고 새벽에 일어나서 바라본 Reims 대성당
정말 아름다웠던 랭스대성당
오후에 인터뷰한 NEOMA Business School

4. 미국 : 그리고 마지막으로 Salisbury University. AOM에서 인터뷰를 보긴 했지만, 인터뷰 볼 때 부터 시차를 잘 못 알아서 인터뷰를 놓칠 뻔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당시 노교수님들이 오셔서 인터뷰를 하셨는데 그 인상이 참 좋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 저렇게 콧수염이 하얘질 때까지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은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새롭게 수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내용을 알 리 없는 나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Skype 인터뷰를 다시 하고 그리고 Campus visit 요청을 받았다. 바로 직전에 중국에서 인터뷰를 보고 한국에서 바로 옷 만 갈아입고 다시 미국행을 했어야 했다. Priceline에서 제일 싼 비행기 표를 끊어서 인천에서 다시 중국 베이징을 거쳐 워싱턴으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대략 700불 정도였던 듯 진짜 싸긴 했네). 

 

중국 단체 관광객이 타고 있어 한숨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저녁 늦게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했는데 잠이 올리가 있나, 새벽 3시에 다시 씻고 렌트카를 몰고 초행길을 달려 새벽 6시에 학교 앞에 도착한다. 다행히 Starbucks가 5시 30분부터 문을 열고 있어 커피 한잔에 인터뷰 준비를 한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30까지 하루 빽빽한 일정이었고, 각 교수님들과의 면담, 연구발표, 점심식사, 저녁식사까지 온종일 인터뷰를 보는 것이다. 30분 단위로 돌아가는 일정은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시차 적응에 잠도 며칠째 제대로 못 잔 상태였는데, 다행히 노교수님들이 그 노력을 가상히 봐주셨던 것 같다. 나중에 다시 물어본 적이 있다. 나를 왜 뽑으셨냐고, 당시 Committee chair 였던 교수님께서 주 과목은 Strategy였지만, 창업교육센터를 운영한 경험, Entrepreneurship 를 가르친 경험, 그리고 국제경영까지 할 수 있는 점이 당시 학교에서 찾던 fit에 정확히 맞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커피한잔을 하고, 해가 뜨자 학교를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Purdue Business School
역시 날씨가 중요하다. 아침햇살에 기분마저 상쾌했다.
새로지어져 내부가 멋졌던 도서관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학교에서 오퍼를 받았고, 다행이도 여러 학교에서 받은 오퍼 중에서 각자의 장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익숙한 미국을 선택하고, 그간 정들었던 UNIST와는 작별을 고하고 미국 시골의 한 주립대학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반,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한국-> 미국-> 한국-> 미국 불과 10년 만에 태평양을 두 번 왕복을 했는 나의 여정은 어디로 향할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

 

UNIST의 정들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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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미국 대학(https://07701.tistory.com/131)에 대한 과정을 소개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미국 대학에서는 오퍼를 받지 못했기에 성공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대략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2017년에 UNIST에서 Salisbury University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학교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임용된 스토리를 써보도록 하겠다. 사실 4년이 흘러 다시 준비할 때 이때의 실패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긴 했다.

 

* 이번 편도 역시 학교에 따라 임용과정은 상당히 다를 수 있기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나는 일단 한국과 미국을 가리지 않고 지원을 하고 일단 합격을 한 후에 고민을 하자고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가릴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과 미국 학교는 원하는 지원자의 수준 자체가 다르기에 미국 대학을 준비하면서 별도로 한국 대학에 대한 대비를 했는데,

 

일단 대부분의 한국 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이미' 가진 상태여야 하고, 어느 정도의 계량화된 점수가 되어야만 지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당시 나의 상황에서 처럼 ABD (All but dissertation) 상황에, 1년 차 때 출판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계량화할 수 있는 점수가 거의 없어 대부분의 학교에 지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Job posting에 대한 정보는 하이 브레인 (www.hibrain.net)을 통해서 정보를 구할 수 있었고, Job posting에 구체적인 원하는 지원자의 자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면 충분히 판단이 가능하다. 일단 그런 자격도 문제였지만 일단 물리적인 학교의 숫자가 미국에 비해 월등히 작기 때문에 Job posting  자체의 수가 적고 더군다나 경영학 분야에서 특정 분야를 전공하기에 내가 전공한 분야에 교수를 임용하는 Job posting이 드물었다. 

 

그때즘 집에서 부모님이 "여기 울산에 UNIST라고 좋은 학교가 생겼는데.."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학교가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는 유학 나올 때 즈음 듣긴 했는데, 좋은 학교라 어떨지는 몰랐지만, 일단 신생 학교면 교수자원을 집중적으로 충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 전공분야별로 뽑아야 1명이 다지만, UNIST는 모든 분야에 오픈해서 교수를 충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석사 때 선배가 임용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꽤나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 메일을 보내 보기로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떻게 충원을 하는지 물었더니 사람을 열심히 뽑고 있고, 네가 전공하는 분야도 뽑고 있는 것 같다며 약간의 내부적인 이야기를 공유해 주었다. 그러면서 전공분야를 담당하는 모 교수님께 한번 컨택해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그분께 연락을 했더니 마침 2012년 AOM meeting에 참석하신다면서 나에게 혹시 그 학회에 참여하면 식사를 한번 하자고 하셨다. 어차피 발표도 있고 해서 학회에 참여해야 했던 나는 그 길로 그 교수님과 함께 점심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궁금했던 점도 물어볼 수 있었고,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며 연구분야와 티칭 관심 분야를 물어보셨다. 당시에는 막 3년 차를 마치는 찰나라 아직 프로포절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드렸더니 선배 교수로서 어떤 부분을 준비하면 좋을지 (일반론)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혹시 프로포절을 끝나서 ABD가 되면 연락을 달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UNIST의 경우는 다른 일반적 한국학교와는 달리 미국 시스템에 가깝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 논문의 잠재력을 보고 임용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도 젊은 교수들이 대부분이고 미국에서 학위 하신 분들이 많아 미국 대학에서 임용과정에 익숙해서 일 것이다. 아울러 신생학교이기도 하고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여하튼 그 대화가 있은 이후, 나는 적어도 이 곳에 지원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의 희망 섞인 기대를 하면서 박사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하였다. 그 만남 이후 인사는 드렸지만, 그 이후에는 별도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해가 지나 2013년 봄 프로포절을 끝내자마자 미국 대학을 열심히 지원하면서 그 교수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다. 한국 대학은 학기가 3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은 전년도 11~1월이 임용절차가 진행되는 시기인데, UNIST의 경우는 당시만 해도 3학기제에 교원을 적극적으로 충원할 때가 시기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는 했다. 조마조마하며 이제 ABD 상태가 되었고, 논문의 진행상태를 설명한 메일을 드리고 나서 얼마 후에 답장이 왔는데, 대략 요약하자면 "안녕하세요. 메일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UNIST에 있지 않습니다. XXX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보세요. 저도 전화를 해 놓겠습니다." 하는 메일이 왔다. 쿠쿵! 아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기도 했고 나에 대해서 설명도 드린 분이 다른 학교로 옮기셨다고 하니 그날 밤 꽤나 좌절했던 것 같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소개를 해주신 그 교수님께 다시 이메일을 썼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다시금 나의 소개를 처음부터 시작하는 소개글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메일을 드리게 되었다며 현재의 논문 상황을 설명을 포함해서, 그랬더니 생각보다 금방..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원 날자가 조금 지나긴 했는데, 아직 리뷰 전이니 한번 지원해 보시죠."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서둘러 정리해서 지원을 마쳤다. 

 

그렇게 지나고 며칠이 흘렀나. Skype 인터뷰 요청이 왔고, 이때가 사실 미국 학교와 몇 번 전화 인터뷰를 마친 상태라 어느 정도 담금질을 마친 상태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연구에 대한 소개, 티칭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해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Skype 인터뷰 요청이 왔다. '뭐지?' 하는 생각에 다시 이메일을 드려보니 나를 심사하는 분과가 달라져 다른 Committee와 인터뷰를 한번 더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당시에 여러 분야를 동시에 충원하고 있었는데 내가 Management와 Entrepreneurship 이렇게 두 분야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아시고 다른 분과에 추천을 해주신 거였다 - Entrepreneurship 분야가 급하게 충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 두 번째 하는 거라 Skype 인터뷰가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은 안 나는데 하나의 질문에서 꼬이기 시작하더니 나도 모르게 당황을 하기 시작한다. '망했다.'... 두 번째 인터뷰가 망했으니 이거 무효로 하고 첫 번째 것으로 해주면 안 되겠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며 그날 밤잠을 설쳤다. 아무래도 좋은 인상을 못 드린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이 너무 작아지고 '같은 곳이랑 두 번째 인터뷰를 했는데, 이걸 망치냐'며 스스로를 책망하며 이불 킥을 몇 번을 했던 것 같다. 그게 4월 초였는데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책하면서 연구가 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4월 25일 학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UNIST 교수 공채 면접심사 일정 안내' 

 

아직 임용 확정된 것도 아닌데, 마치 합격자 발표를 받은 것 마냥 기뻤다. 달려가 와이프에게 말했다. "한국 가자!". 미국의 경우는 각 학과별로 채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면접 날자를 조정하는 등의 여유가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학부 면접에서부터 본부 면접 (총장 혹은 부총장)까지 진행하기에 면접 날자를 조정하고 이런 게 힘들다. 4월 23일에 메일을 받았는데 면접 날자가 5월 9일이니 빨리 서둘러야 했다. 서둘러 비행기를 예약하고 쌓아두었던 마일리지를 다 털어 가족도 함께 가기로 했다. 간 김에 가족도 만나고 해서 대략 일주일 정도의 일정을 잡았다. 그 메일에서는 대략의 일정을 알려주셨는데 미국 학교와 인터뷰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했던 게 학부에서 연구 세미나를 하고 다음날 대학본부에서 연구와 교육에 대해서 정리해서 다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질의응답을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급하게 한국행을 떠난다. 사실 나는 울산 출신이고 본가가 UNIST에서 불과 차로 15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갔더니 부모님의 눈이 희망의 눈으로 가득 차있다. '혹시나 되지 않을까?' 하는 눈빛이셨다. 그 부담감을 뒤로하고 면접 준비를 하는데 RPI에서 5년 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메일이 박사과정 코디네이터로부터 날아왔다. 마음은 더 있고 싶지만, 더 이상 버틸 돈도 없었고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하여 마음의 결정은 한 상태이긴 하지만, 코디네이터는 이틀을 줄 테니 결정하라고 한다. 그래서 지도교수님께 물어봤더니 여전히 같은 말씀 "더 있으면 좋긴 한데,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안 그래도 면접을 봐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는데 타이밍도 절묘하다. 

 

두 가지의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더 이상 하는 건 금전적으로 힘들지 않을까?"하시는 것이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는 좋은 소식이 올 거 같지도 않았고 UNIST도 이제 면접을 보러 온 상황이라 불확실성으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일 안되면 다른 회사에도 지원을 해보자' 하는 생각에 일단 5년 차를 더 하지 않겠다고 코디네이터 교수님과 지도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고 약간 껄끄러운 마음으로 면접을 준비하였다. 

 

학부 면접날 시간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도 말끔하고 캠퍼스가 참 예뻤다. 산에 둘러 쌓여있긴 했지만, 그런데 익숙한 사람이라 오히려 더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석사 선배를 만났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학부 면접과 본부 면접의 팁을 물어볼 마음에서였다. "자신감 있게 하라고" 하시는 거였다. '네.. 자신감 있게', 학부에서 하는 연구발표와 면접은 별문제 없이 진행이 되었다. 아무래도 서류를 뽑으면서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국까지 비행기를 지원하면서 부른 터라 다들 응원해 주셨다. 거기다가 연구발표도 이미 수십 번도 더 한 발표라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학부 발표 후 개개인의 교수님과의 면접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시며 나는 본부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상을 드릴 수 있을지 묻는 걸 잊지 않았다. "자신감 있게 하세요!" 같은 말씀이셨다. 미국 대학에서 혼이 빠질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한국이라 마음이 편한 게 있다. 다들 잘 대해주시기도 했고, 끝나고 저녁을 함께 먹으러 갔더니 거기에 내일 본부에서 면접 볼 교수님들이 함께 동석하셨다. 같은 포지션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각각 다른 포지션으로 내 기억이 맞다면 4분의 지원자가 저녁을 다른 경영학과 교수님과 함께 했다. 그러면서 "다들 잘하셔서 좋은 소식받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본부 면접날,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는 본부 면접이 아주아주 중요하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어제 만났던 다른 분야에 지원한 교수님들과의 짧은 대기실에서 만남을 뒤로하고 본관동에 큰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아주 긴 회의 테이블에 멀리 창밖으로 산이 보이는 게 분위기가 벌써 주눅 들게 만드는 것 같다. 당시 총장님과 부총장님, 그리고 다른 원로 교수님들이 함께 하고 계셨는데, 내가 발표를 끝내고 나자 질의응답하기 전에 어색한 정적이 조금 흘렀다. 그러던 중 어제 만났던 한 노교수님께서,

 

"고향이 울산이랍니다." 하시면 총장님께 말씀을 드리니, 웃으시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 게 아닌가.

 

분위기가 압박일 수도 있고 그때그때 다르다고 말씀을 들었던 터라 꽤나 긴장을 했었는데, 저 질문 하나로 분위기가 생각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외쳤다. 지금까지 기계연구원에서 했던 일들, 연구하는 분야들 내가 생각하는 울산 지역 출신으로서 생각하는 UNIST의 모습들을 내 나름 '자신감'있게 말씀을 드렸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어느덧 면접은 끝났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은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으니 꽤나 만족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나고 경영학과 교수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니 부모님, 와이프, 온 가족이 왕눈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에 나는 그저 "열심히 했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고, 수고했다라며 이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사실 언제 결정이 날지 몰랐기 때문에 아마 소식은 못 들을 것 같았는데, 그날 저녁 선배에게 전화를 해보니 기다려보라는 말씀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본부 면접의 결과가 끝나면 결과를 정리해서 결재를 맡고 또 이사회의 결재를 맡아야 하는 과정이 기다린다 (특별히 결정이 바뀌진 않겠지만, 도장이 중요하다). 아울러 그날 본부 면접이 총 8명인가 9명인가 진행했는데, 한꺼번에 경영학과 지원자가 많기도 했고, 분위기가 좋지 많은 않은 것 같다는 애매한 답변을 주셨다. 더 채근할 수 없어서 그냥 기다리기로 하고, 서울에 처갓집으로 향했다. 당시 전체 일정이 대략 일주일 정도였고, 면접 준비 및 면접으로 4일을 쓰고 잠시 서울에서 숨을 고르고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일정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예정된 전날 저녁, 저녁을 먹고 다시 2살짜리 애기를 데리고 비행기 탈 생각에 한 편으로는 깜깜하기도 하고, 면접이 잘되었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선배 교수도 내 분야 분과 교수님들께 민폐를 끼칠 수가 없어서 그냥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되고 와이프는 이제 일찍 자려고 씻으러 들어갔는데, 전화가 온다. "띠리리~". 선배다.

 

두근두근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그 선배는 밝은 목소리로 "소식 들었지?.." 하시는 것이다. '아 이제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박사과정 준비를 하고, 한 번의 실패를 하고, 재준비를 하고, 미국을 알지도 못하면서 시작한 유학생활에, 돈이 쫓기어 가며 섣부르게 잡마켓에 나온 수년간의 과정이 필름처럼 지나가더라. 됐다.

 

이후, 원래는 함께 미국으로 와서 정리를 해야 했지만, 굳이 또 비행기를 온 가족이 타고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나 혼자 들어가서 정리하고 논문 마무리하고 디펜스를 마치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겠다. 미국 동부로 비행이 항상 힘들었는데 어느 때보다 가벼운 비행이 아니었나 싶다. 

 

소식을 들은날, 페북에 짧게 소감을 남겼는데, 아직 박사논문도 마무리해야 하고, 나 역시 공식적으로 소식은 들은 것 아니라 애매하게 쓸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나인데도 믿고 따라와 준 사랑스러운 아내와 힘든 와중에 태어난 이쁜 내 딸 아라, 물심양면으로 마음 써주신 양가 부모님들, 힘들 때 파이팅을 외쳐주던 친구들 모두 감사합니다. 정말 깡 하나로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마무리를 앞두고 있네요. 아직은 채우지 못한 1%가 있기에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영광스럽게도 좋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돌아가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해온 만큼 잘 마무리해 나가겠습니다. 많은 이들의 걱정과 관심이 때론 부담이 되고, 지치게 만들지만 지금껏 잘 해왔듯이 앞으로도 잘하나 갈 것을 약속드리며, 조금은 한걸음 뒤에서 그저 잘 쳐다봐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한 모습 보여 그릴게요. 많이들 마음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소식 전하겠습니다."

 

인생 손꼽을 만큼 감동적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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