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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부터는 사진과 함께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자료가 많이 없어져서 이전 자료에는 사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9년 제대를 한 이후에 American dream을 꿈꾼 뒤 10년이 지난 2009년 6월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여의치 않아 쓰디쓴 소주에 묻어버리길 몇 차례). 맨해튼은 아니지만 NY주의 주도 Albany에서 약 20여분 떨어진 Troy로 가기로 한 것이다. 2003년 석사과정을 하면서 Las Vegas에서 첫 번째 논문 발표 후 뉴욕에서 느낀 그 감정을 공유 드린 바 있다. 그때 뉴저지에서 친구를 만나며 이곳에 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바로 그 꿈을 꾸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더욱더 감동이 더 했던 것 같다. 

 

감동적인 순간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었다. 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오퍼를 금전적인 이유로 거절을 하고나서 상실감과 그 시점에서 전셋집 주인이 과도하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던 차에 (일부분 홧김에) 집을 사버린 걸 지난 편에서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집을 사고 한 달만에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돌려 이야기를 하자면, 미국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합격증을 받게 될지 몰랐으니,

 

일단 6월 초에 합격증을 받고 이 오퍼를 받겠다는 수락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냈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관련된 비자 처리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여 한국으로 보내준다. 수락 의향을 학교 측으로 보냄과 동시에 집과 직장에 나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일단 내 그리고 처의 부모님들은 그간의 노력을 알아서 그러셨는지 그러라고 말씀을 해주셨고, 직장에서도 아쉽지만 열심히 해보라며 흔쾌히 응원을 해주셨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한 달 전에 이사한 집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였다. 

 

와이프가 당시 일을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8월 초를 미국 이주 날자로 생각하기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단 내가 먼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고 나머지 집/집기를 정리한 후에 12월에 와이프가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그 집을 전세로 놓고 갔으면 꽤 쏠쏠했겠지만 (한국의 집값 상승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그런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어서 정리를 하기로 했고 우리가 구매했던 그 부동산을 통해서 다시 판매를 하기로 이야기를 먼저 해두었다. 여하튼 큰 정리와 이사는 당분간 와이프가 거주를 해야 하기에 와이프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미국 갈 준비를 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한번 미국으로 들어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하거나 그럴 여유는 없었고, 일단 당해 합격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출국자 모임에 참여하고 그 때 알게 된 친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어떻게 준비할지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RPI의 경우는 출국자 수가 적어서 그때 3명인가 4명인가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 석사과정으로 합격한 한 친구와 12월 와이프가 올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하고 - 이는 일단은 금전적인 이유도 컸고, 내가 미국을 전혀 몰랐기에 미국 생활을 해본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나는 일단 학교에서 보내준 학생비자 관련 서류로 가족 모두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신분을 Clear 하는데 먼저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렀던지 학교 측은 성과 이름을 바꾸어 써와서 대사관에서 서류를 다시 해오라 하여 급하게 학교로 연락해서 새로운 서류를 받아서 비자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 가서 볼 몇 권의 책들과, 당분간 사용할 국제 운전면허증, 그리고 힘겹게 받았던 F1 비자를 몇 가지 준비하는 게 다였다. 나중에 정리를 하겠지만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한데, 지인에게 인사를 전할 시간도 뭔가 영어를 더 공부할 시간도 없었기에 그저 문제없이 미국까지 갈 준비를 하는 게 다였다. 또 하나 준비한 것이 통신수단,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라 한국에서 미리 미국 전화번호를 개통할 수 있는 '힐리오'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핸드폰도 미리 준비를 하였다 (이제는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행기 티켓도 시간이 촉박해서 회사를 통해서 알게된 여행사를 통해서 편도 비행기를 발권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언제 또 오겠냐 싶은 마음에 와이프와 3박 4일 남도 한 바퀴를 돈다. 바빠 죽겠는데 준비는 안 하고 웬 남도 여행을 했냐고 하시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때라도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와야 한다. 큰 가방 두 개에 가서 당분간 입을 옷가지 외에 다른 걸 준비하지 못하고 8월 10일 ICN->ALB까지 내 인생에 새로운 첫 발을 내딧는다. 당시에 델타로 편도를 발권하였는데 그 발권 표를 받았을 때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으로 델타 제일 싼 비행기로 끊으니, ICN->NRT(일본 나리타)->EWR(뉴어크)->ALB(알바니) 일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확인한 것 중에 하나가 당시 대학원 학생회장이었던 윤성호 (지금은 Ph.D. & MD 를 모두 소유한 능력자) 박사에게 미리 연락해서 픽업을 부탁했었다. 그리고 집을 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양 집안 식구가 배웅해 주는 와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나도 함께 눈물 흘릴까 그 자리가 불편해 재빨리 공항 입국장으로 향했다. 2번의 트랫짓이 남아있기에 긴장을 한 상태로 (여기서 긴장은 뭐 놔두고 오는 거 없나?.. 이런).. 그런데 웬걸 첫 번째 나리타 공항에서부터 미국행 비행기가 연착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 EWR에서 ALB로 가는 연결 편이 문제이고,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윤성호 박사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음은 까맣게 잊은 채

 

다행히 무사히 입국심사를 끝내고 뛰어가며 연결 편 비행기를 찾았더니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찌해야 하며 긴 Customer service 줄 뒤에 서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미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당시에는 몰랐지만 미국의 악명 높은 Airline Customer Service)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구나 하며 하루 만에 가슴은 콩닥거리고 좌절의 벽을 느끼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To albany!'라고 하는 것이다. (공항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고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로 갔더니 다행히 연결편도 연착이 되어 오히려 몇 시간을 더 기다려 한밤중에 타야 했다. 그때 불안한 인터넷 연결(당시만 해도 공항에서 인터넷이 아주 불안했다)을 겨우 연결해 성호에게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다. 미안하다. 너무 늦어서 들어가라.라고 전했다.

 

무거운 짐을 안고 결국 그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얹었고, 어두워 밖이 잘 안 보이는 가운데 드디어 내가 앞으로 생활을 하게 될 Albany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근데 웬걸, 그 친구가 6시간이 넘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연신 그랬더니 윤 박사 왈 "알바니 공항이 인터넷이 잘 돼요.." 하며 웃는 것이다. 그렇게 꼬박 24시간을 넘겨 겨우 생활할 알바니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는 긴 여정 중 첫번째 코스 이제 정말 떠나게 되다니

 

일본 공항에서 기다릴때는 나의 혼란한 마음과 같이 비가 내림 (연착되어서 한없이 기다림)

 

EWR에서 ALB까지 데려다 주었던 프로펠러 비행기 (처음 타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 같은 경우는 합격을 하고 오퍼를 수락하고 나서 무엇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만일 내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영어와 박사과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통계 등의 준비를 더했을 것 같다. 특히 영어의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생활영어와 당장 미국에서 겪게 될 약간의 기본적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 같다. 물론 다 겪으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늦게 가족을 데리고 전혀 미국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이제 정말 외국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도착해서 2주에서 한 달 정도는 굉장히 충격이 큰데, 미국의 생활방식이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가본 적이 없다면 이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종교가 있는 경우에는 한인교회 등에서 제공하는 정착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윤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지금껏 미국 생활의 은인으로 감사해한다. (다시 한번 고맙다 윤 박사!).

 

합격하면 큰 산을 넘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꽤 스릴 있는 예고편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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