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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학기는 물론 드라마로 가득하지만 생각보다는 잘 따라가고 있었다. 매일 수업을 하고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어 사실 학교 외에 다른 걸 경험하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나이 들어서 온 게 아닌가. 여기서 돌릴 수 없기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 와이프는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집의 판매는 부동산에게 부탁을 했고, 문제는 나머지 신혼가구 들을 비롯한 기타의 것들을 처분하고 이사를 직장을 다니면서 준비한다고 매일 힘들어 했기에 나도 여기서 힘들다고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가자고 생각을 하고 있으나 정작 심장과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득하다. 

 

학기가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메일을 하나 받았다. 다른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포닥을 찾고 있었는데 RPI에서 오퍼를 받았다고 집을 구하러 잠시 들리는데 혹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냐는 메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미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니 멋진걸?' 하는 생각이 제일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물론이죠 하면서 짧지만 그간 동네를 돌아보면서 알게 된 정보들을 공유하였는데, 얼마 후 자신이 아파트 오피스에 연락해서 몇 군데를 보기로 했는데 혹시 하루 묵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나이도 동갑이었고 얼마 전 내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우연한 인연들 기억이 나 그러시라고 했고, 룸 에이트도 Okay 하였다. 

 

그 날이 다가왔고 그 분은 미국에서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지 능숙하게 아파트를 다 봤다며 다시 한번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하루 묵게 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실까요?' 한다. 그래서 알게 된 몇몇 대학원생 들을 불러서 함께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 거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윙과 피자를 사고 맥주를 사서 조촐한 식사를 한다. 

 

알고 보니 그분은 나와 같은 출연연구원 출신에 스위스 등에서 공부도 하고, 미국에 와서 박사를 끝낸 아주 재미있는 입담을 가진 분이었다. 나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하루하루 겨우겨우 수업을 따라가다 오랜만에 수다를 떠니 기분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미국 박사과정에서 유의할 점 (전공은 달랐지만), 미국 생활의 어려움, 내가 했던 미국에서 했던 실수 들 이야기를 하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미국 박사과정을 하면서 아주 달콤한 정보를 제공했던 '마일모아' 홈페이지(www.milemoa.com)를 알려주며 꼭 해보라고 미국에서 크레디트 카드를 만드는 방법을 강의까지 하고 가셨다. 재미있는 사연과 유용한 정보가 가득했던 그 분과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내가 나도 결혼을 했고, 지금은 와이프가 한국에서 집을 정리하고 있는데 겨울에 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할 말이 많은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 제가 돌싱이거든요" 하시는거다. 당시 나는 TV를 본 지도 오래되었고 한국에서 '돌싱'이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모를 때 여서 대략 말은 안 되지만 '멋진 싱글' 같은 표현으로 생각하고 무던히 넘겼다. 근데 아무리 들어봐도 이야기가 이상한 거다. 그래서 조심히 물어봤다. "근데 돌싱이 뭐예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모르셨구나 요즘 유행하는 말인데 '돌아온 싱글'이요". 설명을 해줘도 내가 못 알아듣는다 "돌아온 싱글이요?" 했더니 웃으며 "아 저 이혼했어요" 하는 거다. 순간 정막이.......

 

곧 그 분은 괜찮다고 오래전 일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결혼해서 와이프가 온다고 하니, 와이프에게 잘해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본인의 목표를 위해서 오면 환경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데, 결혼해서 무작정 따라오는 경우는 남편이든 와이프든 학교를 가지 않는 다른 한쪽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다고 했다. 그분의 와이프도 미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여기서 못살겠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결국 이혼을 하셨다고 했다. '둥!' 동공 지진....

 

그렇다, 내 꿈인 박사과정을 한다고 그렇게 준비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그 생각은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 저녁 자주 가는 Gohackers의 게시판을 뒤지다 보니 '배우자 생생 일기'라는 게시판이 있었고 거기에는 온갖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이야기과 푸념들로 가득한 것이다. '아.. 어쩌지?'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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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결혼을 하고 유학을 오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고 각 선택에 따라서 장단점이 있기에 무엇이 정답이다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다만, 결혼을 하고 유학을 나오는 분들의 경우는 단순히 자신 만의 박사과정에 대한 계획도 중요하지만 배우자가 유학생활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별 준비 없이 오신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종종 포닥이라던지 박사과정생 중에서 결혼한 다른 커플 들과 잘 지내면서 이겨내는 방법도 있긴 하나, 자칫 공부를 하지 않는 배우자의 경우에는 쉽게 자신이 뒤쳐지는 느낌과 향수병, 우울증 등이 겹쳐 오는 경우가 흔하고 배우자가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본인의 공부에도 지장을 줄 수도 있으니 특히, 외국생활 경험이 없는 부부의 경우에는 많은 준비와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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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유학과는 조금 떨어진 그 당시 즈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나의 경우는 그때가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기였는데, 아마 일반적인 인생의 패턴을 따르는 분들이라면 이런 것들이 때론 유학을 고민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뤄보기로 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4년 12월에 한국기계연구원에 들어갔을때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29세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구소에 들어오시는 연구원 분들은 대부분 박사를 마치기 때문에 연배가 좀 있는 편이 많은데, 아예 병역특례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원래 어릴 적 꿈이 과학자였는데, 물론 흰가운을 입고 이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소에서 일을 하니 일종의 과학자가 아니던가 - 물론 사회과학자도 과학자이긴 하지만.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주변에서도 그렇고 아주 많이 좋아해 주셨다 특히 부모님의 경우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시골에서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이 취업문턱에서 번번이 좌절을 하던 아들이 우연히 (*지난 편 참조) 석사를 하게 되고 마치자마자 연구소에 들어갔던 것도 그렇지만 연구단지 주변의 좋은 환경이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곳에서 좋은 직장을 얻은 아들이 되었으니 당연히 좋아해 주셨었다. 나도 좋긴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30년을 근무한다는 거지?'라는 생각과 '어릴 적 꿈을 이뤘는데 뭔가 허탈한데?'라는 두 가지 생각이 많았다.

 

아마 가족들은 거기서 평생을 다닐 것으로 생각했고 ('평생직장이긴 하다') 빨리 집을 사서 이제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특별할 것없는 우리네 부모님 들이었다. 그 당시 테크노밸리라고 하는 대단위 단지가 1차, 2차 이렇게 개발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석사 때 선배형이 분양받은 전셋집 (36평)을 싸게 주셔서 혼자서 그 넓은 집에서 살며 일하는 삶도 나쁘진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흡족하셨고 다음 단계를 내심 기대하시지 않으셨던가 싶다. 내 마음속도 일단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았지만, '일단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자리 잡았던 것 같다. 1년 즈음이 지나자 주변의 많은 박사님 들과 나름 자신의 한계를 느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기 시작했고, 2006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일부분 유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스펙을 잘 알기에 미래는 불투명했고, 지금 맡은 일은 망쳐가면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유학을 준비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를 하는 걸 알게 되신 부모님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러냐"며 말씀을 하시고 명절 때 집에 찾아가 피곤해하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바드를 가지 않았겠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이제 정착하고 덜 피곤하게 살았으면 하는 아들이 일 끝나고 공부하며 피곤해하는 모습이 부모님으로 그리 달갑진 않으셨을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을 한참 진행하고 그것들이 마무리 될 무렵,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현, 와이프), 그리고 전 편에서 0.5승이라고 그간의 결과로 첫번째 합격증을 받아 든 순간이 한참 만날 시점이라 나 스스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와이프는 그렇게 노력한 결과인데 가라고 했지만, 금전적 부담과 꿈 그리고 연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와이프나 처가 식구들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는데, 오랜 유학을 꿈을 접는 모습이 짠해 보이셨던지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혼자와 둘은 유학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실제로 유학을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 (공대 중심이라 주로 남학생 들이었음)의 경우 아주 극심한 외로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겨울의 날씨가 어둡고 우울하고 많은 눈이 내리는 곳에 가게 된다면 더욱더 그러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때 그 친구들이 나를 참 부러워했다. "형은 외롭지는 않으시잖아요" 하면서. 그런데 결혼을 한 후 같이 오게 되면 외로움은 덜하지만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일단은 돈문제, 학교에서 생활비가 1인이 생활할 정도의 생활비가 지원된다. 그리고 한 명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발전하는 유학생의 모습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엄청 노력하지 않는 이상은 그냥 따라온 사람이 되어 그 자괴감이 크다. 아울러 영어도 잘 안되고 친구도 가족도 없이 공부에 바쁜 다른 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길이 맞을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가던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가능하면 날씨 좋은 곳으로 가라'이다. - 나중에 유학생활을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겠다.

 

그렇게 2007년 말 결혼을 하고 결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2차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나중에 와이프는 이 일을 두고 배신감에 부들부들했다며 아직도 놀린다). 이제 가족이 있고 혹시나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금전적인 부분이 더욱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생긴다. 전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차 유학 준비의 결과와 학교 선택에 주요한 요인을 제공한다.

 

   1.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S&T Policy에 펀딩 없이 합격 - GIT는 학교도 아주 좋은뿐더러 이 학교가 위치한 애틀랜타는 도시도 크고 한국 커뮤니티가 미국에서 4번째로 크고, 한국 직항편도 있고, 집 가격도 싼 편이다. 여름에 더운 것만 빼면 아주 좋은 조건

   2.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경영학과 펀딩 $20,000불 합격 - SIT는 GIT에 비해서 학교의 인지도가 떨어지나 위치가 맨해튼이 내려다 보이는 허드슨 강변에 위치해 맨하튼으로의 접근이 용이하고 월가 등의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겠다는 장점이 있으나.. 맨하튼이 내려다 보이는 곳인 만큼 집값이 살벌함

   3.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경영학과 펀딩 $17,000불 합격 - SIT를 고민하면서 결국 수락을 하지 못한 건 살벌한 집값과 생활비 때문이었는데, 이에 비해 뉴욕 주도인 Albany에서 20여분 떨어진 Troy라는 시골(?)에 위치한 학교라 렌트비 (당시 2 베드가 대략 1000불 가량)를 제외하고 약간이 생활비라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을 보태 부부가 살 수도 혹시나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음. 아울러 학교도 SIT처럼 나 역시 처음 들어 봤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 역사가 200년이 조금 안 되는 학교라 왠지 믿음이 갔지만 결국 주요한 요인은 생활이 가능하냐 여부.

 

SIT 합격을 받고 나서 와이프와 둘이 엄청나게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을 하고 논의를 한 끝에 결론은 현재 재정상태면 어렵겠다는 결과를 내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마시며 포기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전셋집 주인 (앞서 이야기한 선배네 집 아님)이 말도 안 되게 전세금을 올려 달라는 바람에 집을 사버리고 말았고, 6월이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무렵 RPI에서 합격자 통지가 왔을 때는 SIT를 고민했던 적이 있던 터라 맨해튼 바로 옆보다 $3,000 불 차이인데 시골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유학을 결정했으나 결혼을 하고 나면 생각할 것이 배로 늘어난다. 나의 나의 부모님이 허락을 하더라도 와이프와 그의 부모님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경우는 그 간의 노력을 아셨기에 아쉬움은 감추지 않으셨지만 반대를 하시진 않으셨다. 결국 결혼하고 집도 사서 이제는 평범하게 여생을 살겠구나 하는 나의 부모님의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고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야 하는 섭섭함은 나가는 날까지 감추지 못하셨다. 연구원에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주셨다. '너, 일도 못했는데 잘되었다'는 반응은 다행히 아니셨고 -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름 일을 열심히 했다 -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그만두는 거니 잘해보라며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셨다. 물론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이제 아주 작디작은 문을 하나 열고 큰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독자들도 느끼시겠지만 이미 지치는 것 같다. 만일 유학을 안 가는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쉽게 백 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가야 한다는 건, 단 한 가지 이기에 이 결정을 하고 수행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나의 경우처럼 가족에 이러한 길을 간 사람이 없어 어떤 길인지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경우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까지 했다면 안 되는 이유만을 나도 모르게 늘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지금 시점에서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잘 한 결정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유학 나오기 직전에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결정이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일단 나는 죽어라 할 테지만 결과가 지금보다 나빠질 수도 있어, 만일 그런 일이 있더라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사실 박사가 끝날 무렵 나의 모습은 이런 호기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그것을 보실 수 있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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